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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summer Mar 13. 2021

삶의 숙제를 미루고 미루다가.

그냥 또 미루기로 한다.

가끔 사는게 뭔지, 산다는 것만으로, 살아있는 것 만으로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다.

딱히 불행하거나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몸이 아프긴 하다) 뭔지 모를 삶의 무게에 짓이겨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이것도 슬럼프라면 슬럼프일까. 



특별히 물욕도 없지만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칙칙한 추리닝에 익숙한 내 몸뚱이는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어느덧 매화꽃까지 피며 얼른 타이트한 청바지와 살랑한 셔츠를 입으라고 재촉하고,

특별히 못하고 있는 건 없지만 아이와 남편 외의 사람들과의 불필요한 소통은 최소한으로 하며 살다 보니 나만 시대의 유물이 된 것 같아 비교대상이 없어 잘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특별히 복직을 서두르고 있는 건 아니지만 우연의 일치인지 휴직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다지 연락하고 싶지 않은 회사 동기들, 동료, 상사로부터 오는 보고 싶다는 연락이 괜히 신경 쓰이고,

특별히 유약한 건 아니나 아이 낳고 급격히 떨어진다던 체력과 면역력 때문일까 단순한 감기몸살인 것 같기도 한데 천식 기미가 있다 보니 밤에만 유독 심해지는 기침에 이 시국에 혹시나, 만에 하나 큰 병은 아닐까 가슴이 덜컹하고 몇 날을 불안에 떨었다.


자꾸만 복잡하고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알 수 없는 이상한 바이러스가 득실대는 요지경이 되어가는 이 시대에,

저녁에 밥을 먹다가 고작 30대 초반의 내가 "여보, 옛날이 더 살기 좋았소"라고 무심코 뱉었다.


왜 이렇게 살기가 힘들어졌는지.

건강, 집 장만, 어린이집 문제, 복직 시기, 아이 비자 문제, 나아가 우리 가족의 역이민 및 사회적 이슈까지. 나를 고민스럽게 만드는 일들과 할 일은 태산인데 가족의 의식주를 겨우겨우 챙기고 난 후 생기는 자투리 시간에는 드러눕기 바쁘고. 하도 들여다보느라 닳고 닳은 스마트 폰 속 세상은 더 이상 나의 흥미를 끌 것이 없는데 손에서 놓치지 않으려 기를 쓰고 있고. 나의 소진된 에너지를 그렇게 채우고 있다.


그렇게 삶이 나에게 준 숙제는 많은데 오늘만 사느라 자꾸 미루다 보니 지난날의 날씨가 생각이 안 나고 고만고만한 내용들의 복사+붙여 넣기로 가득 찬 미뤄둔 겨울방학 일기장처럼 내 삶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생각하는 데로 살아야 하는데 몇 번 지친 몸을 쉬게 한다는 핑계로 생각의 버튼을 일부러 끄기 시작했더니 그냥 코드를 뽑아놓고 산지 꽤나 오래된 것이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불안한 병, 하지만 완벽하지 않을 거면 처음부터 손에서 놓아버리는 지병을 오랫동안 앓고 있는 와이프를 보며 남편이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다.


"단순하게. 바보처럼 살아요."

"한꺼번에 다 하려고 하면 잘 안돼. 하나씩."



얼마 전부터 후두염에 걸린 내 아이의 기침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숨은 잘 쉬고 있는지 잘 자고 있는지 밤중에 대일곱번을 깬 것 같다. 나도 옮은 것인지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하도 하다 보니 명치끝이 아픈데, 10킬로의 작은 몸으로 콜록 대는 아이는 얼마나 괴로울까. 이 애미가 천만번의 기침을 대신하다가 피를 토하는 한이 있더라도 대신해주고 싶은데 마음이 아프다. 애미의 수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달콤한 딸기와 바나나를 좋아하고, '코!'라고 하면 눈을 가리키는 우리 딸아이의 쌔근쌔근 자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미룰 수 있는 숙제는 미루고 내일 더 사랑하기 위해 오늘의 아픈 나는 그냥 푹 자기로 했다.



빠르게 가는 시간에 한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지만, 뭐, 좀 미루면 어때요.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까 잠시 적당히 미루면서 대충 살아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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