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유럽살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롱 Feb 25. 2021

익숙하면서 새로운 이걸 먹어봤다.

스페인식 프렌치토스트: 또리하(Torrija)

소소하면서 확실한 행복을 줄여 소확행이라고 부른다. 모두가 스트레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요즘 용암처럼 훅 올라오는 화를 살살 달래는 것도 어려운 일 같은데. 스스로에게 어떤 '소확행'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주 단순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맛있는 걸 먹으면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취미. 익숙하게 맛있는 것을 먹는 것도 특기. 그런데 강적을 만났다. 분명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요리지만 머리를 찌릿찌릿 강타할 정도로 무서운 '아는 맛'.


한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스페인이지만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그런 요리를 만났다. 이름은 또리하 (Torrija), 스페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좋아한다는 대중적인 디저트다. 이름이 생소하지만 비슷한 다른 이름을 댄다면 누구든 아~ 그거라고 고개를 끄덕이실 것 같다. 바로 프렌치토스트. 식빵에 우유와 계란 물을 입혀 약한 불에 보들보들하게 구워낸 그것. 세끼 식사 중에서도 아침 식사를 제일 좋아하고 이 메뉴라면 미국식, 프랑스식, 싱가포르식, 홍콩식, 엄마식까지 모두 좋아하는지라 설명을 듣고 나니 가장 먹어보고 싶었던 메뉴가 되었다. 스페인에 왔는데 스페인식 프렌치토스트라니 꼭 먹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또리하를 만난 것은 어느 여름 엘시에고라는 작은 마을에 위치한 한 호텔의 레스토랑이었다. 스페인은 보통 긴 여름휴가를 가는지라 호캉스라는 개념이 잘 없다. 바닷가에 위치한 서머 하우스(Summer house)를 빌려 몇 주간 여유롭게 바캉스를 즐기는 게 일반적이고 도시의 바쁜 삶에서 벗어나, 해변가의 현지인으로 살며 자연에서 휴식을 취하는 느낌으로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는 스페인에 있지만, 그렇게 긴 휴가가 익숙하지 않고 짧지만 여러 서비스와 호사를 누릴 수 있는 호텔에서의 이틀을 선택했다. 아기들을 데리고 갈 수 있고, 두 아기가 한방에서 같이 잘 수 있는 곳을 찾다가 발견한 보석 같은 공간이었다. 가격은 결코 저렴하지 않았지만,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으로도 선정된 곳이라니 이참에 꼭 가보고 싶었다.


스페인에서 식당을 가면 보통 디저트 메뉴에서 이 음식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외식을 하면 디저트 먹을 시간까지 여유가 잘 나질 않아 전식도 본식도 가능하면 한꺼번에 달라고 하기에 식당에서 후식까지 먹어본 적은 없다. 늘 시간이 넘치는 스페인 사람들 곁에서 조급해 보이는 내가 초라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외식이라는 가끔의 사치를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여행으로 왔고, 꿈에 그리던 호텔에 온 만큼 조금은 차분하고 넉넉하게 시간을 대할 것을 다짐했다. 그래서 또리하를 꼭 먹어보리라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여행 철이 아니라 그런지 명성이 자자한 이 식당에 손님은 우리뿐이다. 사람 없는 날인 만큼 오늘은 절호의 찬스라는 신호.


그렇게 마주한 또리하. 아! 맛있어! 이런 맛이구나. 이 곳의 또리하는 따뜻한 우유에 적신 빵 느낌이다. 프렌치토스트보다 브레드 푸딩에 더 가까운 질감이랄까. 설탕을 넉넉히 올려 토치로 그을린듯한 표면은 마치 크렘 뷜레가 연상된다. 다만 3배 정도 두꺼워서 감질나지 않고 넉넉한 인심이 느껴진다. 단단한 크러스트가 마치 달고나 같다. 바삭하지만 딱딱하지 않아 대체 이건 어떻게 만드는 건지 절로 궁금해졌다. 위로는 차가운 캐러멜 아이스크림이 아래로는 용기가 아직 따듯해서 온기가 남은 디저트를 즐길 수 있었다. 차갑고, 뜨겁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바삭하고, 달콤하고.. 오감이 만족스럽고 여운이 남는 맛이었다. 우리 집 둥이가 조금 더 커서 한입 먹어본다면 금세 다 빼앗길 맛이었다. 나눠 먹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것만큼은 인당 하나씩 시켜 각자 먹자고 해야 할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보았다.   


레스토랑에서의 디저트라니. 일 년의 기억 중 손꼽히게 행복했던 저녁이었다. 평소에는 가지 못하는 식당에서의 이 구성의 또리하가 스페인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모양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레스토랑에서 한 메뉴로 파는 음식인 만큼 조금 더 꾸밈새가 그럴듯할 것이고 아이스크림까지 추가되었으리라. 그러나 이렇게 맛있는 후식이라니 다른 곳에서도 꼭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오히려 전식이나 본식, 다른 음식보다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스페인 가정식의 또리하는 어떨까. 길 건너 하나 있는 동네 바에서도 또리하를 팔까. 자유롭게 식당에 방문할 수 있는 그날이 오면 나는 꼭 한번 더 사 먹어 봐야지.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스페인에서 또리하의 역사는 매우 길어서 이미 15세기 문서에도 등장한다고 한다. 출산한 여성을 위해 기운을 북돋아줄 음식으로 말이다. 이런 걸 읽으면 상상이 되면서 또 먹고 싶어 진다. 보들보들하고 따뜻하고 달콤한 이 음식이 온몸에 힘이 다 빠져버린 그 시기에 얼마나 힘이 될까. 한편 가난한 사람들의 디저트 (Torrijas Pobres)로도 알려져 있는데 우유와 버터와 크림이 듬뿍 들어간 화려한 프랑스식 디저트 대신한 후식이어서 그렇다고. 그러나 그 별명과 달리 지금은 4월 경 부활절 기간인 세마나 산타가(Semana Santa)이 끝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먹는 그런 국민 디저트. 올해는 그 기간에 근처 베이커리에 들러봐야 겠다.


Spain의 국민 디저트 Torrija @ Restaurante Bistro 1860
레스토랑에서 바라 본 바깥 풍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