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잘라내야 피어난다

[식물일지]

by 여름연못

패딩을 꽁꽁 두르고 단추를 꼭꼭 여몄던 게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갑작스레 봄이 됐다. 나는 매년 기온이 오르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마음이 앞서나가있곤 했다. 눈을 돌리는 대로 꽃이 눈에 띄는 시기였다. 바닥엔 종지꽃이며 봄까치꽃, 별꽃, 냉이꽃 같은 이름도 앙증맞은 꽃들이 피어대고 나무 가지가지마다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이 다닥다닥 붙어 피어난 꽃잎들을 보면, 내가 하고 있는 것들 중에 적어도 두어 가지는 덮어놓고 잘 되길 기대해 봐도 되겠지, 하는 개연성 없는 희망이 고갤 들곤 했다.


나에게 새삼스럽게도 삶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시기는 늘 봄이었다. 출근길 종종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가다가 화단에서 동백꽃 한 떨기를 발견했을 때, 긴 겨울을 견뎌내고 망울진 꽃잎이 채 다 만개하기도 전에 누렇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목련을 볼 때, 바람에 휘날리는 벚꽃 잎을 눈으로 따라갈 때, 개나리를 구경하는 꼬마애의 눈망울을 볼 때. 그중에서도 가장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순간은 아직은 서늘한 저녁 공기를 타고 흐르는 라일락 향기를 맡을 때였다.


한창 삶과 죽음에 대해 고찰하던, 나름대로 시니컬하던 사춘기의 어느 날엔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마지막으로 맡는 향이 라일락 향기였으면 좋겠다고 일기에 썼다. 그 일기를 쓰면서 하얗고 깨끗한 옷을 입고 누워서 보라색 라일락 꽃들로 둘러싸여서 천천히 눈을 감는 장면을 상상해 봤던 것도 같다.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그때는 죽음이 단순하고 쉬운 건 줄 알았던 거지. 예고된 어느 날 눈만 감으면 나를 보고 있는 수많은 가족들 사이에서 평온히 '영원한 잠'에 드는 거라고 생각했던가보다. 그런 평화롭고 아름다운 죽음은 엄마가 돌아가실 때 얼마나 허황된 꿈이었는지 알게 됐었고.


아무쪼록 그래서(?) 올봄에는 라일락을 집에 들였다. 아파트 단지 화단에서 무지막지하게 자라는 큰 녀석 말고, 미스김 라일락이라고 이름 붙은 조그마한 품종이다. 앞에서 말한 녀석은 높이 5m까지도 자란다고 하는데 미스김 라일락은 다 자라도 높이가 1.5m~2m 정도로 작아 베란다에서도 키울 수 있다. 1940년대에 미국의 식물학자가 한국에서 발견한 품종이라고 하는데, 당시 채집을 도왔던 한국인 여성의 성을 따 '미스 김(Miss Ki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새카맣고 조그마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꽃눈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꽃눈 덩어리가 두 덩어리 정도 있는 상태로 라일락을 배송받아 화분에 옮겨 심고 해시중도 물시중도 착실히 들면서 몇 주가 지나고 나니 바깥 라일락들이 시든 타이밍에 우리 집에서는 라일락 꽃들이 새로 피어났다. 출근길에도 다가가서 코를 킁킁대고 맡고 나갈 정도로 작지만 강력한 향기가 있는 녀석들 덕분에, 주말 낮에 베란다 창문을 열어두고 있으면 바람결에 라일락 향기가 함께 쏟아져 들어온다.


애지중지 라일락을 기르느라 챗GPT에게 많은 것을 묻곤 했는데(가령 물 주기 시기라든지, 꽃 피어있을 때 식물 비료를 줘도 되는지라든지, 비료를 준다면 액체 비료가 좋은지 알갱이가 좋은지 등), 나의 질문 공세에 챗GPT가 내년에 꽃을 많이 볼 수 있는 팁까지 알려줬다. 올해 핀 꽃이 질 무렵이 되면 꽃이 핀 가지를 가지치기해줘야 하고 꽃대가 있던 자리에서 한 마디 아래를 잘라줘야 한단다. 그럼 거기서 가지 두 개가 자라나서 내년에는 꽃이 두 배로 핀다는 거다. 올해 두 송이였던 꽃송이가 내년엔 네 송이, 내후년엔 여덟 송이가 될 생각에 아직 꽃이 지지도 않은 라일락에게 가서 어딜 싹둑 잘라줘야 할지 손으로 매만져 보기도 했다.


그동안 기르던 식물에게 가지치기를 해준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데, 자르고 나면 나는 식물 특유의 풋내를 맡으면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저 해가 비추면 비추는 대로, 물이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불평 없이 꼬박꼬박 자라던 녀석들이 가지가 잘렸을 때는 '아파!'라고 강렬하게 의사표현을 하는 것 같이 느껴진 까닭이다.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인 5년 된 홍콩야자나무가 깍지벌레에게 점령당했을 때, 식초물로도 치약물로도 퇴치가 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 대부분의 가지를 잘라버린 것 외엔 가지치기를 최소화했던 이유였다.


하지만 라일락은 꼭 가지치기를 해줘야 한다니. 그래야 내년엔 꽃을 두 배로 볼 수 있다니. 그러던 차에 또다시 가지치기의 중요성을 실감하는 일이 발생했다. 지나가던 꽃집에서 눈에 밟혀 데려온 트리안이라는 식물을 어느 주말 구석구석 들여다보다가 줄기에 다닥다닥 앉은 진딧물을 발견했는데, 이 역시 가지치기를 제때 해주지 않아 생겼다는 것이다. 들여놓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새순을 쭉쭉 뻗으며 무성해진 모습에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꼬불꼬불한 줄기가 뒤엉켜 있으면 통풍이 잘 되지 않아 진딧물이 살기 이상적인 환경이 된다는 거였다.


우리에게도 가지치기라는 건 때론 귀찮아서 때를 놓치기도,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프기도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불필요하게 무성해진 감정, 다쳐가며 잡고 있던 관계, 감정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다가 불현듯 나를 끌어내리는 과거의 기억과 후회, 쓸데없는 자책들. 어쩌면 우리는 매년 봄마다 피어나는 꽃처럼,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덜어내야 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 자리엔 새로운 가지가 나고 언제나처럼 다시 꽃이, 지난해보다 더 풍성하고 향기로운 꽃이 피어날 거라고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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