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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summer Feb 18. 2022

치명적인 술, 엄마의 혼술.

엄마는 더이상 무대위에서 마시지 않겠다

쾅! 쿵. (두둥)


여느 때처럼 아이를 재우다 아이보다 먼저 쓰러져 누워 자고 있는데 굉음이 났다. 무언가가 부딪히거나 떨어지는 소리. 일본 맨션이 얼마나 유연하게(?) 지어졌는지, 거실에서 들려온 정체를 알 수 없는 '쿵'은 방바닥을 타고 진동을 만들며 전달되었고 곯아떨어진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마치 우레의 전율이 퍼지듯 등줄기가 싸늘해지기까지 했다.


옆을 내려다보니 에바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다. 먼저 잠든 엄마의 눈을 오동통한 손가락으로 찢고 부라리며 원망스러움에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잠든 걸까. 꾸역꾸역 억지로 잠든 얼굴이 애잔한데 볼록하게 내놓고 잠든 배와 천사같은 두뺨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본능적으로 에바가 무사한지만 확인하고 조금의 지체도 없이 거실로 나갔다.

어떤 불안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직장 동료와의 저녁식사(술 포함)로 늦는 남편이 과음으로 또 어디 책장에라도 부딪히며 거실에 쓰러져 있는 건 아닌지, 고작 도보 5걸음이면 알 수 있는데도 거실로 나가는 동안 나름 긴장했던 것 같다.


남편은 다행히 무사했다. 무게감 있는 폼롤러가 쓰러지면서 난 소리였다. 전여친이자 현부인의 7년 차의 경력으로 봤을 때 꽤 마시긴 했지만 내가 노이로제에 걸릴 만큼의 꽐라는 되지 않았다. 다행이지만 놀란 가슴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고 결국 한 시간을 뒤척이다가 이 새벽, 글을 쓴다.



폼롤러 떨어지는 소리에 잠까지 깰 정도라니. 남들이 들으면 이런 나의 반응에 남편이 '알코올 문제'가 많은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술을 즐기고 많이 '마실 수 있는' 사람 치고 알코올 문제없는 사람 없다는 주의지만)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어릴 때 나의 아버지는 말년에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자꾸 마시며 자주 어딘가에 고꾸라져 계셨다. 어린 시절 내 눈에 비친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나 한심해 보였지만 그러한 '기억'이 아닌,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잊혔던 그 당시의 시각적 청각적 후각적 자극이 엉켜 만들어진 어떤 '감각'이 오버랩되면서 털끝이 곤두섰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녹초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잠 못 드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린날의 조금 아팠던 기억 따위, 이제 돌봐야 될 사람도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많은 내게 그 어떤 대미지도 없다. 지금의 나에게 밤잠을 설치게 할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 내 딸. 그렇다. 나는 에바에 대한 미안함으로 다시 잠을 설치고 있었다.


비록 브런치에 ‘혼술’ 키워드가 없다는게 놀랍지만 여성들이 인생이란 무대 위에서 수많은 역할을 해내면서 그중에서도 고되고 고된 엄마 역할을 마무리하는 하루 끝 무대 밑에서 홀로 ‘육퇴 후 맥주 한 캔'을 즐기는 엄마들이 많은 걸로 안다. 나는 그녀들의 오아시스를 긍정한다! 나? 나야 말해 뭐해. 나름 힘들고 힘들다는 광고회사에서 굴리던(?) 몸 아니겠는가. 출산 전에는 당연히 막차가 끊긴 후 퇴근을 밥 먹듯 했고 그렇게 진짜 밥을 먹는 대신 늘 새벽녘 퇴근 후 술로 대충 배고픔과 피곤을 달래고 침대에 쓰러진 나날들이 연애경험보다 긴, 나름 전(투)력있는 여자였다. 공복의 한잔의 짜릿함을 그때 배웠던 것 같다. 조금이나마 이른 시간에 마시면 건강에 좋을까-는 핑계고 지금의 나는 육퇴 후가 아니라 하루가 끝나는 길목의 핑크빛 하늘이 어스름하게 어여쁜 그 몽롱한 시간에 마시는 맥주 한 캔을 좋아했다. 무대가 채 막을 내리기도 전, 열과 성을 다 하며 나의 온 에너지를 쏟아붓느라 체력도 정신력도 방전되기 직전인 독박육아의 하루가 마무리 되기 전의 저녁시간. 딸에게 저녁을 챙겨주거나 함께 먹으며 마시는 한 캔, 혹은 두 캔으로 하루의 긴장을 미리 풀었던 것 같다. 에바가 잠들기 전 3시간도 힘내자는 내 나름의 레드불이었다.


그러나 적든 많든 술이 들어가면 인간은 이성적일 수가 없다. 기분이 좋아서 마시든 슬퍼서 마시든 힘들어서 마시든 불안해서 마시든, 그 양이 아주 조금일지라도 인간은 미미하게나마 감정적이 되기 마련이다. 몇 시간 뒤, 내일, 몇년후의 나를 책임지기보다는 당장의 행복감에 젖어 지금만 사는 것처럼 행동하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고로 책임 있는 어른들과 마실 때야 문제가 없겠지만 아이와 단둘이 있을 때는 신중해야 했다. 내가 그녀의 세상인데  세상의 시간이 멈춰버린다니. 피곤한 몸에 맥주를 들이부었더니 나른해지면서 잠들기 전까지 몇번 부름을 못들은척 하는  당연히 최선을 다하지 못했고 딸의 하루를 조잡하게 마무리했다. 맥주   때문에 잠자리서 보는 그림책을 대충대충 넘겼고, 아이가 잠들기  소중한 시간을 그렇게 대충 빨리 끝내며 얼른 자라고 신경질까지 부리고 말았다. 맨정신에 더 잘 읽을 수 있는 내 딸의 진심어린 눈망울을, 싱그러운 눈웃음을, 나의 축복을 막대했다. (물론 술을 안먹어도 육아에 지쳐 있을땐 가끔 정신을 놓아버리기에 맨정신이라 보기 힘들지만) 자기는   시간도 아닌데 평소보다 일찍 쓰러져 먼저 잠든 엄마 옆에서 귀가가 늦어지는 아빠만 찾으며 엄마 옆을 떠나지도 못하고 울던 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하루 동안 꽁냥꽁냥 사랑만 주고 사랑만 받으며 엄청  지내놓고 갑자기 엄마가 저러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아이와 가능한 한 모든 순간을 같이 하려고 2년 넘게 직장을 미뤄놨으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나날들을 달아났던 것일까. 소중한 그 순간의 축복을 온전히 누리기보다, 그저 자책만이 남는 값싼 해방감이나 선사해주자고 캔맥주를 땄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절대, 아이 앞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기로 다짐한다. 남편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기에 적어도 혼술만큼은 앞으로 18년은 할 일이 없을 것이다. 부부간의 술커뮤니케이션도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우리가 세상인 아이가 보고 있다.


이상하리만치 어느 때보다 확실하고 견고한, 지킬 자신이 있는 나와의 약속이 하나 생기고 나니 기분 좋은 묵직함이 더해져 설레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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