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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summer Oct 18. 2020

자식을 낳고 나니 자식의 마음을 더 잘 알았다.

나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엄마 마음

나는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돈을 쓸 줄 밖에 모르는 아빠 덕에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컸고 결국 부모님과의 추억은 거의 만들지 못한 채 엄마는 고2 때, 아빠는 나의 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돌아가셨다. 그 덕에 나는 어린 시절 정서적으로 궁핍했고 어른이 되고 나서도 나의 행동거지 하나, 말투, 사고방식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정서적 흙수저였다. 한창 중요한 욕구가 있을 시기에 애착 손상을 겪게 되면서 나는 늘 머릿속에서 부정적 스키마가 자리 잡게 되었고 늘 부정적 인생 대본이 따라다녔다. 지금의 남편과 진지한 만남을 이어가기 전에는 음지에서 남모르게 고스란히 그 부작용(?)에 시달리며 살았고, 30대가 되며 아이를 갖고 육아 심리서를 중점적으로 읽고 공부하게 되면서 나 자신에 대해 이성적으로 잘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를 이해하기 시작하니 비록 낮은 자존감은 그대로지만 스스로를 다치게 하는 일은 줄어들었다. 아이를 이해하고 잘 키우고 싶어서 뒤적이기 시작한 심리서들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그동안 내가 시달린 부작용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되면서 더 이상의 부작용은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실용적인 심리백과 백 권보다, 고퀄리티의 자기 성찰 시간들보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인내를 쏟아준 남편의 힘이 컸다는 걸.


아무튼, 짧지 않은 사회인 경력 8년 동안 각 분야의 다양하고도 다양한 별 미친 사람들도 다 만나보며 할머니가 어릴 때 종종 하시던 '옛 어른들 말씀'이 그를 것 없다는 꼰대 같은 생각을 나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른 게 하나 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르게 느껴지는 말이 생겼다.


너도 애 낳아보면 부모님 마음 다 이해하게 될 거야.


그 시작은 '엄마 없는 아이'가 된 무렵이었다. 사춘기 시절까지도 내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주변 친척 어른들께서 해주신 말이었다. 난 이 말이 정말 듣기가 싫었다. 일단 이 말의 전제는 내가 나 스스로를 불쌍하다 여기어 슬퍼할까 봐 혹은 삐뚤어질까 봐 다들 위로차 한 마디씩 해주시는 거였겠지만 나는 진짜 괜찮은데 이 말을 들으면 더욱더 내 결핍에 대해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겪어보지 못한 이들의 섣부른 위로가 이렇게도 위험한 것이다.)

게다가 어른이 될 때까지는 내 부모님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직접 듣지도 못하고 "그러려니 하고 내가 이해를 하는 게 맞는 거구나, 물어보면 안 되는 거구나, 지금은 내가 어리기 때문에 왜 엄마가 나한테 마음껏 연락할 수 없는지, 딸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 같은 거나 나중에 인 서울 대학을 오면 같이 살 자와 같은 말로 희망고문을 할 수 없는지 알 수 없는 거구나"라는 생각에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은 나의 무지로 인한 잘못된 것이라고 자책하게 만드는 효과까지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내가 부모 입장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정말 이루 말로 못할 힘듦과 대단한 속사정이 있는 것이라 믿었었다.


그런데 에바를 낳고 8개월이나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사실 은근히 기대까지 했다. 내가 엄마가 되면, 나를 시댁에 두고 떠나가 버린 엄마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안다'. 알고는 있다. 엄마가 왜 떠나야만 했는지.


경제적인 어려움, 뇌졸중으로 쓰러져 기적적으로 죽다가 살아난 남편 수발, 서울 토박이 막내딸의 경상도 장손 댁 시집살이. 그리고 쌍팔년도의 이혼하는 여자에 대한 시선까지.


지금의 나보다 젊은 엄마가 겪어야 했던, 나라면 이 중 하나라도 못 견뎠을 것 같은 이 팍팍했던 결혼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안다. 나라도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여자로서다. 모르겠는 건, 나에 대한 엄마의 마음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에바를 바라보며 종종 엄마를 떠올려보지만 물음표만이 남는다.


엄마도 이런 때가 있었을까.

내가 100일 때는 감개가 무량하고, 내가 처음 뒤집었을 때는 엄청난 것에 성공한 마냥 자랑스러웠을까.

내가 잠을 안 자더라도 어쩌다가 보이는 미소에, 옹알이에 스르륵 녹았을까.

내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렀을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까.

지치는 낮에는 버럭 하다가도 고요한 밤, 잠든 나를 껴안고 엄마가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자책했을까.

내가 조금이라도 아픈 날, 세상이 다 무너진 것처럼 5분마다 체온을 재며 밤을 지새웠을까.

미운 시댁 식구들, 아빠 닮았다고 하지 않고 내 딸이 제일 이쁘다고 친구들에게 주책을 떨었을까.

내 목숨을 걸고 지키고 싶은 아이라 생각해주었을까...


답이 없는 질문들이지만, 지금 내가 에바에게 느끼는 감정들을 나의 엄마 역시 느꼈을 거라는 확신이 없다. 물어볼 곳도 없지만, 그냥 나는 내 온몸으로 알고 있다. 나는 세상에서 나의 가장 절대적이었을 존재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신뢰를 배우지 못했다는 걸.


나였다면-

조금 무책임할지 몰라도 충분히 사랑한다고 말해줬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사랑한다고 했을 것이다. 다 내 잘못이라고. 너는 잘못한 게 없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1년에 한 번 만나러 오는 게 어떻게 그리도 힘든지 설명해줬을 것이고 오랜만에 만나는 딸아이를, 하굣길 남몰래 납치하듯이 목욕탕부터 데리고 가기 전에, 반가운 마음에 물고 빨고 했을 것이다.

엄마 없이 커서 꼬질꼬질하다고 세신사 아주머니께 맡기고 밖에서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딸아이와 꺅꺅 거리며 따뜻한 물에 함께 몸을 담그는 것이 얼마나 사랑 충만한 경험인지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나라면 딸아이를 서울행 고속버스 터미널에 우두커니 세워두지 않았을 것이다. 내 딸이 나를 배웅하며 떠나는 버스를 향해 손 흔들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안 보이는 곳에서 울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딸아이에게 평생 헤어지는 순간에 대한 트라우마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자식을 낳고 나니 자식의 마음을 더 잘게 되었다.


나는 자식을 낳고도 부모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물론 열 달을 품어내고 세상에 빛을 보게 해 주시고 그 어떤 것 하나 쉬울 것 없는 자식농사로 우리 어머니들의 희생과 인고가 얼마나 크고 하해와 같은 것이지 몸소 깨닫는 중이지만, 나는 자식을 낳으니 자식의 마음을 좀 더 잘 알 것 같았다.

에바가 왜 우는지, 왜 웃는지, 어디가 불편한지, 지금 여기서 1을 더하면 10년 후 2가 될지 0이 될지.

어린 나에게 뭐가 필요했는지.

불안하거나 심심하거나 배가 고프거나 그냥 이유 없이도 칭얼거리면서 나를 필요로 하는 아이를 꼭 안아주며 나는 자식의 마음을 더 잘 알 것 같았다.


가끔 드라마 스테레오 타입 중, 부모 자식 간의 다툼이 생기면 '낳아준 은혜도 모르고 배은망덕한 것' 같은 대사가 있는데 나는 정말 그 어떤 열악한 현실 속에 놓인 자식이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 있게 해 준 것에 대해 무조건 감사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주 냉정하게 생각해보라. 부모님에 대한 감사함, 사랑, 존경 등 포떼고 차 떼고 다 차치하고 나서, 우리 중 그 어느 누구가 정말 이생을 선택해서 태어났을까?

아이를 낳아보니 그 생각이 더 강해졌다. 에바는 순전히 나와 남편의 이기와 욕망에 의해서 태어난 생명체이다. 그런 아이에게 '내가 널 낳았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해라!'라는 말은 못 할 것 같다. 우리는 에바가 세포 단위였을 때 그녀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낳은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더더욱 이 아이를 사랑하고 잘 지켜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나중에 행여나 아이에게 '너 때문에 내가 어떻게 했는데..!' '너를 위해 엄마가 그때 모든 걸 버리고... (희생했는데)' '너도 너 같은 딸 낳아봐'와 같은 말은 절대, 네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큼 촌스러운 대사도 없다. 너 같은 딸 낳아보라니? 내 자식을 향한 저주인가 행운의 주문인가! 선배맘들은 말할 것이다.

"니가 아직 애가 어려서 그래. 중2도 아니다. 초3만 돼봐라 미친다."


그래도 아직은 부모 마음보다는 자식 마음을 더 헤아리고 싶다. 게다가 내 스스로가 놀랍게도 실은 육아가 그렇게까지 힘들지도 않다.




시아버지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기 전, 예비 며느리가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해 당신 아들에게도 사랑 주는 법을 모를까 걱정이라고, 내가 아닌 남편에게 털어놓으신 적이 있다. 나의 순진한 남편은 그걸 또 고지 곧대로 나에게 전달하는 바람에 대판 싸웠었지만.


감히 그건 기우라 말씀드리고 싶다. 부모로부터의 애착형성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비록 나의 조부모가 섬세하고 반응적인 양육자는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로부터 어느 정도 안심의 정서적 욕구를 충족받고, 나는 가족의 울타리 밖에서 많은 사람들과 가족'같은' 관계를 맺으며 사랑을 주고받았다. 내 리즈시절은 직장 생활부터라고 할 정도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어마 무시한 사랑을 받았고, 그들 역시 나에게 '부모님이 어떻게 키우셨으면 그렇게 사랑이 많은 아이로 자랄 수 있니? 한국인들은 다 그렇게 사랑이 많니?'라고 물을 정도로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퍼주는 여자로 자랐다. 결정적으로, 나는 내 남편과 딸을 너무나 사랑한다. 엄마는 나도 처음 해보는 거라 잘은 모르지만, ‘버릇 나빠질라’와 같은 걱정은 하지도 않고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표현하면서 더  사랑해주기 위해 매일 공부한다. 오늘 먹은 것이 내일의 내 몸을 결정하듯, 내 딸이 느끼는 사랑이 내일의 딸의 몸과 마음을 좌우한다는 생각에 대단한 '재산'을 물려줄 수는 없어도 이 아이가 커서 살아가는데 유리할 수 있도록 딸에게 필요한 것; 우리만의 강점, '유산'은 물려주고자 나와 내 남편은 꾸준히 노력한다. 그리고 언젠가, 나 역시 엄마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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