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단상 08. 글을 통한 랑데부 또한
어디선가 ‘우주적 랑데부’라는 어휘를 보고는 그 표현이 마블링을 연상시켜, 랑데부란 어우러진다는 뜻일까 하고, 대강의 뜻을 미루어 단정했었다.
문득 생각나 정확한 해석을 찾아보니 ‘우주적 랑데부는, 우주에서의 만남이나 조우를 뜻하며 주로 우주 탐사나 항공 분야에서 두 물체(우주선, 위성, 혹은 탐사선)가 특정 궤도에서 만나거나 도킹하는 상황을 부르는 말’이라고 했다. 정확한 뜻을 알고 보니 더욱 ‘우주적 랑데부’란 표현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난 인연들. 곁을 지나쳤거나 머물렀거나, 이미 떠나간 사람들과의 랑데부를 손끝으로 하나씩 더듬어 보드랍게 어루어 본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과 사람의 조우는, 우주적 랑데부가 아닐 수 없다. 우정이랄지 인연이랄지 하는 단어에 비해 한층 정교하고 동시에 아득하며 작은 범주로 특정하게 되는 내밀한 감상을 비밀스럽게 마음에 품어본다. 특정 궤도 안에서 극적으로 이루어진 우주적 만남이라니.
아름다운 랑데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채이거나 상실이기도 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레 카뮈의 글이 떠오른다.
늙을수록 나는 우리가 오직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사람들과, 품을 만큼 가볍고, 느낄 만큼 강한 애정을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해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의 삶은 너무 혹독하고 씁쓸하고 소모적이어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오는 새로운 구속들까지 감내하기가 어렵습니다. 결국, 우리는 말 그대로 슬퍼서 죽을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야 하고, 기쁨을 정당화하는 말을, 격정을, 성찰을 찾아야 합니다. -알베르 카뮈-
카뮈의 편지글을 옮겨 적은 메모지는, 복직 후 두어 차례 자리를 옮길 동안 내내 나와 함께했다. 그 글은 이따금 나를 불러 세워놓고는 안도할 틈과, 숨을 틈을 내어주었다. 시간이 멈추었다 흐르기를 반복하며 쌓이는 동안, 카뮈의 글은 *내 안에서 자생했다. 사람이 힘들고, 사람과 사람 사이가 힘든 시절에도, 그 시간이 한 덩어리 져 물컹하고 지나가도록.
[시간은 수평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라기보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문지애 님의 소설 속 고백의 글이 생각난다. 당시에는 그게 어떤 느낌일까 어렴풋한 짐작만이 떠올랐다가, 그대로 허공에서 물방울처럼 터져 사라졌다. 그때의 나는 그런 식으로 인생의 단면을 수집하려 애쓰며 그저 지나기 바빴다. 표면장력의 불안정성 때문에 톡 터져버리고 마는 비눗방울처럼, 어렴풋하게 그린 짧은 사유의 깨어짐 같은 것들을 수집했다.
시간에 대한 지애님의 문장을 다시 만난 지금은, 켜켜이 쌓인 시간의 밀도와 그 심연의 깊이와 그 사이 어딘가에 둥둥 부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육체 같은 걸 생각해 보게 된다. 시간의 가늠할 수 없는 깊이 안에서 유영하며. 특정되지 않는 블랙홀의 궤도 안에서도 우주적 랑데부를 꿈꾸며 손을 뻗는다. 우리는 모두, 겁도 없이 모험을 나서는가 보다. 이따금 허공에 쓰는 편지로, 우주적 랑데부를 꿈꾸며.
*헤르타 뮐러 <숨그네> 문장 인용
그 말이 나와 동행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중략)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