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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럽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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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롱 Jan 11. 2021

지난밤의 노동은 즐거웠다

마드리드 대폭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마드리드에 흰 눈이 내렸다. 얼어 죽어도 코트를 입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이 곳은 정말 한겨울에도 코트를 여유 있게 입을 수 있는 곳이다. 털모자나 장갑 낀 사람을 볼지언정 롱 패딩을 입은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고, 겨울에도 알록달록한 스타일을 유지한다. 그런데 금요일은 달랐다. 마치 이곳이 스페인이 아니라 스웨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추웠다.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눈에 왜 눈은 "펑펑 내려온다"라고 표현하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늘 해가 지고 퇴근하는 신랑이 6시쯤 집에 도착했다.


"오 ~~~ 어떻게 빨리 왔어?"

"오늘 눈이 많이 와서 길이 얼 것 같다고 모두 지금 퇴근했어."


늘 늦는 신랑이 일찍 온 것을 보니 이 또한 기상 이변에 버금간다. 예삿일이 아닌가 보다 생각했지만 정말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하려나 보다. 점점 도로가 보이질 않는다. 세상이 하얗게 변해간다. 집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평화롭기 그지없다. 얼른 나가서 아이들에게 눈을 보여 주고 싶다. 인생의 첫눈이라니! 놓칠 수 없는 날 아닌가. 소복하게 쌓인 눈에 발자국을 내는 것, 얼마나 차갑고 보드라운지 만져보는 것, 동글동글 뭉쳐 눈사람을 만드는 것.


쌍둥이를 최대한 따뜻하게 입히고, 장갑은 없지만 대신 갓난아기 때 신던 수면 양말을 챙겨서 나갔다. 아이들은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뛴다. 수면 양말로 손을 보호하고 눈에 손자국을 내본다. 눈 쿠션에 털썩 주저앉아 깔깔 거리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 짓게 되더라. 오랜 시간 집에서 잘 견딘 아이들에게 내려주시는 하늘의 선물인가. 추운 날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놀고 싶어 했다. 코끝이 루돌프처럼 빨갛게 되어갈 무렵에 집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첫 핫초코를 맛보았다. (초콜릿 우유 20% 정도밖에 섞어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름은 핫 초코라고 하자) 달콤한 세계를 경험하고 아이들은 충격받은 듯 컵을 바라보았다. 빈 컵을 만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눈이 좋은 소식만은 아니었나 보다. 대폭설이라고 불리는 만큼 현실의 어려움도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사고가 났고 대중교통은 운항 중지되었다. 육아에 도움 주시는 이모님도 퇴근을 못하게 되어 울상이 되셨다. 바깥이 너무 위험한 데다 갈 방법이 사라져 버려 어쩔 수가 없었다. 보통 다음 날이면 받을 수 있는 슈퍼 배달도 일주일 후부터 가능하도록 조정되어 있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일주일을 버텨야 한다. 다행히 아이들의 우유는 충분히 있고, 팬트리에 코로나라고 쟁여둔 라면이 큰 도움이다. 혹시나 수도관이 얼어버릴까 싶어 욕조에 물을 받아두었다. 샤워는 하루 이틀 미룰지라도 화장실 물은 내려야 하니까. 눈은 그렇게 삼일 연속으로 내렸다. 무릎까지 쌓인 눈이 그대로 얼어버릴까 봐, 차고 문은 열리지 않는 채로 그대로 있을까 마음이 쓰였다.


어젯밤에 초인종이 울렸다. 손님이 있을 리 없고 우리를 찾을 사람이라고는 아마존 배달 정도뿐일 텐데 이상했다. 옆 라인에 사는 이웃 학생이었다.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든다. 내려와서 눈 치우기를 같이 하잔다. 아파트 주민회 대표님이 각 집에서 한 명이라도 나왔으면 한다고 했다. 이상하게 평소 듣기는 안되면서 이런 건 척척 알아듣는 신기한 듣기 실력을 가졌다. 갑작스러운 동원 소식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마침 도와주시는 분도 집에 계시니 주민의 책임을 다해 보기로 한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무장하고 쓰레받기를 들고 내려갔다.


이미 몇은 스키복을 입고 내려와서 눈 치우기에 한창이다. 단지의 눈을 모두 치우자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내기로 했다. 40년 만의 대 폭설이니 이런 일은 모두가 처음이란다. 모두가 일사 분란하게 움직인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각자 할 일을 찾아 한다. 앞집 아저씨는 큰 샆을 가지고 와서 길을 내주었고 나는 그 뒤로 남은 눈을 깨끗하게 없앴다. 반가운 프랑스 언니네도 와서 합류했다. 한 길을 내고 나니 다른 이웃이 바통을 이어받아 옆 라인의 통로를 만들었다. 일사천리로 만든 길을 보니 일손을 조금 거든 나도 뿌듯해졌다.     


지난밤의 노동은 꽤나 즐거웠다. 쌓인 눈을 치우는 일은 고단한 일임에 분명하지만 모두가 맡은 임무에 열심인 모습이 좋았다. 완벽한 선을 자랑하진 않아도 울퉁불퉁 앙증맞은 수제 쿠키처럼 그렇게 귀여운 길이 완성되었다. 결과가 눈에 보이는 일인 만큼 보람도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아파트 단톡 방은 눈이 깨끗하게 치워진 사진을 주고받으며 서로 칭찬에 열을 올렸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런 거 말이다.


"우리 주민들이 정말 최고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과 함께 살아 너무 기뻐요. 다들 고맙습니다!"


누가 스페인 사람들이 게으르다고 했던가 이렇게 빠릿빠릿한 사람들이, 그것도 일을 스스로 찾아 하는 이 사람들이 서운해할 것이 분명하다. 각자의 최선을 통해 서로에게 동기 부여를 하는 일. 해야 하는 것이 거침없이 진행될 때 느끼는 팀 워크. 업무 자체도 중요하지만 이런 호흡이 있을 때 일이 더욱 재밌어진다. 나에게도 환상의 팀이 있었는데 하며 회사 생각이 났다. 오늘은 일터가 조금 그리워졌다.  


  

구불구불한 길이지만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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