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와 당근, 그리고 선크림

[일상의 틈]

by 여름연못

향기는 때로 말, 심지어 생각보다도 빨리 기억을 불러온다.

얼마 전 어릴 때 앞뒷집에 살며 친자매처럼 지냈던 사촌동생을 만났다. 퓨전 한식당에 갔는데 모든 메뉴에 생각보다 야채가 많이 들어있길래, 늘 야채를 골라내 혼이 났던 어린 시절의 녀석이 떠올라 무심코 물었다. “너 아직도 야채 잘 안먹지?”.

“응”하고 당연스럽다는 듯이 대답한 동생은 “오이랑 당근만 좋아해.”하고 덧붙였다. 내가 그동안 쌓은 데이터베이스로는 야채 싫어하는 사람들이 꼽는 ‘워스트’ 야채가 바로 오이와 당근인데?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을 다시 바로 물었다.

그러자 동생은 “어릴 때 고깃집 가면 맨날 오이랑 당근이 먼저 나오잖아. 오이랑 당근을 먹으면 뭔가 곧 고기를 먹게된다는 생각에 맛있게 느껴졌었어. 선크림 바르면 바다 온 것 같듯이.”

그 말은 마치 낯익은 멜로디를 불쑥 들은 것처럼, 묘하게 가슴을 찌르는 감정이었다. 나 또한 선크림 냄새를 맡으면, 정확히는 어릴 때 쓰던 그 특유의 향이 나는 선크림 향을 맡으면 괜히 기분이 들떴다가 울컥하곤 하기 때문이다. 나 말고 또 누군가가 선크림 냄새를 맡고 바다를 떠올릴 것이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동생네 집과 우리는 매년 여름휴가를 같이 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는데, 어린 우리는 바다를 너무 좋아해서 여름이 되기를 늘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스노쿨링 세트와 오래 전부터 써서 빛바랜 구명조끼, 아쿠아 슈즈와 수영복을 챙겨놓고 잠드는 밤이면 설렘 때문에 밤을 설칠 정도였다. 새벽같이 출발해 아침 내내 달려 차창 너머로 지평선이 보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눈이 번쩍 뜨고 들뜬 목소리로 떠들곤 했다.

바다에 얼른 뛰어들고 싶어 끈적하고 하얀 선크림을 몸에 대충 문지르고 엄마의 지도에 따라 준비 운동까지 짧게 하고 나면, 모래사장에 텐트를 치는 어른들을 뒤로 하고 바다로 달려갔다. 물안경을 쓰고 둥둥 떠다니면 별거 없는데도 시간이 어찌나 빨리 가던지, 점심에 라면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에 아쉬워하며 잠시 나갔다가 물이 차가워지는 대여섯시까지는 쉬지도 않고 놀곤 했다.

바다 앞 민박에서 자고 내일 아침이면 또 올 수 있는데도 저녁에 물놀이를 마치면서 우리는 몇 번이고 다시 철썩이는 파도로 달려가 내일 보자고 인사를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날 밤 잠에 들면서는 얼른 내일 아침에 오기만을 기다렸다.

여전히 ‘바다에 갈 수 있는(더 정확하게는 바다에 들어갈 수 있는) 계절’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름을 가장 좋아하는 계절로 꼽는 나는, 서른이 넘어서도 선크림 냄새에 마음이 괜히 두근거리곤 하는 것이다. 이제는 계시지 않는 엄마가, 둘을 잠깐 붙잡아 세워두고 덜 발린 선크림을 두 꼬맹이 등에 슥슥 펴발라 주던 엄마가, 곧바로 떠올라 울적해지긴 하지만.

동생에게 고기집의 오이와 당근은 기쁨의 ‘예고편’ 같은 존재였고 그는 그 맛에서 행복을 예감했을 것이다. 오이와 당근을 먹은 후 늘 고기를 먹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지금도 말이다. 그때의 우리는 눈 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면서 마냥 행복했고, 지금도 선크림 냄새를 맡으면 여전히 파도소리를 떠올릴 수 있다.


같은 냄새로 같은 감정을 꺼내 쓸 수 있는 사람이 어딘가 존재한다는 건 생각보다 큰 기쁨인 것 같다. 이제는 그녀도 선크림 향에서 즐거운 기대감 뒤에 느껴지는 부재(不在)를 같이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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