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했다고 끝난 것은 아니니까
설렘보다는 피가 마르는 것 같은 시간. 시험관으로 아이를 갖게 되면 피검사로 호르몬 수치를 측정하면서 모니터링을 하기에 임신 여부를 더 빨리 알 수 있다. 시험관 시술 10일 뒤 첫 피검사 때 수치, 그리고 두 번째. 한 단계 한 단계를 통과하면서 임신에 가까워짐에도 마음 편하게 기뻐할 수 없는 하루하루. 왜 시간이 가지 않을까 하며 애써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곤 했다.
신랑에겐 큰 기대 말라고 했지만, 1차 피검사에 이어 2차까지 통과한 순간 내 마음은 이미 임산부였다. 안심할 수는 없었다. 우선 또 기다렸다. 아기집도 봐야 하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도 듣고 뱃속 아기가 젤리 곰처럼 귀여워지는 순간까지 확인하고 임밍아웃 (임신을 밝히는 것을 그렇게 말한다) 하려고 했다. 임신의 기쁨을 만끽하는 순간을 미루려 하면서도 머릿속은 파스텔색 상상 아기용품으로 가득 찬다. 손바닥에 두 켤레를 올려둘 수 있는 앙증맞은 신발, 요정이 쓸 것 같은 보넷 모자와 아기 동물들이 귀엽게 그려진 턱 밭이 같은 것 말이다. 제발 건강하게 아기가 생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아기집을 보러 가는 날 이전의 악몽이 떠올랐다. 3년 전 텅 비어있는 아기집을 보았고 수술로 내 몸 안에 생긴 집을 없애야만 했으니 상당히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다. 덤덤하려고 해도 자꾸 떨렸다. 심장아 나대지 마! 긴장도 잠시, 담당 선생님이 초음파를 봐주셨다. 모니터를 보신 선생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 순간.
"축하합니다. 쌍둥이 임신이에요. "
"아..............!!!!! 네. 선생님 으허허헝 엉엉엉엉. 감사합니다. 엉엉."
"나가서 임신 확인서도 받아가시고요. "
임신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진료실은 핑크 빛으로 물들었다. 나대던 심장은 격렬하게 반응해서 더 터질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손은 배로 갔다. 우리 아기들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신선 이식하기 싫어서 도망가려고 했던 순간 잡아주신 선생님. 이식을 해보라고 몇 번이고 권유해주신 선생님께 연신 고개를 숙이고 감사하다고 했다.
아기집이 두 개 있었고 그 안에 반짝이는 난황도 있었다. 두 배아는 결국 두 태아가 되었다. 담당 선생님은 기념이라며 흑백의 초음파 사진도 출력해주셨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임신 확인서, 핑크색 수첩을 받게 되었다. 난임 병원의 불문율대로 방을 나서기 직전, 기쁜 기색을 꾹꾹 눌러 담고 기다란 초음파 사진을 돌돌 말아 조심스레 가방에 넣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진료 대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어려울 수 있기에, 좋은 기분이어도 내색하지 않으려는 습관이 생겼다.
임신이 기쁜 나머지 잠시 잊고 있었다. 그래. 지금까지 상상도 못 한 삶이 시작되는 거다. 바로 쌍둥이 부모가 된다는 것.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이제 가만히 누워서 지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지? 쌍둥이 육아에 대해 무지 하진 않았다. 자연 임신이든, 의술의 힘을 빌렸든 우리 가족은 쌍둥이와 인연이 깊다. 오빠네는 아들 쌍둥이, 사촌 오빠네는 남매 둥이, 사촌언니네는 무려 허니문 베이비인 딸 쌍둥이. 신랑은 사촌이 둘이나 쌍둥이 누나들, 동생들. 아예 몰랐다면 몰랐겠지만, 임신 유지와 출산 그리고 육아의 어려움까지 쭈욱 이어질 터. 하지만 멀리 바라보고 계획하고 준비할 여유는 전혀 없었다. 무사히 출산하는 것을 우선 목표로 삼았다.
쌍둥이 임신 후에 가장 큰 걱정은 조산이었다. 새 언니도 아기들을 지키려고 입원해서 수축 방지 링거를 맞아가며 아주아주 고생하고 출산했다. 임신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한 것은 휴직이었다. 당시 부서 일도 만족스러웠고, 상사도 동료도 다들 좋았고 잠시 떠나면 이런 시간이 또 주어질까 싶기도 했다. 그 모든 상념을 뒤로하고 휴직을 택했다. 회사도 커리어도 그 당시에는 모두 욕심에 불과했다. 이번에도 유산을 할 수는 없으니까. '가장 중요한 건 생명이다'라는 우선순위를 가슴에 여러 번 새겼다. 임신 확인서를 받자마자 진단서까지 곧장 떼고 회사를 쉬게 되었다. 매일 아침 타던 버스는커녕, 웬만한 일 아니면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쌍둥이 임신은 고위험 산모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신 자체도 중요하지만 건강한 출산이 목표이기에 얼음장에 발을 내딛듯 조심스러운 일상을 보내기로 했다. 쌍둥이 맘 카페에 가입했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했는지부터 확인했다. 입덧부터가 아주 고욕이다. 두 아이를 품은 만큼 임신 호르몬은 일상을 압도할 만큼 나왔고, 입덧도 아주 심해서 먹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킹사이즈 침대의 벽 쪽에서 혼자 잤고, 신랑은 요를 깔고 바닥에서 잤다. 인공 수정 이후였나? 이전에 딱 한번, 악몽을 꾸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적이 있기 때문에 최대한 넓은 공간을 주고 싶다는 신랑의 배려였다. 미끌미끌한 욕조에서 넘어질까 봐 욕조안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샤워만 했다.
마음 편히 외출 한번 하기가 힘들었다. 혹시 누군가 만날 일이 생기면, 지인들은 기꺼이 아파트 앞 카페로 와주곤 했다. 큰 도로도 건넌 적이 없을 정도로 조심했다. 병원에 갈 때도 도로가 가장 한산한 시간을 택했고, 신랑은 과속 방지턱을 넘는 순간까지도 살살 운전했다. 초보 운전이라고 오해를 받는 일도 분명 있었을 것 같다.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누워 있었다.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다행히도 임신 기간의 외로움은 비참함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부러워하던 임산부가 되었고, 아이들을 만날 기대감에 마음이 몽글몽글 부풀어 올랐다. 뱃속에 손을 올리면 아이들이 톡, 톡, 하이파이브를 해주어 뭉클했다. 나와 아이들의 세 개 심장은 늘 한 공간에서 살아있었고 나의 기분을 같이 느끼고 공감하는 듯했다. 몸이 무겁고 힘들지 언정 출산 예정일까지 최대 40주라는 정해진 시간이 있으니 더욱 감당할 만하다고 느꼈다. 난임에서 임신까지 보다 임신해서 출산까지가 확실히 마음이 더 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