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의summer Oct 27. 2020

Killing Me Slowly

내 시간은 금이 아니었다.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을수록, 나이가 들수록, 만나는 사람을 고르기 시작했다. 원체 집순이 이기도 하지만 엄마가 된 이후 코로나까지 겹치면서는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어딘지 모르게 부담스러웠다. 고향에 두고 온 어릴 적 친구라면 수십 년 만에 만나도 소주 한잔 기울이며 어제 만난 듯 대화를 이어 나갔겠지만, 뭔가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로 시작하며 서로의 안부와 근황을 물으며 돌고 돌아 본론으로 들어가야 하는 사이가 귀찮아진 것이다. 나이가 들어 얼굴 근육도 굳기 시작하니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야 하는 상황 자체가 피곤한 것이다. 사실, 내 시간과 노력, 돈을 투자하면서까지 굳이 때 빼고 광내어 만나고 싶을 정도의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겠지.


그렇다, 나는 내 마음과 외모의 때를 빼고 만나야 할 사람들을 멀리한 것이다.


좋게 말하면 그렇게 내가 만든 가족과의 시간만을 즐긴 지 몇 개월째. 일본으로 돌아왔으니 슬슬 만나자는 연락들이 회사 사람들과 지인들로부터 아주 가끔 왔었다. 그럴 때마다 아기를 데리고 레스토랑 같은데 들어가기가 석연치 않고 대화를 이어나가기 어려울지 모르므로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 보자고 정중히 거절했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다지 시간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거지. 그러던 와중에 출산휴가 직전까지 담당했던 프로젝트에 같은 팀 멤버였던 K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너무 나누고 싶다고. 이상하게 그의 제안은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알고 지낸 시간은 고작 1년뿐이고 엄청나게 친한 것도 아닌데 회사 다닐 때부터 이상하게 나는 일본 욕부터 시작해 친한 일본 친구에게도 못할 온갖 말을 하게 되는 선배였다.


"이상해, 그 선배한테 만나자고 연락이 왔을 때는 내가 흔쾌히 수락해버렸어. 공원에서 산책하면서 대화하자고 막대했어. 심지어 남자 선배인데, 나는 이성이 대화하기 더 편한가 봐."


"음, 왠지 알 것 같다. 여자들은 좀 더 자기들끼리 비교하게 되는 것 같아. 상황이 비슷하니까? 만나고 와"


남편의 말에 수긍이 갔다. 모든 이성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애엄마가 되었다고 해서 굳이 같은 처지의 애엄마 친구를 만들 필요도, 만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살이 많이 빠졌네 예뻐졌네' 라거나 '너의 딸은 어느 어린이집을 다니는데 내 딸은 어떻다'거나 '나의 남편은 이만큼 잘해준다'거나(너의 남편은 어떻니) '너는 지금 사는 집을 더 비싸게 팔고 이사 갈 예정인데 나는 집이 없으니 잘 모르겠다 '식의 대화가 나에게는 피로했다. 때로는 그런 차 떼고 포 뗀 관계, 주절주절 필터 없이 막말을 던 질 수 있는, 한마디로 막대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할 뿐이었다. 그게 그 직장선배였다.



'미안, 20-30분 정도 늦어질지도 몰라'

약속 시간에 맞춰 막 나가려던 찰나에 그 선배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아.. 내가 잊고 있었다. 이 익숙한 느낌. 이 선배, 능력도 있고 다 좋은데 치명적으로 하나가 빠져있는 사람이었다. 시간 개념. 이 선배의 가장 놀라운 점은 비즈니스와 프라이빗이 차이가 없다는 점 정도일까. 하고 싶은 일들이 엄청 많고 바빠서 시간을 쪼개 사는 데도 업무에서도 밥먹듯이 늦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싫어하지도 않는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공과 사에 차별을 두지 않아서.


나는 순간 맥이 빠졌다. 이 어려운 시기에, 마음먹고 어렵게 행차하려는 이 몸에게 감히(?) 이런 배신감을 느끼게 하다니.


학창 시절부터 희한하게 친한 친구 중에서도 꼭 그런 친구들이 있다. 전날 밤늦게 자서 늦게 일어났다거나 약속시간만 가까워오면 뭘 잊어먹었다거나 머리손질과 같은 급한 할 일이 생각나서 (혹은 옷매무새를 더 다듬다 보니), 전철을 바로 코앞에서 놓치는 바람에 늦었다는 거였다. 그 밖에도 레퍼토리는 많았지만, 그들은 30대가 지나서도 습관이 같다. 자, 내가 상습적으로 늦는다거나 시간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들을 절대로 이해 못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단 몇 분 더 일찍 준비했으면 해결될 일이라는 것에 있다.

혹자는 그것을 여유라 칭하는 데 여유와 늑장은 전혀 다른 것이다. 여유와 시간에 루즈한 것은 다른 개념이다. 아침을 여유롭게 먹다가 허겁지겁 달려 나오는 게 여유가 아니다. 서두르기 싫어서라도 나는 꼭 15분은 일찍 나선다. 그러고 나서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의 날씨와 공기를 여유롭게 즐기는 편이다. 


업무상으로도 정말 다양한 사람들과 일을 하게 되는데 일단 내 경험상 약속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약 40%의 확률로 일처리도 엉망이거나 1%의 사람들은 허언증마저도 있었다. 아무튼 약속시간을 못지 키건 안 지키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신뢰가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연예인들을 보라, 현재 업계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며 장수하고 있는 사람들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는 이상 십중팔구 현장에 제시간에 나타나거나 일찍 나타나는 사람들이라 장담한다. 



나는 원래부터가 시간에 엄격한 사람이다. 이유는 몰라도 시간 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는 확신 같은 것은 있었다. 누가 물어보면 어릴 때부터 직업군인이셨던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서?라는 이유를 대기는 했지만 사실 나도 구체적으로  시간을 어기면  되는지는 몰랐다. 시간을 지키는 것이 엄청난 성공으로 이어진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기본 중의 기본은 시간을 지키는 것이라는 신념이 꽤나 어릴 때부터 갖고 있었고, 그 기본'은' 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실제로 나는 시간 약속을 엄청 잘 지키거나 최대 1시간 정도는 거뜬히 미리 가있는 타입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시간 약속을 안(≠못) 지키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가슴 말고 머리로도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 중 하나가 시간 약속 안 지키는 사람들이다. 그 어떤 식이요법이나 운동과 같은 몸매 관리보다 아주 쉬운 자기 관리 덕목 중에 하나인데 그걸 못 지키다니. 게으름뱅이 중 게으름뱅이인 나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각설하고 선배와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늦은 주제에 명확하게 시간을 안 밝히는 저 배려 없음이란. 프로지각러들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매너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늦더라도 구체적으로 얼마나 늦을지, 상대방이 어떤 정보가 있으면 편할지 등에 대한 개념도 없다. 그로 인해 몇 번 더 똑같은 대화를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에 더 짜증이 났다.


"정확하게 몇 분 도착 전철인가요? 몇 분에 도착하는지 알려주시면 그 시간에 맞춰 나갈게요"

"전철 타면 연락할게!"


(왜 타야만 도착시간을 아는 거야? 요즘 같은 시대에 지금 거리에서 몇 분 차를 탈 수 있다는 대충 계산이 나오지 않나? 앗,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아직까지 안 탄 거였어?)


-20분 후-


"10분 뒤 도착! (정말 미안해 고멘 스미마셍 어쩌고 저쩌고)"
-13시 10분 도착이란 뜻인가요?
"응!...
앗, 그런 줄 알았는데" (뒷말 없음)

"?”

(나는 에바의 점심 이유식 시간과 기저귀 갈 시간, 그 외 예상치 못한 해프닝에 대한 여유까지 포함하여 오늘 만날 약속의 시간을 정한 건데. 그래, 싱글이 애엄마가 약속시간에 맞춰 나가는 것의 고충을 알겠냐만은 이건 너무하잖아! )


나는 그냥 포기하고 거의 잠든 에바를 데리고 역으로 향했다. 알고 보니 글을 쓰다가 한 정거장을 놓쳐서 이미 50분가량 늦은 상태에서 10분 정도 더 늦는다는 거였다. 선배는 나와 만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메시지로 사과를 했다. 부인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아 면목이 없다고, 애교(?) 섞인 오버까지.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뿐만 아니라 에바 몫까지 포함해서 선배는 두 사람의 시간을 빼앗은 거예요. 총 두 시간이죠"

‘앗...! 미안 미안ㅜㅜ그래도 나 3시부터 미팅 없애서 대화 여유롭게 할 수 있어!’

-괜찮아요, 근데 에바가 3시에는 먹어야 할 시간이라 선배와 저의 대화시간이 줄어든 것뿐이에요

‘헉..... 내 잘못이다ㅜㅜ’

-아이가 있는 입장에서는 그런 것 저런 것 다 계산해서 스케줄을 짠다고요. 비즈니스와 비슷하죠. 아니다, 이쪽이 더 심각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아기들은 전혀 융통성이 없거든요



2500엔 = 내 시간 값(?)


선배는 계속 사죄를 했고 결국 난 계획에도 없던 고급식당에서 비싼 등급의 와규 정식을 얻어먹었다. 사실 막상 얼굴 보고 대화하니 엄청나게 열 받는 것도 아니어서 나는 좀 더 쏘아줄까 하다가 자연스레 서로 사는 이야기로 2시간을 꽉 채웠다. 나는 내가 왜 이리도 시간 약속에 민감한 것일까 잠시 생각해봤다. 내가 그렇다 보니 내가 다른 사람과의 약속에 어쩌다 조금이라도 늦게 되면 나는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는 스타일이었다. 본인이 본인을 피곤하게 하는 스타일. 그런데 이건 임신 출산 육아로 인한 민감증이 아니었다. 역사가 긴 불신이었다.


'약속시간 좀 늦는 게 무슨 대수라고 나는 그렇게 민감하게 구는 거지? 실제로 업무능력이랑 시간 준수 능력이랑 꼭 비례하든가? 30 몇 년 인생 살면서 시간 잘 지킨다고 상 받은 적 있나? 그걸로 엄청 이득을 본 적이 있나? 결국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나를 싫어할 사람들은 싫어하 좋아할 사람들은 좋아할 텐데.'


선배랑 만나자마자 금세 낮잠에서 깨더니 두세 시간 내내 유모차에서 잘 버텨주다가 집에 와서 이유식도 얼마 먹지 못하고 뻗어버린 에바를 보며 조금 알 것 같았다.

어른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하루가, 일분일초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잊고 지내지만 갓 태어난 아기로 비유하자면, 그들의 잘 잡혀가는 삶(루틴)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엄마 아빠가 된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들이 먹을 시간에 먹어주고, 잘 시간에 자주는 것만 해도 얼마나 중요한 일이고 크나큰 축복이며 가정의 평화인지!

패턴이 잘 잡혀있는 에바의 경우에는 그게 더 크게 느껴졌다. 선배가 1시간 늦어진 덕분에 에바는 평소보다 4시간이나 더 늦게 잔 것이다. 그로 인한 수유, 목욕, 밤잠의 타이밍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요 작지만, 엄연한 한 인간의 일생 중 한 순간을 바꿔버리는 힘이, 시간에 있다. 우리가 하루에 얼마나 나아지는 가에 따라 후의 삶이 좋아지듯이. 그 힘을 간과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성장이 멈추고 타인의 시간까지 쉬이 여기게 된다. 고의든 아니든 상관없다. 시간은 우리들의 의도와는 아무 상관없이 흘러가니까.



"어휴 오늘 한 시간이나 기다렸어? 짜증 났겠다~ 시간에 맞춰 준비도 다 했을 텐데. 배도 고팠을 테고."


오늘 하루 일과를 묻는 남편에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그러게 말이야. 난 왜 이렇게 시간 약속 안 지키는 사람이 싫은지 몰라. 머리로 이해하려고 해도 전혀 이해가 안가. 친구들은 오히려 내가 너무 빡빡하게 군다고 뭐라고 하니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그걸 에바를 보면서 조금 깨달았어. (깨달음을 자랑스럽게 설파 중)"


당연하지. 사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사람을 죽이는 게, 그 사람의 남은 시간을 모조리 빼앗는 거잖아요



나는 이렇게 또 남편의 주옥같은 한마디에 기가 막혀버렸다.


"자기, 그거 어디서 읽은 거야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그래. 이러면 어떠하고 저러면 어떠하리.

 


시간은 금이 아니고 목숨이었다. 

나는 내 목숨을 담보로 타인의 목숨 값은 엄청나게 쳐주면서도 정작 내 목숨 귀하게 여길 줄은 몰랐다. 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만나지도 않을 사람과의 관계로 스트레스를 받고, 누군가의 한 컷의 이미지로 막연히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는 시간들도 소름 끼치게 무쓸모 한 것이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대충 대하면서 생긴 에너지를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정성스럽게 나눠주고 있었다. 거꾸로 살고 있었다. 내 시간과, 사랑하는 사람의 시간은 아무 두려움 없이 무이자로 막 끌어다가 썼다. 그런 내가 엄마가 되고 내 시간뿐 아니라 당분간 딸의 인생까지 대신 살아야 한다. 아! 그래서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한 것이라고 하는 거였나 보다. 내가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듣고 좋은 곳으로 가야 내 딸 역시 그러할 테니. 엄마가 되고 난 뒤 모든 깨달음의 끝에는 항상 내 딸이 있다. 나에게 늘 새로운 영감을 주는 내 남편과 딸이 옆에 있음에 이 시간이 소중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혼술이 하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