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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summersea Jun 01. 2020

대학원생에게 논문이란?

'나'이지만 '나'이지 않은 것.

  논문을 작성할 때가 가장 대학원생답다. 하지만 논문을 작성할 때는 가장 '나' 스럽지 못하다. 논문 작성은 고요하고 잔잔했던 마음에 감정의 파도를 일렁이게 만든다. 너무 다양한 감정이 몰아쳐 가끔 내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었는지 잃어버릴 때도 있다.


  분노. 교수님이 정해주신 기한 안에 논문 초안을 메일로 보낸다. 다시 피드백이 올 때까지의 짧은 그 며칠은 꿈같은 시간이다. 끝난 건 없지만 끝난 기분이 들며 잠깐 휴식을 할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함을 느낀다. 주변 사람들에게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다고 소문을 내며 의자를 뒤로 살짝 넘긴다. 너무 즐겨서일까? 하루 이틀 뒤, 메일함에 숫자 일이 뜨고 첨부된 워드 파일을 여는 순간 숨이 막혀온다.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불안함의 두근두근. 대부분 교수님의 코멘트와 메모들이 넘쳐나 메모들이 펼쳐있지 못하고 접힌 상태로 나에게 돌아온다. 그럼 차분하지 못한 상태로 교수님이 작성하신 모든 글을 한 줄 한 줄 읽어본다.

  

What a non-sense! Speak loud three times. (말도 안 되는군! 세 번 크게 읽어보도록.)

Too non-professional writing. (전문가답지 않은 글쓰기.)

Wrong! (틀렸음!)

Reword (다시 적도록)

Konglish (한국어식 영어임)


옛날에 분노에 차오른 만화 캐릭터가 머리에 화산을 폭발하며 얼굴이 붉게 칠해진 모습을 본 적 있다. 내가 딱. 그런 모습일 것이다. 사실상 교수님이 작성해주신 글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내가 잘못 적었고 잘 못 적었다. 하지만 처음 글을 읽는 순간만큼은 분노에 차오른다. 내가 애지중지 작성한 모든 단어와 문장들이 폭탄 공격을 받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우울. 내가 과연 교수님이라는 존재 없이 논문을 작성할 수 있을까 스스로 종종 질문한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대답이 머리에 잠깐이라도 스친 적이 없다. 급격히 우울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논문도 스스로 작성하지 못하면서 어쩌자는 걸까? 교수님 아래에서 작성한 글만 보고 나를 채용한 다른 연구자가 처음 받은 내 글을 보면 얼마나 속은 느낌일까? 박사가 내 길이 맞을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스스로 계속한다. 하지만 또 새로운 기한이 있기 때문에 이런 우울한 상태로 논문 초안을 다시 작성한다.


 착각. 마음을 잡고 다시 논문 초안을 작성하다 보면 저번보다 괜찮아 진 나의 글에 사랑에 빠진다. 기가 막힌 단어 선택! 자연스러운 문장의 흐름! 교수님 코멘트 반영 후 탄탄해진 나의 문단! 이보다 완벽할 수는 없다!!! ... 라고 착각에 빠진다. 기쁜 마음으로 다음 날 다시 나의 워드 파일을 열어보면 물음표가 뜬다. 어제의 나란 녀석 뭘 적은 거지? 어제 내가 갑자기 너무 천재적으로 생각해서 지금 바보가 된 내가 이해를 못 하는 걸까 의문을 품기도 했지만, 아닌 걸 안다. 결국, 착각에 빠져 작성한 글은 드래그하여 삭제 버튼을 누른다. 안녕 나의 착각들. 다시는 만나지 말자.


 기쁨. 교수님 그리고 연구에 같이 참여한 공저자들과 수 없는 초안의 오고 가고를 거치면 끝이 없을 것 같던 논문도 결국 완성이 된다. 석사 때 논문 작성을 끝내고 학술지에 투고를 한 날은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나의 첫 논문 투고였다. 밤늦은 시간으로 기억한다. 교수님과 최최최 진짜 최종 파일을 메일로 주고받고 교수님께서 제출 버튼을 누르셨다. 그리고 연구실 카톡방에 내가 어느 학술지에 투고했으니 행운을 빌자고 글을 올리셨다. 나는 당장 교수님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슬램덩크에 강백호와 서태웅이 하이파이브를 치는 명장면같이 교수님과 악수를 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너도 수고가 많았다!!!"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기쁨의 순간이다. 몇 달 뒤 학술지 평가위원과 담당자의 마지막 코멘트 반영 후 논문이 학술지에 기재되면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나의 논문을 완성하기까지 몇 개의 초안을 작성했는지 헤아려본 적 없다. 다만 작성 논문 폴더에 100개 이상의 초안 파일이 있는 건 확인했다. 파일 하나하나마다 얼마나 다양한 감정들이 담겨있는지 상상할 수 없다(사실 기억하고 싶지 않다). 정말 논문 한 편은 '나'이지만 '나'이지 않은 그런 오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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