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해야지
"나는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이야"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게 자랑인 마냥 입버릇처럼 떠들었더란다. 지금 돌이켜보면 쿨몽둥이로 맞아야 겠지만 그 땐 그랬다.
마치 여러 굴곡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극복해내었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으스댔었던 것 같다. 게다가 아주 멋진 남자 친구를 만나 평생 못할 것 같은 사랑까지 해보고, 받아봤으니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다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슬퍼할 전 남자 친구이자 현 남편에겐 미안하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고 모든 게 바뀐 내 삶에서 가장 바뀐 것은 더 이상 저 말을 못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매년 생각 없이 의무적으로 받던 건강검진도 참여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으며
조금만 문제가 보여도 가슴이 철렁했으며 단 1미리의 의심이라도 보일 때엔 곧바로 정밀 검사를 받았다.
두통이 잦아 머리가 아파 혹시나 하는 마음에 MRI 검사를 위한 기계에 들어가 덜컹덜컹 소리를 들으며 누워있던 그날도 두 손 꼭 모아 기도했다.
'하루라도 더 많이 내 딸 옆에 있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딸의 유치원 졸업식, 학예회, 초등학교 입학, 내 딸의 사춘기 등등을 상상하며 눈물이 났던 것 같다.
하루라도 오래 살아서, 내 딸이 엄마를 부를 수 있길, 엄마를 느끼길, 부족해도 엄마가 존재하는 딸이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랐다.
그동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늘을 잘 살아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었는데.
그냥 나는 사랑하는 것들이 없었나 보다.
딸의 까르르 볼이 터질듯한 웃음, 아장아장 걸음마, 올록한 이마 뽈록한 배, 꼭 안아주는 두 팔.
그리고 남편의 나와 함께 마시는 술로 늘어가는 뱃살, 따뜻한 주름, 반복되는 부부싸움만큼 반복되는 화해 그리고 그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충만한 신뢰와 사랑까지.
앞으로 사랑할 것들이 더 많아지면, 나는 아마 이 모든 것들이 사무쳐 당장 눈감고 죽지 못할 터이다.
무엇보다,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해줘야지.
늘어난 기미도 이제 막 시작한 그림도 게으른 글쓰기도 쉽사리 꺼저버리는 열정까지도.
소파에 널브러져서 따보는 맥주 한캔마저도 살아가는 동안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을 안아줘야지.
나를 가장 아름답게. 사랑받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