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일지]
결혼한 지 5년 만에 우리만의 냉장고가 생겼다. 주말마다 남편과 나는 그 앞에 서서 진지하게 고민한다. “오늘은 뭐 먹을까?” 이 질문이 요즘 나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질문이다. 시댁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평일엔 일을 마치고 집에 왔을 때 이미 식사는 끝나고 내가 먹을 반찬과 메인메뉴가 따로 식탁보에 쌓여 있었고 그나마 내가 요리를 한 주말엔 메뉴가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청국장-된장찌개-김치찌개-제육볶음-소불고기-생선조림 정도가 매주말 돌아오는 순서였고 밑반찬 역시 비슷했기 때문이다.
‘오늘 퇴근 하면 뭘 먹을까?’를 고민하게 된 역사가 별로 길지 않은 이유다. 그런데 요즘은 그날 먹을 음식을 직접 고르고, 부엌에서 재료를 다듬고, 요리를 완성해내는 그 모든 과정이 생각보다 즐겁다. 무엇보다 새로운 메뉴가 맛있을 때, 마주 앉아 서로의 반응을 살피는 그 시간이 너무 좋다.
여유로운 여느 휴일이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메뉴를 고민하던 우리는 얼마 전 마트에서 세일 중이길래 덥석 집어온 메밀 소바용 육수를 떠올렸다. 마침 날도 더워 소바를 먹기에 적당했고 메밀면은 뭉탱이째 사뒀던 게 겨우내 그대로 있었다.
파를 송송 썰고 무를 박박 가는 동안 남편이 옆에서 소리쳤다. “메밀소바만 먹기엔 부족하지 않아?”
“만두?”
“오~ 먹잘알”
3초 만에 끝난 티키타카로 새로운 곁들임 메뉴가 추가됐다. 남편이 찜냄비에 물을 받으며 만두를 올리다가 “잠깐만... 최강욱 요리사님이 메밀소바는 슴슴하기 때문에 찐만두보다는 튀김만두가 어울린댔어” “오.. 배운 사람” 또 한마디씩 주고 받자 사이드 메뉴가 찐만두에서 튀김교자로 변신했다.
둘이 식사 하면서 자주 틀어놓고 보는 ‘웬그막(웬만하면 그들을 막을 수 없다, 2000~2002년 방영한 김병욱 감독의 시트콤)’을 틀어놓고 무와 와사비, 파를 팍팍 넣어 메밀소바를 후르륵 들이키고 둘이 눈을 마주봤다. “역시 시판이 최고다”란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두어달 전인가 오늘과 똑같이 메밀면을 삶아놓고 무도, 파도 똑같이 넣었는데 집에서 쯔유로 직접 만든 육수국물은 실패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대단한 요리도 아니고, 맛도 결국 시판육수의 힘이었다. 그런데 그날 점심의 기억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요리를 같이 고민하고, 실패와 성공을 경험하고, TV를 틀어놓고 눈을 마주보며 웃을 수 있는 지금 이 부엌이, 우리 둘만의 집이, 5년 만에 생긴 이 냉장고가… 나에겐 아주 소중한 세계가 된 것 같다.
그렇게 메밀소바와 튀김만두로 한 끼를 해결한 뒤, 그릇을 가져다 놓으면서 남편은 “냉장고에 있는 미나리는 어떻게 해치울까?” 물었다. 내 정신 역시 저녁엔 어떤 재료를 차근차근 없애야할지 이미 냉장고 속을 뒤적이고 있던 차였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우리 둘의 취향이, 기호가, 리듬이 조금씩 쌓여가는 게 느껴진다. 물만해도 각자의 체질에 맞는 우엉차(소양인)와 작두콩차(태음인)가 각각 들어있고, 각자 아침에 먹는 야채샐러드와 그릭요거트, 시장 다녀오던 길에 산 쨍한 보랏빛의 가지, 쿠팡에서 주문시킬 때마다 다음번엔 직접 담궈볼게 하면서도 매번 시키고 있는 백묵은지, 이마트에서 ‘대박이야’ 하면서 사놓고 아직도 써보지 못한 돈부리용 소스, 한번 쓰고 쓸일이 없어 넣어뒀다가 점점 누래지는 쑥갓... 모든 재료 하나하나에 같이 했던 추억들이 담겨있는 것을 보니 이제야 진짜 ‘우리 집’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