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우울한 겨울을 밝혀준 한 줄기의 빛
아일랜드에서의 대학 생활은 우울했다. 그땐 스마트폰 시절도 아니어서 한국과 아일랜드의 거리가 더 멀게만 느껴졌다. 유행하던 070 인터넷 전화를 사 가서 집에 전화하거나,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긴 했지만 날씨도 우중충 한 데다 시내라곤 큰길 하나뿐인 작은 도시에 살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말이 영어가 아닌 것만 같았다. 나는 분명 영어를 썼고, 그들은 잘 알아듣는 듯했으나 나는 도무지 그들과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조용하고 수줍은 아일랜드 사람들은 그래도 친절했다. 그들도 펍에서 기네스를 한잔 마시면 세상 가장 수다스러운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는 데, 학교는 그 능력을 발휘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아! 물론 학교에도 College bar라는 곳이 존재하고 그곳은 다른 바이브가 느껴졌지만, 친구를 사귀기 전 멀뚱멀뚱 서 있는 시간이 두려워 자주 가진 못했다.) 조용히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과연 나는 이곳에서의 3년을 견딜 수 있을까. 무사히 대학을 마치는 것보다 오늘의 내가 내일도 무사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당장의 걱정이 앞섰다.
한편 우리 집 집주인 아주머니는 긍정적이셨다. 4자녀를 다 키우고 출가시킨 60대 초반의 아주머니. 40대에 이미 집주인 아저씨와 사별하셔서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을 법도 한데, 늘 우아하고 밝고 낙천적인 금발의 귀여운 롤다 아줌마. 식탁에서 밥 먹다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땐 어김없이 나타나서 한마디 해주는 아줌마. 문장 하나에 Lovely와 Gorgeous를 남발하는 아줌마의 스타일은 아줌마뿐 아니라 아이리쉬 스타일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저 넓은 정원에 빛줄기 조금 들어오는데 무엇이 그리 Lovely weather인지. 옆방에 사는 언니가 줘도 안 입을 만한 희한한 옷을 입었는데 Gorgeous라고 하시는 것이 익숙해지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일랜드의 겨울은 길고 해는 짧으며 공짜인 해를 마음껏 즐길 축복을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런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긍정적인 마인드와 소소한 빛줄기에도 행복해하는 여유를 가졌다. 어느 순간 나도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고 말하는 대로 느끼기 시작했다.
첫겨울은 그래도 정말 추웠다. 단창에 코끝이 빨개지고 방에서도 입김이 나오는 한 겨울날 나는 엄마에게 한 선물을 받았다. 그건 바로 독일로의 여행. 아일랜드나 독일이나 춥고 해가 짧은 겨울이란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곳엔 내 가족이 있었다. 사촌오빠가 마침 독일에 주재원으로 있었고, 나는 오랜만에 사촌 오빠와 새언니 그리고 귀여운 두 아이들을 볼 생각에 신났다. 독일이라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곳 게다가 겨울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나는 프랑크푸르트로 주말여행을 가게 되었다. 라이언 에어라는 게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저가 항공이 있어 유럽 내의 이동은 그리 비싸지 않았고 오랜만에 한국 사람들을, 그것도 나의 가족을 만나 한국어로 수다 떨 생각 하니 정말 정말 즐거웠다.
오랜만에 만난 사촌 오빠와 새 언니는 신혼부부 때 봤던 모습과 거의 비슷했다. 언니는 그동안 요리 내공이 많이 쌓였는지 한 상 가득 맛있는 밥을 차려주었다. 따뜻한 밥에 김치라니! 그것도 집에서 직접 만든 김치라니. 내가 꿈꾸는 따뜻한 가정의 전형은 따뜻한 밥과 직결되었었나 보다. 게다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기들이라니 뭘 해도 귀여운 아기들. 심지어 사촌오빠는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스러운 맛이 없다며 근교인 로텐버그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말로만 듣던 크리스마스 마켓을 그곳에서 처음 봤다.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트리 오나먼트와 오르골과 병정들까지 아직은 아니었지만 크리스마스의 기분을 내기에 충분했다. 뭘 하나 사도 속으로 얼마인지 100번을 계산해보고 사던 시절에 유명한 거라 먹어봐야 한다며 관광지의 비싼 디저트를 척척 사주는 사촌 오빠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그때 먹은 슈니발렌의 달콤한 맛을 평생 기억에서 지울 수 없다. 게다가 새언니는? 애플파이를 구워 싸주기까지 했다. 해치백 자동차의 트렁크를 열고 사촌 조카와 나란히 앉아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새 언니는 잘 먹고 지내야 하는데 혼자 지내면서 괜찮냐며 매 끼니 먹고 싶은 게 없는지 물었다. 언니가 하는 반찬 하나하나 다 맛있고. 심지어 밥까지 내가 한 것과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본인의 동생 챙기듯 살뜰히 챙겨주는 언니. 내가 떠나는 전날. 나는 깜짝 놀랐다. 언니가 무려 김치를 담아주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김치다 김치!! 손바닥만 한 작은 통에 5유로 하던 그 김치를 대량으로 말이다. 김치만 있어도 밥 먹는 게 훨씬 쉬워질 거라며 그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언니의 모습에 아일랜드에서 이미 얼은 내 마음이 녹았다. 세상에 따뜻하게 보였달까 나. 이건 금으로 만든 김치나 다름없다며 수하물 추가를 하고 김치 한 박스를 가져왔다.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사촌 오빠도 50유로짜리 두장을 쥐어주며 절대 굶지 말고 씩씩하게 잘 지내라고 했다. 언제쯤 은혜를 갚을 수 있으려나. 이미 대학생인 우리 사촌 조카가 얼른 스페인에 놀러 오길 바랄 뿐.
그렇게 행복하게 아일랜드로 돌아왔다. 밥 걱정도 안됐다. 나에겐 새 언니의 김치가 있었다. 그러나 그 행복이 오래 가진 않았다. 김치 통이 사라졌다! 그랬다. 나는 전형적인 아이리쉬 아줌마와 살고 아줌마의 냉장고 한 칸을 빌려 쓰는 처지였기 때문. 아줌마에게 김치향이 상당히 강했나 보다. 버터가 갈릭 버터가 되었다며 냉장고에 상한 음식이 있었고 아줌마가 기꺼이 청소를 해주었다고 한다. 아아... 아줌마!!!!!!!!!!!! 이것 참 화를 낼 수도 없고. 진작에 저 넓은 뒤뜰에 땅을 파고 묻어두고 매끼 꺼내 먹어야 하는데.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김치 때문에 울었다. 그 김치는 나에게 김치 이상의 무엇이었다.
#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