독후 단상 03. 그리운 메이 아줌마/ 신시아 라일런트
모든 책은 저마다 다른 색으로 좋아서, 인생책을 고르기란 늘 어려웠다. 그런데 《그리운 메이 아줌마》를 읽고 나서는 조금 달라졌다.
이 이야기는 내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법’을 조용히 가르쳐주었다. 슬픔을 희석시키는 대신, 필요한 만큼 기다려주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실은 첫 문장을 읽는 순간부터 나는 작가의 문장에 곧장 매료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메이 아줌마를 잃은 뒤 남겨진 사람들의 시간을 따라간다.
[아줌마는 오직 사랑뿐인 커다란 통 같았다.]
서머의 고백에, 메이 아줌마가 서머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나도 내 안에 더욱 사랑만 가득 담아야지 생각했었다. 서머와 메이 아줌마, 오브 아저씨, 이 세 식구가 함께한 시간은 비밀의 화원에 찾아든 봄처럼 향기로운 날들이었다.
메이 아줌마의 죽음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시련으로 다가왔다.
오브 아저씨가 메이 아주머니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더디게 흐르는 시간 동안, 서머는 오브 아저씨의 곁을 묵묵히 지킨다. 자신의 슬픔을 뒤로 미룬 채로 말이다.
서머의 가슴에 가득 찬 슬픔은 자꾸만 팽창하다가 결국 얇아진 한 면을 뚫고 터져 나올 듯 위태롭다. 메이 아줌마의 장례를 치르는 중에는 고요히 슬픔을 마주할 시간이 없었다. 바쁘고 정신없이 지난 탓에 제대로 애도하며 깊이 슬퍼할 수 없었다. 이후 메이 아줌마가 없는 일상이 시작되자 공허함으로 들어찬 집안은 낯선 풍경을 그려낸다. 오브 아저씨의 생애 첫 늦잠은 본인에게도 서머에게도 심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그 일이 나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클리터스에게는 말하기 싫었다. 나는 오브 아저씨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수 없었다. 아저씨 곁에 남아 아저씨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그게 내 고통이었다."
서머가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오브 아저씨의 부질없는 애도의 과정은 너무나 위태롭고, 불안했을지 모르겠다. 살면서 처음 늦잠을 잔 오브아저씨의 어색한 등장에, 나조차 차라리 팍 터진 물풍선처럼 슬픔을 꺼내길 바라게 되었다.
조용한 애도의 시간 동안 서머와 오브 아저씨의 곁에는 조금 엉뚱한 꼬마, 클리터스가 등장한다.
나는 유독 클리터스가 귀엽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어딘가 엉뚱한 그는 서머와 오브 아저씨 곁에 자연스레 녹아든다. 본인은 알아채지 못했을 테지만, 덕분에 두 사람도 힘든 시간을 버텨냈으리라 생각한다.
‘꼭 흠뻑 젖은 양탄자를 둘둘 감고 있는 것처럼요(p.47)'
오브 아저씨와 금세 친구가 된 클리터스는 어릴 적 익사사고를 겪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오브 아저씨는 죽음의 문턱에 다녀온 클리터스라면 메이 아줌마의 영혼을 만날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는다.
“아는 영혼도 없고요,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말이에요.”
클리터스는 자신 없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메이 아줌마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오브 아저씨의 실낱 같은 희망의 여정을 함께하기로 한다. 어쩌면 서머 때문이었을까?
“서머, 그 돌덩이들 좀 내려놔. 그렇게 무거워서 어떻게 사냐?”
클리터스의 눈에 비친 서머는 또래 아이들 같지 않은 구석이 있던 걸까. 특유의 화법으로 위로하는 방식이 서툴지만 따뜻하다.
서머라는 이름의 발음을 작가는 어떻게 소리 낼지 궁금해지는 대목이기도 했다. 이 이름은 결코 쨍한 음성으로 불릴 것 같지 않다. 부드럽고 달큼하다. 푸딩 같은 음성으로 조심스레 꺼내 불러야 할 이름이다. 메이 아줌마는 분명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오브 아저씨의 간절한 바람에도, 클리터스는 메이 아줌마의 영혼을 만나는데 실패한다. 그렇게 서로의 슬픔을 붙들고 흐르던 시간은 '심령 교회 홍보 전단지'를 통해 새로운 기대의 국면으로 세 사람을 데려간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끝내 메이 아주머니의 영혼을 만나지 못한 오브 아저씨는 크게 낙심한다. 모든 게 끝났다는 허탈감이 우두커니 선 그의 뒷모습에서 풍겨났다. 이 순간, 오브 아저씨의 세계는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자신의 슬픔을 색종이 네 귀퉁이를 접듯 가만히 누르고, 마침내 아이들을 위해 차를 돌리는 장면에서 나는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어른의 기준점이 필요할 때면, 어김없이 이 장면이 떠오른다.
그 순간, 나는 이야기를 읽는 독자가 아니라 그 차 안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이 된 듯했다.
오브 아저씨가 메이 아주머니를 다시 만나리란 기대가 산산이 부서진 순간. 혼자였다면 그저 실의에 빠져 자신의 슬픔 외에는 아무 감정도 알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클리터스와 서머를 위해 감정을 정리한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강한 어른’이 아니라 ‘다정한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브 아저씨 같은 어른, 메이 아줌마 같은 어른. 내 안에 하나의 기준이 생긴 순간이었다.
그리고 서머는 집으로 돌아와 메이 아줌마의 편지를 받는다.
‘더 간절해지라고 신이 때를 맞춰’ 서머를 자신에게 보내주었단 이야기에, 오브 아저씨의 품에 안겨 꾹꾹 참아온 울음을 터트린다. 서머가 메이 아줌마를 떠나보내는 동시에, 마음에 더욱 단단히 붙잡는 장면이었다.
마지막으로 오브 아저씨의 특별한 바람개비를 함께 날리며 비로소 메이 아줌마와 이별하기까지, 그들은 서로의 시간을 잘 기다려주었다.
이 책을 덮을 당시에 나는 울고 싶을 때 이 책을 읽고, 울고 싶지 않을 때도 이 책을 읽을 거라 다짐했었다.
그 당시 나는 슬픔이나 죽음이라는 단어에 동요되기보다는, 먼발치에서 깊이 애도할 수 있는 마음 상태였다. 방이 여러 구획으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안전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황무지 같은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나는 이 책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브 아저씨와 서머처럼 슬픔을 억지로 희석하지 않고, 차츰 흘러가도록 두었던 건 내 마음 어딘가에 그들의 '슬픔을, 자신의 속도로 슬퍼하는 방식'이 남아있던 덕분일 것이다.
몇 해 전에 읽은 책인데도 장면들이 여전히 생생하다. 모든 문장에 코멘트를 달고 싶을 만큼 좋다. 아껴 읽고 싶고, 동시에 빠르게 읽고 싶고,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고, 동시에 모두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임에 변함이 없다.
삶의 어느 때엔가 황무지의 시간은 다시 내게 올 것이다. 그때 내가 이 책을 잊고 있더라도, 나는 알 것이다. 슬픔은 바삐 희석시키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것임을.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다시 오브 아저씨의 차에 올라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