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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햇살 Nov 30. 2024

우리 같이 놀자!
노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빠이의 동네친구들


빠이에서도 냥국심사는 필수


짧은 아침산책으로 숙소 주변 지리를 대강 파악했다. 저 멀리에 방갈로가 보이기 시작해서, 핸드폰 지도를 끄고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무성한 가지는 하늘을 향해 자라고, 가지 끝에 피어난 꽃은 붉게 영글고, 열매는 익을수록 다시 땅을 향한다. 아무도 없는 길을 따라 걸으며, 밤송이를 닮은 열매들에 ‘너도 밤나무니?’ 말도 건네고, 땅에 떨어진 기다란 콩깍지가 뱀인 줄 알고 기겁도 하고. 좁은 논두렁길을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번잡하던 마음이 탁 트인다. 



걷다 보니 방갈로 뒤편 테라스에 닿았다. 먼 산을 바라보며 쭉쭉 기지개를 펴고 있는데, 푸릇푸릇 새순을 틔운 논 한 가운데, 얼룩무늬 주머니 하나가 뚝 떨어져있다. ‘설마, 고양이!?’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고양이가 뒤를 돌아본다. 그러더니, 망설임 없이 나를 향해 씰룩씰룩 걸어온다. 


아유, 어디 갔다가 이제 와? 냥국심사도 안 받고!


‘이 방에 새로 온 손님이셔? 그럼 냥국심사부터 해야지, 아침부터 어딜 그렇게 쏘다녀?’


꼬리가 짧둥한 고등어고양이는 ‘벌써 친구들한테 이야기 다 듣고 왔다’는 듯 거침없이 내게 돌진해 몸을 이리 비비고 저리 비비더니 냅다 내 앞에 드러누웠다. 그리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뽀송뽀송한 털을 쓰다듬어도 가만히 있는다. 보송보송한 꿍디를 팡팡팡 두드려줬더니, 기분이 좋은 듯 또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아마도 이 방갈로에 묵었던 손님들은, 모두 이 고양이를 반갑게 맞아주고, 열과 성을 다해 쓰다듬고, 궁둥이도 뚜드려주었었나 보다. 나와는 오늘 처음 보는 사이인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알지도 못하면서, 고양이는 경계도 없이 내게 자꾸만 하얀 배를 보여준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사람들이 서로 적대적인 곳에선 그 틈바구니에 낀 동물들도 생존의 방식으로 적의를 택할 수밖에 없다. 고양이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선뜻 배를 보여주며 뒹굴 수 있는 건, 앞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배운 세상이 안전하고 따뜻했기 때문이리라. 


인간들은 모두 나를 좋아해!


실컷 내 앞에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더니, 고등어고양이는 ‘이 정도면 냥국심사는 끝’이라는 듯 벌떡 일어나 이번엔 옆집으로 간다. 한동안 옆집 앞에 앉아 뒤뜰을 들여다보던 고양이는, 아무래도 그 집엔 냥국심사를 기다리는 인간이 아무도 없었던 모양인지, 툴툴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쿨하게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냥국심사하느라 바쁘다, 바빠!


차 한 잔 끓여와 뒤뜰에 앉아 일을 좀 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 저녁거리를 사올 겸, 자전거를 타고 빠이 중심가에 다녀오기로 했다. 어제는 셔틀트럭을 타고 지났던 논길을 자전거를 타고 선선한 저녁바람 맞으며 씽씽 달려가는데, 동그란 눈 두 개가 저 멀리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자전거를 세우고 보니, 황금에 석양 한 스푼 섞은 오렌지빛깔 털코트를 입은 고양이 한 마리가 담장 위에 얌전히 앉아있다. 내가 자전거를 세우자마자, 고양이는 기다렸다는 듯 담장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꼬리를 세우고 내게 돌진했다.


어이, 인간! 거기 잠깐 멈춰 봐.


애정으로 바라보면, 와르르 다가오는 정다운 친구들


‘어제 우리 옆집에 새로 온 손님이구나! 근데 왜 아침에 우리한테 인사하러 안 왔어?’


다짜고짜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콕 박는 오렌지고양이 때문에 당황할 틈도 없이, 대문 안에서 강아지 세 마리가 우르르 달려 나왔다. 까만 애, 하얀 애, 그리고 둘을 섞어놓은 것처럼 얼룩얼룩한 애. 치앙마이에서 덩치 큰 개들이 짖으며 달려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순간 얼어붙었는데, 이 녀석들 같이 놀자는 듯 날 향해 꼬리를 신나게 흔든다.


우르르 꼬리를 흔들며 달려나온 동네친구들


‘뭐야, 뭐야?’

‘옆집에 새로 온 손님이래!’ 

‘그래!? 그럼 같이 놀자!’


넷 중 막내인 것 같은 오렌지고양이가 내가 타고 온 자전거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킁킁 열심히 냄새를 맡더니, 작은 솜방망이로 툭툭 자전거바퀴를 건드리며 점검을 한다. 그리곤 자전거 바퀴에 부지런히 몸을 비벼 체취를 묻히곤 ‘자전거 점검 끝!’이라는 듯 동그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자, 점검 끝났으니까 점검비용을 내야해. 방법은, ‘우리랑 같이 놀기’야!’


오렌지고양이는 내 다리 두 개가 놀이공원이라도 되는 양 왔다 갔다 탐험하느라 정신이 없고, 강아지들은 막냇동생을 돌보러 나온 형누나들처럼 듬직하게 곁에 둘러앉았다. 산들바람이 정답게 스치는 빠이의 저녁. 캣타워처럼 가만히 서서 새로운 손님을 맞느라 분주한 고양이어린이를 보고 있으니, 꼭 세 강아지친구들과 함께 천방지축 동생 하나를 돌보는 ‘공동육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 하나를 건강하고 안전하게 키워내려면 온 마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쩌면 동물들은 인간보다도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함께 사는 것’이 결국은 나 역시 사는 길이라는 것 또한.


신난다, 신나! 동네에 새로 온 인간탐험!


‘냥국심사’를 다 마쳤는지 분주하게 움직이던 오렌지고양이가 내 발 앞에 털썩 주저앉기에, 나도 에라 모르겠다, 털썩 길가에 주저앉았다. 논에선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먼 산 너머에선 뉘엿뉘엿 해가 넘어간다. 핸드폰은 가방에 넣어두고, 저무는 빛을 바라본다. 어디에서부터 낮은 저녁으로 바뀌었는지, 바람이 싣고 온 저녁공기가 살랑살랑 뺨을 스친다. 무얼 바라보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제각각 다른 곳으로 시선을 향한 채, 고양이도, 강아지들도, 다들 말이 없다.  


‘근데 얘들아, 노는 게 그냥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거야?’

‘응, 우리랑 노는 거, 하나도 어렵지 않지?’


산골마을디톡스


빠이에 가면 ‘디지털디톡스’를 좀 해야지 결심한 적도 없는데, 저절로 핸드폰을 만지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핸드폰은 지도를 보거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풍경들을 마주쳤을 때만 꺼내든다. 이 작은 산골마을의 골목길들이 하나둘 익숙해지면, 그때는 지도를 보는 시간마저 줄어들겠지. 



따뜻한 햇살과 다정한 바람, 부지런히 열매를 맺는 나무와 흙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는 들풀, 동네 곳곳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동물친구들. 내가 떠나온 내 나라에도 모두 존재하던 것들인데. 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함께 가만히 시간 보내기’가, 정작 내 나라에서는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 논에서는 소들이 저물어가는 하루를 관조하고, 너른 들판에 자유로이 풀어둔 말들은 지는 노을 속에 조용히 풀을 뜯는다. 



이대로 정겨운 동물친구들과 둘러앉아 까만 밤을 맞는 것도 제법 근사할 것 같지만. 


‘배고파!’


금강산도 식후경. ‘얘들아, 언니 갈게! 또 만나서 같이 놀자!’ 인사를 하곤 동물친구들의 배웅 속에 다시 길을 떠났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데, 허기진 뱃속에서 꼬르륵꼬르륵 난리가 났다. 다음부터는 동네친구들과 만나서 노는 시간을 계산해서, 좀 더 여유 있게 길을 나서야겠다.


오늘도 중심가 입구는 어김없이 터줏대감인 하얀 개가 지키고 있다. 길을 걷다가 사람이 터를 잡은 곳에 닿으면, 이내 선물상자라도 연 것처럼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정다운 동물친구들. 



‘오늘 하루 동안 그 자리에서 무슨 풍경들을 보았니?’ 


하얀 개가 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그 자리를 떠나야할 이유가 없는 것. 하얀 개가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종일 마주하는 빠이 중심가의 풍경들은, 아마도 적의 없이 평화롭지 않을까.


중심가 안에서 식사를 하려면 자전거를 세우고 걸어가야 하는데, 이웃집 고양이강아지들과 너무 오래 놀았는지 뱃속사정이 요만큼도 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다. 마침 자전거를 세운 곳에서 어젯밤 셔틀트럭을 타면서 눈여겨봐두었던 식당이 멀지 않다. 사람들이 연신 음식을 포장해가기에 눈에 띄었던 식당인데, 가까이 가보니 길에서 훤히 들여다보이는 주방이 아주 정갈하다. 이 정도면 주방장님을 기꺼이 믿고 저녁식사를 맡겨도 되겠다. 


새우팟타이와 해산물과 굴을 넣은 태국식오믈렛을 하나씩 주문했다. 빠이는 산간지역인 치앙마이에서도 세 시간 여를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들어와야 해서 해산물 수급이 쉽지 않을 텐데, 선도가 중요한 굴을 요리해서 팔고 있어 신기하다. 몇 년 전 방콕을 여행할 때에 쌀가루로 바삭바삭하게 부친 굴전을 아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어서, 빠이의 굴전은 어떨까 잔뜩 기대를 하면서 씽씽 신나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이 밤을 고이 접어


방갈로는 그새 마술사의 망토를 펼친 것처럼 까만 어둠에 휩싸였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다시 뒷문을 열고 뒤뜰로 나갔다. 칠흑 같은 어둠 한 편에 모기향을 피우고, 작은 식탁 위에 서둘러 저녁식사를 차렸다. 논 위에 까맣게 밤이 오늘 하루는 어땠냐고 두런두런 말을 걸어온다. 떠나오기 전엔 밥을 먹을 때면 으레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일쑤였는데, 풀벌레가 연주하는 밤의 노래에 귀 기울이며 공을 들여 음식을 맛보다 보니, 다른 일을 할 생각은 전혀 나지 않는다.   



숙주와 쪽파가 아삭아삭 씹히는 팟타이는 거창한 맛은 아니지만 모든 재료가 신선하고, 간도 잘 맞는다. -특히 위에 올려준 쪽파가 저한테는 킥이었거덩요- 굴, 오징어, 새우가 든 태국식 계란부침도 딱 집에서 해먹는 맛! 굴요리의 경우, 해동한 굴을 잘못 요리하면 쪼글쪼글하고 잡내가 나서 웬만하면 굴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에서만 먹는 편인데, 깨끗했던 주방만큼이나 해산물들 모두 깔끔하게 요리가 됐다. 비싼 메뉴로만 두 가지를 골랐는데도 새우팟타이 50바트, 해산물 굴전 60바트, 해서 도합 110바트. 이 훌륭한 성찬이 우리돈으로 5천원도 채 되지 않으니, 왜 사람들이 줄을 서서 포장해갔는지 알겠다.


태양이 막 너머에 잠든 밤. 모든 것이, 낮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숨을 쉰다. 나무도, 풀잎도, 그 속에 졸졸 시냇물 흘러가듯 노래 부르는 풀벌레들도. 생생하게 숨을 쉬는 이토록 다정한 밤을, 굽이굽이 잘 접어두었다가 훗날의 언젠가 다시 꺼내어 펼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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