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isummersea May 26. 2020

대학원생의 200만 원 밥상

힘들 때 생각나는 집밥.

  나는 음식을   모른다. 부모님과 함께   요리를 도와준  있지만 해봤자 입맛이 별나 음식  맛보기가 다였다. 가끔은 그마저도 귀찮아 엄마가 부엌에서  소리로  이름을 부르면  있다가도 거실 소파에 누워 귀찮다며 칭얼거렸다. 엄마는 화낸 적이 없었다. 그저  손에 음식을 다른  손은 음식이 떨어질까  음식을  손을 받치며 종종걸음으로 나에게 와주었다. 입맛은 별나지만, 간을   나의 대답은  평범했다. 맛있다, 짜다, 혹은 뭔가 부족하지만 뭔지 모르겠다는 정도의 대답이었다.  평범한 대답에도 엄마는  진지하게 받아 들었다. 맛있다고 하면 엄마의 어깨는 정수리 끝까지 올라가 본인이 요리를 너무 잘한다며 즐거워하셨고, 짜다고 하면 밥이랑 먹으면  맞는다고 하셨다. 나는 옆에서 계속 짜다고 핀잔을 줬지만, 나중에 밥과 먹으면 정말 찰떡인 간이었다. 그럼 다시 엄마의 어깨는 정수리 끝까지 올라갔었다. 뭔가 부족하다고 하면 엄마는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맛을 보며 알아냈었다.  대단한 엄마다. 이렇듯  장금이 엄마가 있어 타고난 요리 솜씨가 있을   알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음식을   모른다.


  나는 칼질이 서툴다. 어렸을  칼질이 서툴고 칼이 위험하여 감자채칼로 과일 껍질을 깎아 먹었다. 그래서 사과 하나를 먹으려면 칼질을 100번은 넘게 해야 했다. 100 칼질  손보다  사과를 잡지 못해   떨어뜨려 멍든 사과를 먹는 것은 당연한 일상이었다. 엄마처럼 사과를 빙빙 돌려가며  줄로 껍질을 깎는 것은 상상할 없었다. 하지만 과일 껍질을  깎아 먹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후로부터 복숭아와 키위같이 껍질에 털이 있는 과일이 아닌 이상  씻어서 껍질째로 먹었다. 그래서 그런가...  여전히 칼질이 서툴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쯤, 엄마에게  나에게 요리나 칼질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물어봤었다. 엄마는 나중에는 하기 싫어도 해야  때가 있을 것이라고 지금부터 하지 말라고 하셨었다.


  아무 준비 없이 상경을 해버렸다. 대학원에 들어오면서 자취를 시작했다. 요리의 ''자도 모르오. 칼질은  말이냐. 자취방에서  먹을  있는 것이 없었다. 당시 전화 공포증까지 있어 음식을 시켜 먹지도 못했다. 결국 큰마음을 먹고  슈퍼에서 식빵과 계란을 샀다. 나의  자취 요리는 '식빵 계란 토스트'였다. 계란을 젓가락으로 휘휘 풀고 우유를 조금 넣은 다음 식빵 2개를  잠기게 넣었다. 그리고 가장 작은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새끼손톱만큼 짰다 (여전히 올리브유를 얼마큼 짜야하는 건지 모르겠다). 살짝 프라이팬이 뜨거워질 때쯤 식빵을 올리고 성질을 참지 못해 계속 뒤집어가며 갈색빛이  때까지 반복했다. 그릇에 식빵 2장과 과일을 올리고 사진을 찍어 가족 카톡방에 공유했다. 바로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네가 그런   먹다니 대견하여 눈물이   같다고 했다. 하지만 2년이 넘는 자취생활  한식을 만들어  적이 없었다.


  나는 피부가 좋지 못하다. 어렸을 때는 아토피가 심했고 성인이  후에는 아토피가 화폐성 습진으로 변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증상이 심해지는데, 대학원 생활을 하니 습진이 점점 심해져  크기가 손만큼 커졌었다. 스트레스를 장기간으로 받으면 진물이 흘러내려 손수건으로 습진 부위를 감싸고 다녀야 했다. 속상했던 엄마는 바깥 음식을 먹으면  좋을  같다며 밥과 반찬을 택배로 보내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김치볶음밥, 콩자반, 미역국, 연근 무침, 등등... 식사 시간마다 냉장고와 냉동고에서 음식을 꺼내 데워 먹었다. 부모님 아래에 있을  당연했던 집밥이 이렇게 소중한 거였다니 새삼스럽게 다가왔었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일이   풀리고 힘들고 우울할 때는 엄마  생각이 났다. 결국 보고서와 논문으로 정말 바쁘고 힘든  나는 참지 못하고 기차표를 끊어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나."

  "???... 누구세요?"

  "나."

  "네가 왜???"

  "집밥 먹으러 왔다. 밥 줘!!!"


  엄마는 토끼눈이 되어 아빠를 불렀다. 당황한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아빠는 안방에서 헐레벌떡 나왔고, 나를 보자마자 비상구 사람 포즈처럼 얼어붙어 딱 한마디만 하셨다.


  "뭐고....?"

  

  당황한 엄마 아빠를 보는 것은 즐거웠다. 계속되는 질문들을 피하며 밥을 달라떼를 썼다. 엄마는 아빠랑 둘이서만 밥을 먹어 반찬이 부실하다면서 냉장고에서 반찬을 끝도 없이 꺼내 줬다. 반어법인가 생각이 들었다. 식탁에  명이 앉아 나는 밥을 먹으며 즐거워했고 엄마 아빠는 그런 나를 걱정의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내가 대학원 생활이 힘들어 때려치우고 내려온 것일까 걱정하였을 것이다. 계속되는 걱정스러운 눈빛이 부담스러워 결국 정말 집밥을 먹으러  것뿐이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제야 엄마 아빠의 얼굴에도 미소 번지며 매일 같이 전화를 하자면서도  못한 대화의 장을 열었다.


  여섯 끼니. 집에서는 일하기가 힘들어 집 주변 카페에서 일했다. 하지만 식사 시간이 되면 칼같이 집으로 들어와 집밥을 챙겨 먹었다. 2일 동안 총 6 끼니를 먹었다. 지독한 삼식이로 지냈다.

24시간 사골처럼 끓어 미역이 흐들흐들한 미역국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한 빨간 생선

시원 고소한 콩국수

아삭아삭 한 오이가 필수인 짜장밥

꼬들꼬들 전복장

나의 가장 최애 김치볶음밥

매번 밥을 먹을 때마다 가족 카톡방에 사진을 찍어 올렸다. 결국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는 언니의 인스타에 내가 보낸 사진과 함께 아래와 같이 적혀 는 글을 보았다:


  "기차 타면 집에서 밥 먹을 수 있는 박사생이 부러웠던 밤. 비행기표 값만 200만 원. 24시간 넘는 강행군. 그럼 저 밥 먹을 수 있다."


그렇다. 대학원생 신분으로 난 200만 원어치의 밥을 먹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질문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