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친구들 가득한, 빠이에서 보낸 열흘
무거운 그만큼, 인생의 지지대가 되는
빠이의 네 번째 아침. 어김없이 산책을 나섰다. 익숙해진 논두렁길을 걷는데, 오늘도 황소 두 마리가 정답게 서로 붙어있다. 저 녀석들, 사이가 어지간히도 좋은가 보다, 생각하는 동시에 머릿속에 절로 시 한 구가 떠올랐다.
‘황금들판의 저 황소들 암수 서로 정다운데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원문은 ‘훨훨 나는 저 꾀꼬리’이고, 매일 같이 서로 붙어있는 저 황소들이 암컷과 수컷인지는 확인되지 않은 바이며,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이 시를 지은 화자의 정서에 그리 공감하는 것도 아닌데. 학창시절 배운 시가 2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막힘없이 술술 떠오르는 것에 잠시 신기했다.
얼마 전 고등학교동창과 ‘우리가 스무 살까지 읽은 책들이 지금까지도 삶을 간신히 지탱해준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난 그 시절엔 스스로 ‘책을 많이 읽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었지만, 돌아보니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교내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기 시작해서 수업시간이나 야자시간에 몰래몰래 읽다보니 3학년 1학기가 되었을 땐 300권 남짓의 장서를 갖춘 작은 도서관에 더 이상 새로 읽을 책들이 없었으니, ‘수업이 지루해서 딴짓할 생각만 하던’ 십대 후반의 몇 년 동안이 인생최고의 ‘독서황금기’였던 것 같다. 타이밍이 딱 알맞게도, 도서관의 책을 다 읽고 나니 수능이 코앞에 닥쳐서 그간 등한시해왔던 교과공부를 해야 했는데, 그냥 집히는 대로 읽었던 책들이 나도 모르는 새 차곡차곡 밑바탕에 지지대를 쌓아주었는지, 예전엔 지루하기만 했던 교과서의 내용들이 과목을 불문하고 읽는 족족 명료하게 머릿속에 입력이 되어서 ‘매일 꾸준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어쨌든 무언가를 읽는 시간들이 확실히 지적인 능력을 향상시켜주는구나’하고 느끼기도 했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책을 읽기는 했지만 거의 매일 책을 읽었던 고등학생 때만큼은 아니었고, 서른을 넘기면서는 관심이 가는 주제의 사회과학서적들만 들여다볼 뿐 문학은 거의 읽지 않게 되었으며, 마흔을 넘기자 아예 책을 사는 빈도자체가 급격히 줄어들어, 요즘은 정말로 ‘예전에 읽은 책들로 겨우 버티는’ 신세다. 물론 ‘읽는 행위’는 디지털매체를 통해 지금도 매일매일 하고 있지만, 핸드폰으로 읽은 문장들과 종이책을 직접 넘기며 읽은 문장들은 뇌리에 새겨지는 또렷함이 전혀 다른 것 같다. 디지털에는 항상 너무 많은 읽을거리, 볼거리들이 넘쳐서, 두뇌도 그것들을 대할 때면 ‘저장공간이 꽉 찬 컴퓨터’처럼 ‘간직할 것’보다는 ‘얼른 휴지통에 버릴 것’부터 솎아내는 느낌이랄까.
빠이에 오니, 다시 책이 읽고 싶어진다. 빠이에 종이책 한 권 가져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항공사가 허용하는 무게에 맞게 석 달의 짐을 꾸리는 동안, 챙겨놨던 몇 권의 책들은 제일 먼저 버려지고 말았다. 어디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다음에 ‘늙어서 살고 싶은 곳’으로 떠날 때에는 꼭 책 한 권 잊지 말고 챙겨야겠다.
마음에 차곡차곡 양식을 쌓으며
하루, 또 하루를 보낼수록 천천히, 더 천천히 걷게 되는 빠이. 걸어가며 무심코 지나치는 풍경들 속에서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이, 가장 미완이었던 시절에 마음에 차곡차곡 쌓았던 문장들에 뿌리 내리고 있음을 문득 깨달은 아침. 한 장, 한 장, 넘겨볼 수 있는 책이 당장 손에 없음은 아쉽지만, 책장을 넘기듯 거리 곳곳의 불상들을 마주하며, 또 다른 마음의 양식을 쌓아본다. 쌓고 또 쌓으면 그것들이 언젠가는 저 너른 바다가 되어, 번잡한 마음에 차분한 수평선이 되어줄 것을 기대하며.
이토록 가까운, 자연의 마법
아침을 먹을 식당에 도착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여름의 꽃송이들이 화사하게 손님들을 맞이하는 <Om Garden Cafe>. 파란 하늘 아래 붉은 빛을 더욱 뽐내는 무성한 꽃나무 아래를 지나, 서로 얽히고설키며 우거진 나뭇가지들 사이를 걸어들어 가려니, 꼭 밀림 한가운데 숨겨진 마법의 동굴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다. 식당 곳곳에 꽃처럼 피어난 여름의 빛은 마음을 한없이 설레게 하고,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도마뱀 한 마리는 마치 ‘여기가 바로 그 마법세상 맞아!’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과일과 뮤즐리를 넣은 요거트보울과 구운 캐슈넛과 페타치즈를 얹은 가든샐러드를 주문했다. 빠이에서 주문한 첫 요거트보울, 치앙마이의 요거트보울에 으레 놓여있던 꽃 한 송이 대신에 반으로 쪼갠 작은 포도 한 알이 소박하게 접시 한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다. 바나나, 망고, 용과, 수박. 탁자 위에 어른거리는 여름의 빛이, 접시 속의 과일들 모두 나의 품에서 태어나고 자랐노라고 말한다.
샐러드에 올린 페타치즈와 요거트 모두 직접 만든 담백하고 자연스러운 맛. 같은 샐러드를 주문해도, 집집마다 들어가는 푸른 잎사귀들은 천차만별. 하나하나 맛을 보면, 모두 다른 개성과 매력을 갖고 있다. 자연 본연의 다양성이 그대로 살아있는, 빠이의 샐러드 한 접시. 치앙마이의 음식들이 ‘치앙마이다웠다’면 빠이의 음식은 ‘빠이답다’. 개중에서도 빠이의 음식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캐슈넛은, 그야말로 빠이의 낮에 가득한 온화한 열과 빛을 접시 위에 그대로 옮겨 담은 것만 같다.
그냥 같이 살아가요
‘또 와야지’ 결심하면서 식당을 나오자마자, 까만 개 한 마리와 마주쳤다. 연보라색 뚝뚝 앞을 서성거리던 개는, 이윽고 한 여성이 뚝뚝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자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올라탔다. 사람과 개를 나란히 싣고서, 뚝뚝은 곧 경쾌하게 목적지로 출발했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은 풍경들이, 빠이를 걷다 보면 곳곳에서 펼쳐진다.
오늘은 중요한 할 일이 있다. 치앙마이로 돌아가는 버스표를 사는 것. 장기여행자들은 여행 첫 며칠간 머물 숙소만 미리 예약해두고 현지에 와서 직접 장기숙소를 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하면 훨씬 저렴하다고 한다- 나는 불확실성 속에서 며칠 동안 발품을 파는 것보다는 안정성에 비용을 치르는 쪽을 택했다. 대신에 한국에서 미리 지도를 면밀히 살펴보고 ‘살아보고 싶은 지역’을 선정해서 -하이야, 올드타운, 빠이, 창푸악(은 재래시장인 타닌시장 인근지역과 현대식 쇼핑몰인 마야몰 인근지역으로 각각 나누었다), 창클란- 총 6개의 숙소를 여행시작 전에 모두 예약해두었다.
그런데, ‘현지에서 즉흥으로 머물 곳을 결정하기’도 한 번쯤은 해봐야지 싶어서 지금 머물고 있는 <Wellness in the Valley>의 7박 이후의 3일을 정해진 일정 없이 비워두었다. 만약 빠이가 마음에 들면 비워둔 3일을 그곳에서 보내거나, 아니면 빠이 인근의 다른 지역에 가보거나, 그도 아니면 치앙마이로 돌아와 올드타운에서 3일을 보내야지, 했던 것이 여행을 떠나오기 전의 계획.
치앙마이에 미리 숙소를 예약해두지 않았더라면, 빠이에 장기숙소를 구해서 3일이 아니라 3주는 더 머물렀을 텐데. 왜 빠이에 ‘배낭여행객들의 무덤’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그 이유를 실감하며, 아쉽게 닷새 후에 출발하는 버스표를 샀다. 지금 묵는 숙소가 마음에 들어 3일 더 뼈를 묻고 싶지만, 예약이 다 찼다고 해서 나머지 3일 동안 지낼 곳을 이제부터 알아봐야 한다. 빠이는 작은 산골마을이지만, 전 세계에서 꾸준히 여행객들이 찾아오는 만큼 다양한 선택지의 숙소들이 가득하다. 개중에 설마, 내 한 몸 3일 뉘일 곳이 없을까.
중심가엔 아기자기한 규모에 세련된 감각의 현대적인 호텔들이 많다. 하지만 여기도 저기도 다 괜찮아는 보이는데, 딱히 마음이 끌리는 곳이 없다. 걸음은 자연스레 중심가를 벗어나 ‘익숙한 시골길’로 향하고. 숙소 구하기는 뒷전으로 한 채, 어느새 고향처럼 익숙해진 길을 터벅터벅 걸어간다. 하얀 양말을 무릎까지 곱게 올려 신은 누렁이는 천막 아래에서 한낮의 여유를 만끽하고, 도로변에 죽 늘어둔 좌판에서는 샹들리에처럼 커다란 바나나 한 송이를 20바트-약 800원-에 파는 중. 한국에서 흔히 파는 것과 같은 작은 송이 바나나는 단돈 10바트다.
매일 지나치는 잡화점 앞에는 오늘도 고양이, 강아지들이 나와 있다. 해질녘에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골목길에서 종일 술래잡기나 땅따먹기를 하고 노는 동네아이들처럼. 고등어고양이가 차려입은 노란색 때때옷이 그새 꼬질꼬질한 것을 보니, 요 며칠 어지간히도 뒹굴고 놀았나 보다.
‘얘, 고등어야, 너 옷 좀 빨아야겠다.’
말을 걸었더니, 냅다 내 다리사이로 돌진해 흙먼지 묻은 옷을 열심히 비벼대며 인사를 하는 고등어고양이. 이내 ‘인사는 이 정도는 다 했다’ 싶은지 바닥에 냅다 드러누워 버린다. 흙먼지 가득한 도로변에서 태연하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고등어. 아이고, 요렇게 애교가 많으니까 옷이 다 더러워지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발딱 자리에서 일어난 고등어는 내 다리에 몸을 스윽- 스치곤 따라오라는 듯 꼬리를 바짝 세우고 앞장을 선다.
‘이리 와봐, 내가 내 동생 소개해줄게!’
시암의 ‘말 많은’ 고양이들
고등어고양이를 따라간 곳엔, 물병보다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인형처럼 앉아있다. ‘어머나, 너 혹시 인형이니?’ 말을 걸었더니, 스르르 눈을 뜬다.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옅은 푸른색 눈동자와 까맣게 탄 얼굴, 까만 귀, 까만 양말, 까만 꼬리... ‘샴고양이’다!
‘이 산골에도 품종묘들이 제법 많네. 혹시 여기도 한국처럼 펫샵에서 분양받아 키우던 고양이를 한적한 산골에 와서 유기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 찰나, ‘태국’의 옛 이름이 ‘시암Siam’이라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샴고양이가 아니라 ‘시암Siam고양이’였구나!’
학창시절에 영어 다음으로 배운 외국어가 프랑스어인데, 고양이를 프랑스어로는 ‘chat’라고 쓰고 ‘샤’라고 발음한다. 그것 때문에 나는 ‘샴고양이’가 프랑스나 유럽의 어느 지역에서 온 품종일 거라고 은연중 생각했었나 보다.
태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토종’ 샴고양이는 애교도 많고, 야옹야옹 말도 많고, 집사와 항상 붙어있고 싶어 해서 너무 오래 혼자 내버려두면 우울증을 앓기도 한다는데. 고양이들이 당연하게 집사들의 일터에까지 따라 나와 밀착하여 살아가고 있는 태국의 풍경들을 보니, 태국토종인 샴고양이들이 인간과 늘 함께하고 싶어 하는 것은 태국사람들의 일상 속에 늘 깊숙이 함께 해온 그들의 지난날 동안 자연스레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인 것 같다.
고양이는 아기일 때 엄마고양이에게 의사표현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울음소리를 내는 것을 제외하면 오직 인간에게만, 소통하기 위해서, ‘야옹’소리를 낸다는데. 당연하다는 듯 사람과 고양이가 종일 붙어 함께 생활하는 치앙마이와 빠이의 일상들을 들여다보니, 태국토종인 샴고양이들이 ‘유전적’으로 말이 아주 많은 것은, 태국사람들이 긴 역사 동안에 그들을 자연스레 일상의 모든 순간에 들여놓고서 ‘인간은 항상 고양이와 소통하고 싶어 한다’는 두터운 신뢰를 심어주어 만들어낸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뽀얀 우윳빛 털코트를 입은 아기고양이는 -샴고양이는 자라면서 털색깔이 더 진해지고, 온도에 따라서도 그 빛깔이 변한다고 한다- 곧 고등어형아를 따라서 갖가지 흥미로운 물건들이 가득한 잡화점 안으로 탐험을 나섰다. 개구쟁이조카들을 보는 기분으로 얼마간 고양이들을 지켜보다가 잡화점을 떠나 모퉁이를 도는데, 고등어고양이 한 마리가 나와 걸음 맞춰 나란히 모퉁이를 돈다. 눈이 마주치자 ‘내가 널 따라가는 게 아니고, 네가 날 따라오는 거야’라는 듯 빤히 쳐다보는 고양이. 어랏, 방금 전까지 잡화점에서 놀던 녀석인데!
‘난 사원 가는 길인데, 인간 너도 같이 갈 거면 따라 오구.’
고양이 뒤를 따라 터벅터벅 길을 나섰다. 걷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사원을 둘러싼 길. 담장 위에 정성들여 석상을 조각해둔 사람들의 마음도, 지금 나와 같았을까.
날 사원 안으로 인도한 고등어고양이는 잠깐 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름드리 자라난 나무들을 지나 홀로 물가로 향했다. 맑은 물엔 오리떼가 잔잔히 파문을 일으키며 헤엄쳐 가고, 들릴락 말락 하는 물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본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유유히 흐르는 물은 번잡한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 준다.
곧 이어 닿은 들판엔 황소 두 마리가 여전히 사이좋은 한 때를 보내는 중. 저 멀리 보이는 방갈로들에, ‘집에 돌아왔구나’하는 편안함이 잔잔한 물결처럼 마음속에 번진다. 오늘도 숙소 입구엔 정다운 동물친구들. ‘얘들아, 나 다녀왔어!’하고 인사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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