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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롱 Sep 21. 2021

몸을 사리던 임산부의 절체절명

해외 살이가 시작되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Yes'라고 했다.   


남편에게 해외에서 직장생활을 해 볼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본 스페인이지만 결혼할 때부터 신랑도 나도 해외에 살아보는 로망이 있었기에 주저함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나 지금 고위험 임산부. 쌍둥이 임신 중이 아닌가. 임신 중 이사도 꽤나 큰 과업인데, 해외 이사라니. 다행히 수도인 마드리드라 직항이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행 편 조차 13시간 걸려 가는 유럽 중에서도 아주 먼 유럽. 신랑이 물었을 때 잽싸게 따라가겠다고는 했지만, 가슴속으로 커다란 돌덩이가 굴러들어 온 양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역시 마음이 편하려면 걱정이 없어야 하는데 이건 걱정을 스스로 만든 셈이나 다름없었다. 쌍둥이 출산은 거기서 해야 하나? 병원은 어떻게 하지? 산후 조리원이 없다고 하던데, 나 혼자 아이 둘을 어떻게 돌볼 수 있을까? 말은 통하려나.

 

난임 병원은 보통 임신 후 12주 차 정도에 졸업한다. 그때쯤이면 아기 심장이 힘차게 뛰는 것도 이미 확인하고 태아가 귀여운 젤리 곰처럼 꼬물꼬물 움직이는 모양을 초음파로 확인할 수 있기에 적어도 계류 유산 확률은 현저히 낮아진다. 그래서 임신 3개월이 지나면 일반 산부인과로 전원을 하고 임산부 정기 검진을 다니게 된다. 그 시기는 점차 다가오는 데 나는 임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옮기는 것이 불안했다. 익숙한 선생님 품을 떠나는 것보다 유산 방지를 위해 맞던 주사를 끊는 것이 큰 부담이 되었다.  


불안함은 늘 나를 정보의 바다로 입수시킨다. 주섬주섬 폰을 꺼내 들고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스페인에도 한인 커뮤니티의 맘 카페가 있었다. 얼른 가입해서 출산 후기를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회원 등급이 되지 않는다. 부지런히 글을 여러 개 올려야 읽을 수 있다니, 하루에 포스팅 한 개씩 기필코 올려서 얼른 스페인 출산 후기 게시글을 보고 말 테다. 갑자기 새로운 숙제가 생긴 느낌이다. 각자의 이유는 다르지만, 의외로 해외에서 아이를 낳는 사람은 많았다. 인터넷에서 보던 근사한 조리원과 임금님 수라상 같은 식사는 없지만, 상상했던 것만큼 끔찍해 보이진 않았다. 다만 산후조리는 스스로 해야 하거나 가족들이 와서 도와주는 분위기였다. 해외 이주든지 병원을 옮기는 일이든지 마음속으로 끙끙 앓고 인터넷을 찾아보는 것보다 다른 전문가나 담당 의사에게 소견을 물어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터넷 구석구석 나와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확인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건 왜 인지? 점점 검색의 달인이 되어간다.


기다려 왔던 병원 가는 날. 오늘도 질문을 한 보따리 싸들고 집을 나섰다.


"선생님, 저.... 스페인에 가게 될 것 같아요. 해외에서도 아기 낳는데 무리는 없을까요?"

"그쪽에서 근무한 경험은 없지만, 스페인에 유럽 최대의 난임 센터가 있기도 하고 시험관 시술을 많이 하는 나라라고 들었어요. 의료 수준도 좋다고 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지 않을까요?" 


"선생님, 언제 비행기 타는 게 가장 안전할까요?"

"20주 정도가 가장 안정기 일 것 같아요. 그동안의 진료 기록은 모두 영문으로 서류 준비해드릴게요."

 

"선생님, 저 프로게스테론(자궁 내막을 두껍게 해주는 주사) 끊고, 크녹산(혈액을 묽게 해주는 주사) 그만 맞아도 될까요? 정말요?"

"괜찮아요. 이제 지금 시기라면 시험관으로 임신한 것이나 자연 임신한 것이나 똑같이 진료받으시면 될 것 같아요. 이제 모든 수치가 안정적이에요" 


역시 선생님 말씀을 듣다 보면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진다. 감정적으로 공감해주시기보다 정말 필요한 얘기만 딱딱해주시는 분이라 더욱 신뢰가 가는 스타일. 스페인 이주 소식을 듣고 선생님은 초음파 사진을 곁들인 예쁜 카드를 하나 써주셨다. 먼 타국에서도 순산을 기원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카드를 받으니 떠나는 것이 실감 나서 눈물이 찔끔 났다. 


국제 이사라는 큰 이벤트 덕에 결국 나는 12주 이후에도 스페인에 가기 전까지는 같은 병원에 계속 다니기로 했고 20주에 난임 병원 늦깎이 졸업생이 되었다. 임신 초기부터 계속 힘이 되어주신 선생님께 궁금한 점을 여쭤볼 수 있어 좋았다. 아이가 생긴 병원이라 더 특별하게 느껴졌고, 늘 가던 곳이라 익숙해서 마음이 편안했다. 내가 다니던 병원은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규 기관이었는데, 병원의 규모나 명성보다 사람에게 캐미라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을 그곳에서 느낄 정도로 감사하게 잘 맞는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유럽행을 택한 건 단지 거주 지역 선택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보고 들은 바에 의하면  유럽은 한국보다는 조금 더 가족끼리 보내는 시간이 많은 편이고, 그러면 적어도 아기들이 어릴 때 만이라도 아빠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일 저녁밥 한 끼 쉽사리 먹을 수 없었던 맞벌이 부부에게 새로운 변화임에 틀림없었다. 우리는 "함께하는 저녁 시간"을 되찾으러 유럽으로 가는 것이다. 한국에서 아이 둘을 낳고, 산후조리 후 이주하는 옵션도 생각해봤지만, 혼자 갓난아기 둘을 데리고 하는 긴 비행에는 영 자신이 없기도 하고, 24개월 미만의 아기는 성인 1명당 1명만 동행할 수 있어서 그것도 포기했다. 임신뿐 아니라 출산 또한 가족이 함께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해외 출산을 결심했다. 무엇보다 아이는 남편 곁에서 낳고 싶었다.


컨테이너 이사는 생각보다 부담스러워서 큰 짐을 모두 처분했다. 양가 부모님들 댁에 결혼사진 액자와 귀중품을 맡기고 단출히 6개의 캐리어만 남겼다. 장성한 아들 딸이 타국으로 이사한다는 소식에 부모님 얼굴은 아쉬움이 가득해지셨다. 말로는 “그게 나을 거야. 너희가 결정한 대로 해야지” 하시면서도 “아기들 어릴 때 멀어서 못 도와줘서 어쩌니.” 하며 걱정하셨다.  


출국 전 시부모님과의 마지막 식사는 자주 가던 평가옥에서였다. 누구보다 임신 소식에 기뻐하시던 시부모님, 쌍둥이라는 소식에 남매 둥이면 좋겠다고 하셨었는데, 내 능력 밖의 일이지만 예기치 않게 그 소원을 들어드릴 수 있어서 너무나 기뻤던 기억. 임산부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시겠다며 단골집으로 불러주셨다. 평소엔 만두전골을 먹거나 온반과 냉면에 녹두지짐을 함께 시켜 나눠 먹곤 했는데, 그날만큼은 특별식으로 커다란 어복쟁반을 시켜먹었다. 평소 무뚝뚝하신 시아버님이 제일 큰 육전도, 두툼한 버섯도 집어 연신 신랑 그릇에 덜어주시는 것을 보니 표현은 안 하셔도 아쉬운 마음이 절로 느껴졌다.  


“많이 먹어라. 얘들아. 잘 먹어야지 힘이 나지. ”

“아들아, 가서도 건강하게 잘 지내거라. ” 


결혼하고 아버님이 신랑을 아들이라고 부르신 모습을 처음 봤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아들이라는 호칭이 아니었다. 아버님이 하실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부름. '아들아'라는 말이 '사랑하는 우리 아들'로 들려서 괜히 나까지 뭉클해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만두를 떠먹었다. 이제 그 아들이 또 두 아기의 아버지가 된다니 그동안 짊어지셨던 가장의 책임감과 아버지의 무게를 느낄 시간이 온 것에 자랑스럽지만 한편 안쓰럽게 느끼신 건 아닐까.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임신 5개월, 아이 둘을 뱃속에 소중히 품은 채 신랑과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네 가족이 무사히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임신 확인 후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할 정도로 정적이고 조심스러운 일상을 보냈기에 이 순간이야말로 위기의 시간이었다. "침대 밖은 위험해. 집 밖은 위험해" 하며 몸을 사리던 내가 비행기를 타고 스페인에 오다니. 앞으로 마드리드에서는 어떤 생활을 할 수 있을까? 무사히 임신 중 하반기를 거치고 아기들을 만날 수 있길 기도했다. 용기를 끌어모아 과감한 결정을 한 만큼 무적함대의 나라 스페인에서 천하무적 엄마가 되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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