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취향의 당위성

by 박여름

명자씨는 이른 새벽 채 동이 트지 않은 적막을 깨며 집을 나섰다. 오늘도 장장 열여섯 시간의 고된 노동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리어카를 끌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차차로 폐지를 주워 모으다 보면 어느새 점심. 간단히 끼니를 하고 또다시 허리를 펼 새 없는 노동. 다시 늦은 저녁. 묵직해진 폐지들을 고물상에 넘기고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는 돈을 쥐고 나면 어둑한 밤이 돌아온다. 이런 쳇바퀴 도는 일상을 명자씨는 불평 없이 묵묵하게 살아내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영위하는 소소한 삶의 재미를, 행복을, 명자씨는 힘닿는 데까지 지키고 싶었다.


게다가 오늘은 수요일. 명자씨만의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날이었다. 의식이라 하면 흔히 대단한 것들을 생각하지만, 명자씨의 의식은 결코 거대하거나 요란하지 않았다. 그저 손녀딸 희정이 일하는 카페에 가 수프리모 원두로 내린 핸드드립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팝 음악을 듣는, 누군가에겐 일상적인 일이 명자씨에겐 신성한 의식처럼 느껴졌다.


처음 희정이 일한다기에 짬을 내어 찾아간 카페는 노인에겐 허락되지 않는 무언의 압박이 있었다. 한 눈에도 현대적이고 고급스러운 외관을 가진 카페는 휘황찬란한 별천지 같았고, 슬쩍 엿 본 메뉴판에는 알아볼 수 없는 꼬부랑 외국 글자만 가득했다. 카페 안의 젊은이들은 응당 그 안에 존재해야만 하는 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데 자신만 동떨어져 있는 기분. 카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명자씨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외치는 것만 같아 그녀는 움츠린 어깨를 돌려야만 했다. 늘 그랬듯 고물상에서 믹스 커피나 얻어 마시자고 체념하며 돌아선 명자씨를 잡은 건 희정이었다.


“할머니,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들어와!”


한사코 손사래를 치는 명자씨의 손을 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온 희정은 그녀를 안락한 의자에 앉혔다. 잔뜩 겁을 주던 외관과는 다르게 명자씨가 발을 들인 카페 안은 따뜻했고 뜻 모르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희정은 명자에게 어떤 커피를 마실지 물었다. 취직한 자신이 오늘은 대접하겠노라며 큰소리를 치는 희정이 대견해 명자씨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저 어린 것이 어느새 커서 나에게 대접을 하겠다고.


“그냥 아무 커피나 줘. 할미는 아무거나 다 좋아.”

“그냥 아무 커피가 어딨어, 할머니. 바리스타 손녀를 둔 할머니는 아무 커피나 마실 수 없지.”


마침 손님이 없는 시간대라며 명자씨 앞에 자리 잡은 희정은 그렇게 커피 원두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산토스는 신맛과 쓴맛이 비슷하게 나는 깔끔한 커피야. 이건 에티오피아의 예가체프라는 원두인데, 신맛이 엄청 많이 나는 커피야. 베리 같이 가벼운 맛이 나서 할머니가 좋아하진 않을 것 같아. … 그렇게나 커피 종류가 다양한지 명자씨는 평생 알지 못했다. 커피는 그저 커피가 아니었던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손녀가 주는 커피를 한입씩 맛보다 보니 수많은 원두들 중 하나는 기억할 수 있었다. 수프리모. 입에 넣는 순간 진하고 부드러운 맛이 기분 좋게 그녀를 에워쌌다.


“이거 맛나다, 희정아.”

“아, 수프리모! 할머니가 좋아할 것 같았어. 그걸로 드릴게요.”


그렇게 명자씨의 소소한 수요일의 의식이 시작되었다. 희정이 일하는 수요일 오후 시간대에 찾아가 잠깐의 커피 타임을 갖는 것. 뜻 모르는 노래는 나중에 희정에게 물어보니 팝송이란 외국 노래란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감미로운 목소리와 감정은 명자씨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렇게 수프리모 커피를 마시며 팝송을 듣는 그 시간으로 명자씨는 또다시 일주일을 살아갈 힘을 얻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있어야 할 희정이 없었다. 늘 명자씨가 카페에 들어서면 말하지 않아도 바로 수프리모 커피를 내려주던 희정은 어디 가고, 멀끔한 남자 직원만이 멀뚱히 명자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직원의 눈이, 카페를 간간이 채우고 있던 모든 젊은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만 같았다. 명자씨의 등줄기를 타고 조급한 땀방울이 흘렀다.


“그... 커피... 마실라고 하는데...”

“그냥 기본 커피 드려요? 차갑게요, 따뜻하게요?”

희정이는 분명 ‘그냥 아무 커피’는 없다고 했다. 그냥 기본 커피라니! 명자씨의 취향은 단순히 물의 온도로만 결정되지 않았다. 그녀가 마시고 싶었던 건 ‘그냥 커피’가 아닌 예의 그 부드러운 맛과 진한 향기를 가진, 바로 그 커피였다. 섣불리 결론을 내버린 남직원의 말에 명자씨는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오늘의 의식을, 널리고 널린 ‘그냥 커피’로 망칠 수는 없었다. 기억을 되살려야 했다. 희정이가 말한 원두의 이름을. 분명 수... 뭐시기였는데. 수...

“...그래, 수프리모! 수프리모 커피 줘요. 따뜻하게.”

“...아, 수프리모 원두요? 네... 수프리모 커피 따뜻하게 한 잔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진동벨을 건네받은 명자씨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남직원의 얼굴에 살짝 당황한 표정이 스친 듯했으나, 승리를 쟁취해 낸 명자씨에게는 온통 수프리모 커피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냥 아무 커피가 어딨어, 할머니.’ 희정이의 목소리가 명자씨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 애의 말이 맞다. 커피든 뭐든 세상에 어떤 것도 ‘아무것’으로 퉁 쳐질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늙은이의 취향도, 젊은이의 취향도 나이만으로 퉁 쳐질 수 없듯이 말이다.


명자씨는 따뜻한 수프리모 커피 향을 맡으며 안락한 소파 자리로 돌아왔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고, 마치 가을의 낙엽 같은 팝송이 카페 안을 흐르고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맛있다. 나에게 딱 맞는, 나만의 커피. 명자씨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또다시 수요일의 의식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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