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라니. 오늘은 꼭 병원에 가야 하는데. 밤사이 몰래 온 손님이 달갑지 않은 서연이 잠에서 채 깨지 못한 눈을 찌푸렸다. 다행히 눈발이 거세진 않아서 오후쯤이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서연은 조급한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어차피 아직은 이른 오전이니까 진료 시간이 끝날 때까지는 여유가 있다. 서연은 버릇처럼 듣지 않는 텔레비전 소리를 틀어놓고 커피를 내렸다. 어제도 약 덕분에 겨우 잠들었지만 향긋한 카페인이 주는 순간의 행복을 놓아버리기가 힘들었다. 뜨거운 물을 한껏 머금었던 원두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가 청명하다. 내리는 눈에는 소리가 없을 텐데도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고요한 눈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고요함이 들리다니, 서연은 기이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준성을 잃고 맞는 첫눈이었다. 눈 오는 날이면 서연의 손을 잡고 나가 눈 오리를 만들며 함박웃음을 짓곤 했던 준성은 참 어린아이 같았는데. 뭐하러 추운데 나가느냐며 툴툴거렸지만 서연도 결국 졌다는 듯이 웃곤 했다. 눈을 그렇게 좋아했기 때문일까, 준성은 봄을 맞은 눈처럼 흔적도 없이 떠나버렸다. 겨울을 영원처럼 내리던 눈도, 고작 몇 해를 영원처럼 약속하던 사랑도 결국은 끝이 났다. 삶이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도 서연은 맡은 프로젝트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친구와 사소한 말다툼이 생겼을 때, 유독 뺨에 닿는 바람이 시릴 때, 빨래를 잘못 돌렸을 때 울컥 올라오는 원망의 감정에 쉬이 잠들지 못하는 날이 늘었다. 다 너 때문이야. 닿을 리 없는 외침인 건 알지만 서연은 괜스레 중얼거렸다. 다 너 때문이야.
어느새 커피가 다 내려졌다. 컵에 커피를 따르려는데 휴대폰 액정이 반짝이며 문자가 왔음을 알렸다.
‘내일 올라갈 거야. 준비하고 있어.’
엄마의 문자에 서연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어른이 되고 줄기차게 싸워왔지만 엄마는 다시금 노크 없이 방문을 열던 그때로 돌아가곤 했다. 내일은 느긋하게 쉬려고 했는데. 내일은 바쁘다는 문자를 보내자마자 가시 돋힌 답이 돌아왔다.
‘맨날 바쁘다지. 엄마가 딸 얼굴 보러 가지도 못해? 매정한 년.’
일방적으로 통보를 한 건 엄마였는데. 내 주말 계획을 망친 것도, 지금 내 기분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서운함만을 토로하는 것도 엄마인데. 서연이 무슨 말을 하든 엄마의 결론은 늘 ‘넌 내 딸이잖아.’였다.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얼마나 불합리한 일이더라도 서연은 그저 엄마에게 빚진 죄인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 나는 그냥 나 하나를 돌보는 것도 너무 버거워. 왜 엄마의 힘든 감정까지 내가 돌봐야 해? 나는 왜 항상 나 혼자의 걱정만을 온전히 짊어질 수 없어? 토해내듯 써 내려간 문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빠르게 지워졌다. 이번에도 서연의 패배다. 서연은 엄마를, 그리고 엄마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연은 애써 밝게 이야기했다. 아무리 바빠도 엄마는 만나야지. 엄마 어디 가고 싶어? 요즘 원데이 클래스가 유행이라던데 베이킹 하러 갈까? 아니면 연극 보러 가는 건 어때? 통화가 끝날 때 한층 나아진 엄마의 목소리에 서연은 마음이 놓이면서도 가슴 한쪽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서연은 그제서야 따르려던 커피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드립 서버가 왜인지 야속했다. 아니지, 이건 나 때문이야. 다 나 때문이다. 서연은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하며 빈 약통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텅- 하고 허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발은 더 거세졌고,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뉴스는 오늘의 폭설주의보를 알렸다. 서연은 어쩌면 영원히 눈이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억지로 눈을 감으면서도 서연은 자신이 잠들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