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이에서 보낸 열흘
오후의 뜰
아침산책을 마치고 나면 다음은 방갈로 뒤뜰에서 한갓진 오후를 보낼 차례. 숙소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 보면 중심가로 들어서기 일보 직전에 과일가게가 하나 있는데, 때깔이 참 고와서 며칠 동안 눈독을 들이다가 오늘 아침산책길에 드디어 20바트를 주고 파파야 한 봉지를 샀다. 빠이에 있는 동안은 뭐든 한 봉지에 10바트, 20바트여서 가격에 무뎌졌었는데, 한국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빛 고운 파파야 한 봉지가 천 원도 채 하지 않는다. 솜씨 좋게 깎은 파파야 한 조각을 입에 넣으니, 반짝이는 오후의 햇살을 통째로 머금은 것만 같다.
오늘 오후는 한량처럼 보내리라 결심했건만, 밀린 일거리들이 어서 노트북을 좀 켜라고 아우성이다. 뒤뜰 탁자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아침 내내 고영희님이 낮잠을 자던 방석 위에 걸터앉아 신선이 부채질하듯 설렁설렁 타자를 친다. 이런 속도는 한국에서는 스스로에게 절대 용납하지 않았던 것인데. 따뜻한 여름의 볕 속에 살랑이는 바람이, 조용히 귀 기울이면 바람결에 솨아아 몸을 흔드는 푸르른 잎사귀들이, 이따금 푸드덕 논 위로 날아오르는 작은 새들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내게 말을 건다. 이 작은 뒤뜰에서 보내는 지금 이 오후만큼은, 우리와 같은 속도로, 천천히 가자고. 느릿느릿 타자를 치는 사이사이 베어 문 주황색 파파야는, 버터 같은 부드러움 속에 신선함과 달콤함이 가득했다.
맨발의 감각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나섰다. 빠이에 온 지 어느새 닷새째. 아침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뙤약볕 속에 산책 겸 식당까지 걸어가고, 저녁엔 자전거를 타고 뜨겁던 낮의 열기가 기분 좋게 식은 바람 속을 씽씽 달려 밥을 먹을 식당에 간다. 오늘은 저녁식사 후 해 지기 전에 꼭 할 일이 있어서 평소보다 시간여유를 조금 더 갖고 길을 나섰다.
자전거 페달을 부지런히 밟아, 강을 건너, 여태껏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동네까지 왔다. 빠이는 대중교통수단이 마땅치 않은데, 자전거가 있으니 확실히 기동력이 좋다. 한국에서부터 미리 지도에 점찍어두었던 채식식당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바로 옆 구멍가게를 좀 기웃거리다가, 이크, 해 지기 전에 어서 저녁을 먹어야지 싶어 후다닥 걸음을 옮겼다.
빠이의 채식식당들은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 역시 그렇다. 한국에서야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식당들이 흔하고도 흔하지만, 이곳에선 그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맨발로 땅을 디디며 걷는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지구와 연결되어있는 감각. 이곳에서 자연이 만든 음식들을 먹는 동안에는 잠시나마 맨발로 그 감각에 몸을 맡겨보라는 뜻은 아닌지.
보라색 말린 꽃잎을 거품 속에 살포시 띄운 코코아 한 잔과 캐슈넛버터와 꿀을 곁들인 비건글루텐프리와플을 주문했다. 큼직한 와플은 쌀가루로 만들어서 속은 쫄깃쫄깃하고, 겉은 바삭바삭하다. 게다가 이곳도 채식버터를 직접 만드는 듯, 공산품인 캐슈넛버터와는 맛이 확실히 다르다. 인공첨가물이 없는 담백한 고소함과 식물성기름이 따로 분리되는 현상 없이 부드러운 질감에, 전전날 주문했던 캐슈넛버터와도 다른 맛!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있어 공산품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덕분일까, 빠이에선 그 어느 식당을 가도 ‘그 집만의 비법’을 담아 음식을 만드는 듯하다.
‘여긴 무조건 또 와야지’ 결심하며 부스러기 하나 없이 와플을 싹싹 해치우고 나니, 오늘도 어김없이 등장하신 고영희 님. 손님들로 복작대는 식당 안을 이곳저곳 여유롭게 돌아다니며 ‘구역점검’에 여념이 없다.
균형과 덜어냄
우거진 나뭇가지들에 둘러싸인 고즈넉한 식당. 멍하니 앉아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해가 지기 전에 다음 목적지로 떠나야한다. 화장실에 가느라 뒷마당으로 나왔더니, 직접 재배하는 야채 모종들이 선반에 가득하다. 오토바이에 실어둔 바구니는 ‘빠이답기’ 그지없다. 화장실에 앞엔 대나무 아래에 따로 자그마하게 손 씻는 공간을 마련해두었다. 치앙마이와 빠이에선 제법 흔한 듯한 야외 세면대. 대나무잎사귀를 흔드는 바람을 쐬면서 손 씻는 기분이, 별 것 아닌데 참 좋다.
아기자기한 야외의 세면대도, 오토바이에 실어둔 바구니도, 식당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전등갓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모두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다. 이 작은 산골마을의 풍경이 어딜 보아도 한 폭의 그림 같은 이유는, ‘자연과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균형’과 ‘덜어냄’에 있지 않을까. 이곳 사람들이 그저 무심히 놓아둔 그 모든 것들에 정이 가는 이유는, 이곳의 삶이 도시가 잃어버린 인간의 본연의 모습들에 한 걸음 더 가깝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해질 무렵 한층 더 가까워지는 하늘
식당을 나오니 정수리 바로 위까지 붉게 지는 해의 융단이 내려앉았다. 태양은 매일 뜨고 지는데, 해질 무렵이 되면 항상 마음속에 어딘가로 떠나는 것처럼 설렘과 그리움이 뒤섞인 묘한 심상이 일렁인다. 터벅터벅 노을 속을 걸어 식당 맞은편 사찰로 향했다. 입구를 지나자마자 시작된 언덕길 양옆엔 옹기종기 민가들이 자리하고 있어 사찰이 아니라 어느 동네로 저녁산책을 나온 것 같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마침내 어깨의 짐을 내려놓듯, 낮은 지붕마다 지는 해가 털썩 걸터앉았다. 낮의 푸른 하늘은 그저 멀기만 한데, 하루 끝에 저무는 태양은 인간의 삶에 이리도 바짝 다가와 저 하늘 꼭대기와 복잡한 인간세상이 실은 서로 그리 멀지 않다고 읊조린다.
태양이 비추는 동안 치열하게 각자의 삶에 열중하던 것들이 이제 모두 그만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시간. 곧 돌아올 주인을 기다리는지, 마당마다 강아지들이 털썩 주저앉아 지는 저녁노을을 관조한다.
언덕 끝에 다다르니 두 마리 뱀이 구불구불 호위하는 가파른 계단이 있다. 이 계단만 올라가면 그 유명한 ‘언덕 위의 큰부처님’에 닿겠구나! 심기일전하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계단을 밟아 올라간다. 마침내 편평한 땅을 밟고 서서 ‘다 올라왔다!’고 한숨을 놓은 것도 잠시, 이윽고 나타난 또 다른 계단. 내가 보고 싶은 부처님은 아무래도 이 까마득한 계단을 한 번 더 올라가야 있나 보다.
전부 몇 개인지 쉽사리 세어볼 수조차 없는 길고 긴 계단의 시작점엔 거인처럼 큰 개 형상의 석상 두 개가 늠름하게 버티고 앉아 저 위에 모셔둔 불상을 호위하는 중이다. 빠이의 거리 곳곳에서 태연하게 낮잠을 자는 덩치 큰 개들은, 이 석상을 만들던 시절에도 이곳 사람들과 함께였었겠구나. 사람들은 개들에게 안락한 잠자리와 먹을 것을 주고, 개들은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든든히 지켜주고. 까마득한 시절에 서로 굳게 맺은 신뢰를, 이 작은 산골마을은 아직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다.
끝이 바로 저 앞에 보이는 계단을 오를 때는 그저 빨리 올라가고 싶었는데. 끝까지 올라가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긴 계단을 마주하고 나니 ‘빨리 해치우고 싶은 마음’은 저절로 내려놓아진다. 저 끝에 언제나 닿으려나. 가다 보면 언젠가 닿겠지. 심호흡을 하곤 빼곡한 계단을 하나하나 천천히 디디어 올라간다.
살아도 살아도 끝없는 오르막길인 것만 같은 인생. 험난한 언덕을 언제 가야 다 오를 수 있는지, 그 너머엔 무엇이 있는지, 사는 동안엔 결코 알 수 없기에, 옛사람들은 부러 이리도 긴 계단을 짓고, 그 꼭대기에 거인 같은 불상을 세우며, ‘알 수 없음’에서 비롯되는 무수히도 많은 인간사의 번뇌들을 극복하려 애썼나 보다.
하루하루의 경험들만으로는 결코 다 알 수 없는 인생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를, 그것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굴러가는지,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손으로 더듬으며 보이지 않는 형체들을 하나하나 그려내고 그것들을 모아모아 겨우 전체를 상상해내는 과정처럼, 아무리 조바심을 내어도 결국 일생의 모든 순간들을 다 직접 살아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들을, 그로인한 번민을, 그래도 극복해내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 혹 이 길고 긴 계단은 아닌지.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은,
들쭉날쭉한 마음을 밟아 내려가는 것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며, 마음에 차오른 삶의 번뇌들을 거꾸로 하나하나 밟아 내려간다. 들쑥날쑥 파도치는 감정들을, 뾰족하게 솟아오른 불안을, 한 걸음 또 한 걸음 밟아서 편평하게 만든다. 한 계단, 또 한 계단,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은, 결국 심연의 가장 고요한 낮음에 가 닿는 것.
마침내 긴 계단이 끝나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마음을 어지럽히던 크고 작은 파도들이 모두 잦아들고, 탁 트인 전경을 따라 내 안에도 차분히 수평선이 떠올라있었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마지막 걸음을 걸어 불상 앞에 다다르니, 부처는 그저 평온한 표정으로 저 아래 범사를 내려다볼 뿐이다.
신발을 벗고 불상 앞에 가만히 앉아있으니, 시간은 그저 강물처럼 굽이굽이 흘러 멀어져간다. 인생이란 무릇 그 강물 위에 떠가는 뗏목에 불과한 것을, 무얼 그리 애쓰며 붙잡아두려 하느냐고, 부처가 묻는다.
지금은 대답할 필요 없다는 듯, 이윽고 저 하늘꼭대기에서부터 하늘하늘 밤의 커튼이 춤을 추며 내려온다. 까맣게, 더 까맣게, 저 긴 계단 아래 무수히 많은 지붕들을 물들이며 진해지는 밤빛을 따라서, 내 머릿속과 마음속도 어느새 까만 투명함으로 비워져간다.
이 불상에 오르는 길이, 내가 세 시간여를 구불구불 험한 산길을 달려 빠이에 온 이유였구나.
내일도 다시 이 계단을 밟아 오르리라 결심하곤 어둑어둑 밤에 잠겨가는 계단을 다시 하나하나 밟아 내려왔다.
밤은 모락모락
식당 앞에 자전거를 세울 때부터 눈여겨보았던 구멍가게에서 바나나칩 한 봉지를 샀다.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식당을 겸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음식들을 파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자전거를 타고 까만 밤을 달리고 또 달려 마침내 돌아온 숙소. 따끈한 물에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내고 차 한 잔을 끓여 뒤뜰이 내다 보이는 창문 앞에 앉았다.
바나나를 얇게 썰어 튀긴 스낵은 바삭바삭하고 단맛이 전혀 없어 흡사 감자칩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보다 기름기가 적고 좀 더 고소한 맛이 나는 것이 매력적이다. 한국엔 바나나를 동그랗게 잘라서 설탕을 첨가해 튀긴 달콤한 스낵이 흔한데, 내 입맛엔 담백한 빠이식 바나나칩이 훨씬 더 맛있게 느껴진다. 똑같이 바나나를 튀긴 것뿐인데도 집집마다 조금씩 맛이 달라서 요즈음 귀갓길에 바나나칩이 보이면 자전거를 멈추고 한 봉지 사서 자기 전에 차와 함께 와그작와그작 맛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풀벌레 우는 소리 들려오는 밤에 따끈한 차 한 잔 호로록 기울이며 바삭바삭한 바나나칩 한 봉지 곁들이니, 여기가 천국. 뒤뜰 구석에서는 서늘한 빠이의 밤공기 속에 모락모락 모기향이 피어오르는 중. 낮에 온몸에 흠뻑 쬐었던 따뜻한 햇볕과 부지런히 두 눈에 담아두었던 정겨운 거리풍경들을 땔감으로 지피며,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보고 싶은 풍경들을 네모난 창문 속 까만 도화지 위에 뭉게뭉게 한가득 띄워본다.
*숙소정보 <Kirina Wellness in the Val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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