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단상 09. 계절
봄비가 거친 촉촉한 대기에 햇살이 녹아든다.
겨울이 물러난 자리에 한 발자국씩 스며드는 기척마다 봄이 묻어난다.
허공에 떠 있는 시소처럼, 낮과 밤이 균형점을 이루는 절기, 춘분. 세상은 느긋하게 다음 계절로 탈바꿈하고 있다.
봄의 시작은 화려하지도, 노련하지도, 눈부시지도 않다.
빈 가지 사이로 찬 바람이 스며들고, 비에 적신 대지는 여전히 차갑다. 봄은 이미 와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움츠린 채다.
봄은 언제부터일까?
산수유와 매화는 기다렸다가, 선두에서 꽃망울을 터뜨린다.
고운 색으로 수줍게 세상을 열고, 가장 큰 기지개로 조용히 진동한다.
벚꽃은 뒤늦게 바통을 이어받는 선수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뒤덮을 때쯤, 사람들은 비로소 봄을 바라본다.
밤하늘 별처럼 벚꽃 잎이 휘날릴 때, 꽃놀이 발걸음이 분주해진다.
그러니 봄이다.
마중해야 옳은 봄이다.
꽃이 완연하고, 잔디가 파릇해지면 이미 여름의 시작이다.
그 훨씬 이전부터, 길게 목을 빼고 바라야 보이는 것이 봄이다.
초봄, 그 ‘비로소’가 말해주는 때다. 그러니 지금을 가만히 걷고 싶다. 아직 노란빛 잔디를 지나, 빈 가지 사이로 숨은 봄의 숨결을 맞으러.
봄은 어느 순간, 지상의 무엇보다 아름답게 치장하며 사람들의 마음에도 꽃을 피운다. 그렇게 마중한 봄은 선선히 머물다, 어느 순간 아쉬움을 남기고 홀연 사라진다.
무언가를 고대하는 마음은 매화를 닮았다.
고백하건대, 나는 계절의 변주를 느끼며 기다린다. 길고 지루하지만 화려하고 또렷한, 습기를 머금은 공기 속 요란한 비의 계절, 여름을.
여름이 오면, 나는 매일 한 장씩의 계절을 기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