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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summer Aug 25. 2021

나는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여자야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해야지

"나는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이야"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게 자랑인 마냥 입버릇처럼 떠들었더란다. 지금 돌이켜보면 쿨몽둥이로 맞아야 겠지만 그 땐 그랬다.

마치 여러 굴곡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극복해내었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으스댔었던 것 같다. 게다가 아주 멋진 남자 친구를 만나 평생 못할 것 같은 사랑까지 해보고, 받아봤으니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다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슬퍼할 전 남자 친구이자 현 남편에겐 미안하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고 모든 게 바뀐 내 삶에서 가장 바뀐 것은 더 이상 저 말을 못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매년 생각 없이 의무적으로 받던 건강검진도 참여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으며

조금만 문제가 보여도 가슴이 철렁했으며 단 1미리의 의심이라도 보일 때엔 곧바로 정밀 검사를 받았다.


두통이 잦아 머리가 아파 혹시나 하는 마음에 MRI 검사를 위한 기계에 들어가 덜컹덜컹 소리를 들으며 누워있던 그날도 두 손 꼭 모아 기도했다.

'하루라도 더 많이 내 딸 옆에 있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딸의 유치원 졸업식, 학예회, 초등학교 입학, 내 딸의 사춘기 등등을 상상하며 눈물이 났던 것 같다.

하루라도 오래 살아서, 내 딸이 엄마를 부를 수 있길, 엄마를 느끼길, 부족해도 엄마가 존재하는 딸이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랐다.



그동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늘을 잘 살아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었는데.


그냥 나는 사랑하는 것들이 없었나 보다.




딸의 까르르 볼이 터질듯한 웃음, 아장아장 걸음마, 올록한 이마 뽈록한 배, 꼭 안아주는 두 팔.

그리고 남편의 나와 함께 마시는 늘어가는 뱃살, 따뜻한 주름, 반복되는 부부싸움만큼 반복되는 화해 그리고 그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충만한 신뢰와 사랑까지.

앞으로 사랑할 것들이 더 많아지면, 나는 아마 이 모든 것들이 사무쳐 당장 눈감고 죽지 못할 터이다.



무엇보다,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해줘야지.

늘어난 기미도 이제 막 시작한 그림도 게으른 글쓰기도 쉽사리 꺼저버리는 열정까지도.

소파에 널브러져서 따보는 맥주 한캔마저도 살아가는 동안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을 안아줘야지.

나를 가장 아름답게. 사랑받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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