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이의 동네친구들
고양이라는 묘약
아침이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밤새 창문에 내려두었던 커튼을 여는 것. 방갈로 뒤뜰에 몰려와있던 햇볕이 커튼을 열자마자 앞 다투어 창문 안으로 넘어 들어온다. 기지개를 펴면서 창밖을 내다보는데, 어라, 뒤뜰에 고양이 한 마리가 얌전히 앉아있다. 귀부인처럼 화려한 코트를 보아하니, 어제 아침 식당에서 만났던 바로 그 고양이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열면 어제 만난 고양이가 문 앞에 찾아와있는 곳.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어김없이 또 맞닥뜨리게 될 세상사에 대한 고뇌와 번민들이, 고양이를 본 순간 씻은 듯 사라졌다.
‘고영희 마님,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설마 저 찾아오신 거예요?’
잠옷에 슬리퍼차림으로 뒤뜰로 나갔더니, 고양이는 곧바로 나를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온다.
‘내일 또 만나자고 해놓고 왜 오늘은 식당에 안 왔어? 그래서 몸소 찾아왔잖아.’라고 말하듯, 뒤뜰 의자 위에 훌쩍 뛰어올라가 앉는 고양이. ‘그 말을 알아들었어? 여긴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물어도 요지부동. ‘여긴 원래 내 자리’라는 듯 태연히 방석을 차지하곤, 고양이는 쏟아지는 아침햇살을 만끽한다.
‘이건 원래 내 의자야. 나한테 밥을 주는 집사가 여기 방갈로들을 전부 쓸고 닦거든. 그러니까 이 방갈로는 당연히 내 영역이지. 하지만 손님이 있을 때는 예의상 허락을 맡아. 그런데 오늘 아침엔 네가 늦게까지 자는 바람에 커튼이 열리기를 한참 기다렸어.’
‘네네, 여부가 있겠어요, 아유, 편히 쉬세요.’
‘편히 쉬라면서 왜 자꾸 그 네모난 걸 들이미는 거야?’
‘찐빵 같은 모습이 너어무 귀여워서요.’
빠이에서 맞는 두 번째 아침. 어제 만난 고양이가 안부를 물으러 왔다. 내 영역에 새로 온 손님이 잘 지내고 있는지. 아니, 안부가 아니라 ‘정찰’이라 해야 할까?
찰칵찰칵 소리가 잦아들자, 기다렸다는 듯 두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고양이. 바로 옆에서 인간이 아침체조를 한답시고 두 팔을 쭉쭉 늘이고 사방팔방 휘둘러도 고양이는 잠에서 깨어날 생각이 없다. 이 고양이의 태평함은 아마도 이 숙소에서 앞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얻어진 것일 터. ‘인간들은 모두 고양이를 사랑하고 해치지 않아!’라는 그 믿음이,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날까지 앞으로도 오래오래, 변하지 않기를.
오늘도 정다운
씻고 아침 먹으러 갈 준비를 마치고 다시 뒤뜰로 나와 보니, 고영희 마님은 그새 사라지고 의자만 텅 빈 채 남아있다. 조금 아쉽지만, 고양이는 아마도 빽빽한 하루 일과 중 다음 할 일을 찾아 떠났을 터. 나도 부지런히 오늘의 길을 나선다.
자전거는 언제든 빌릴 수 있지만, 아침에는 산책 겸 걷기로 했다. 따뜻한 햇살이 걸음마다 달려와 껴안아주는, 평화로운 빠이의 아침. 잠시 논두렁에 멈추어 서서 솜털뭉치처럼 보송보송한, 꽃인지 열매인지 씨앗인지 정체를 모를 것을 구경하고, 살랑살랑 청명한 공기를 가득 실어온 여름바람도 쐬어보고. 바나나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린 너른 들판을 걸어, 수확한 열매들을 가득 쌓아둔 누구네 집 담장 옆을 지난다. 그러다 푸른 들판 사이를 가로지르는 물길을 만나서,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도 듣고.
병원 앞엔 털이 북슬북슬한 강아지 한 마리가 늘어지게 잠을 자는 중이다. 손님들 밟고 올라오라고 깔아둔 깔개 위를 낮잠 잘 자리로 택한 건, 그저 감촉이 좋기 때문일까, 아니면, 손님이 오면 얼른 일어나 마중하기 위함일까.
한적한 도로변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상점들. 대야마다 다른 종류의 쌀알들을 수북이 쌓아둔 쌀가게도, 아직 푸른빛이 도는 바나나를 가득 올려둔 평상 옆에 직접 그림을 그린 듯한 가방 몇 개를 덩그러니 놓아둔 가게도, 지키는 사람이 없다. 하늘색 목걸이를 한 개 한 마리가 불쑥 저 앞에 나타나더니, 혼자서 부지런히 어딘가로 향한다.
걷다 보니 어느새 중심가. 한적하던 도로에 오토바이들이 많아졌다. 곧 마주친 횡단보도, 개 한 마리가 총총총 길을 건넌다. 왜 커다란 개가 목줄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느냐고 호통을 치거나 무서워 피하는 이 하나 없이, 사람들은 무심한 듯 평화롭게 각자에게 주어진 하루를 살아간다. 사람이 적의를 보이지 않기 때문일까, 이곳에선 개들도 사람을 향해 짖거나 으르렁거리며 위협하지 않는다. 그저 부지런히 먹고, 자고, 영역을 돌아다니며, 자신들의 일과에 충실할 뿐.
아침을 먹을 식당으로 향하는 고작 30분 동안에, 오늘도 동네친구들을 여럿 만났다. 길에는 동물친구들뿐이더니, 식당 안엔 손님들이 바글바글하다. 다들 나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해서, 이미 모두 어딘가에 들어가 시원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구나. 현관 앞에 벗어둔 신발들이 가득한 걸 보니,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식당인가 보다. 가게 안쪽의 아늑한 자리들은 이미 모두 차고, 현관 앞에 빈자리가 하나 있어 냉큼 가 앉았다.
‘발효’라는 해답
콤부차 한 잔과 템페와 캐슈버터를 곁들인 샐러드를 주문했다. 콤부차는 차를 발효시킨 음료인데, 발효를 위해 설탕 등을 충분히 넣고, 발효과정에서 탄산이 발생해서, 맛은 새콤달콤한 탄산음료 같지만 다량의 유산균을 포함하고 있어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선 최근에 등장해 열풍을 일으켰지만, 인류는 약 2천 년 전부터 콤부차를 만들어 마셨다고 한다. 가공식품이 없었던 그 시절엔, 새콤달콤하고 톡 쏘는 콤부차가 최고의 간식이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공복을 깨는 첫 끼니엔 발효음식을 제일 먼저 섭취하는 것이 위장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몇 해 전부터 눈 뜨고 먹는 가장 첫 음식은 웬만하면 발효음식인 요거트로 하고 있는데, 설탕을 넣지 않은 요거트를 먹어 버릇해서인지, 콤부차는 ‘눈 뜨고 첫 음식’으로 먹기엔 조금 달게 느껴졌다.
다행히 콩을 떡처럼 빚어 발효시킨 템페와 직접 캐슈넛을 갈아 만든 듯한 캐슈버터는 아주 슴슴하고 담백한 맛이어서 아침 첫 끼니에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유당불내증으로 우유, 버터, 생크림 등을 먹지 못하는데다가 하필 땅콩, 호두, 아몬드 등의 견과류에도 알러지가 있는데, 비건식당에 가면 버터의 대체품으로 땅콩버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채식을 시작한 초반엔 ‘버터를 먹는 즐거움’은 완전히 포기했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아이허브에서 캐슈넛으로 만든 버터를 종종 주문해서 먹고 있었는데, 산골마을 빠이에서 ‘캐슈버터’를 직접 만들어 내어주는 식당을 만날 줄이야! 아이허브에서 자주 사먹었던 캐슈버터는 캐슈넛에 식물성오일을 다량 섞어서 먹다 보면 기름이 계속 분리되곤 했었는데, 빠이의 캐슈버터는 조금 뻑뻑한 질감이었지만 오일을 거의 섞지 않고 대부분 캐슈넛으로 만들어진 듯, 은은하게 감도는 고소함이 아주 깔끔하고 자연스러웠다.
템페와 콤부차 모두 최근에 ‘건강음식’으로 세계적으로 각광받기 시작했지만, 이들 모두 인류가 오래 전부터 만들어 먹어온 ‘발효음식’들이다. 맛있고 간편한 가공음식들이 사방에 널린 세상에서, 사람들은 다시 과거의 식습관에서 해답을 찾는다. 그 해답이란, 아마도 ‘발효음식’들이 숙명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시간’이 아닐까.
여름은 낮잠 자기 좋은 계절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저 멀리에 누렁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목에 목걸이도 없고, 근처엔 개를 키울 만한 민가도 상점도 없는데. 주인 없이 거리를 떠도는 들개인가 싶어 덜컥 ‘길을 건너서 안전거리를 확보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공격의지라곤 벼룩의 간만큼도 없는 누렁이의 눈망울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이 먼저 겁먹거나 위협하지 않으면 개들도 공격하지 않는다’는 여태까지의 경험을 믿으며, 터벅터벅 계속 걸었다. 여름의 낮은 단잠을 자기에 딱 안성맞춤. 사람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도, 누렁이는 큰 덩치를 고양이처럼 동그랗게 웅크리고 꼼짝도 않는다.
좀 더 걸어가니 이번엔 붉은 꽃송이들이 주렁주렁 열린 꽃나무 아래에서 멋진 갈색 털을 가진 개 한 마리가 한낮의 햇살에 취해 잠들어있다. 이번에도 터벅터벅, 그저 길가에 흔한 나무나 돌멩이를 지나치듯, 잠든 개 앞을 지나간다.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흘긋 실눈을 뜬 개는, ‘사람이군’ 하곤 다시 눈을 감고 쿨쿨 낮잠을 잔다. 문득 시선이 향한 길 건너편엔, 초콜릿색 털옷을 늠름하게 차려입은 개가 듬직하게 상점 앞을 지키는 중.
똑똑똑 문을 두드리면 빨강머리 앤이 달려 나와 반갑게 인사할 것 같은 동화 속 이층집을 지나서, 다시 번잡한 거리. 모기향을 사려고 들른 편의점 앞에도 어김없이 개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사람이 다가오자 꿈뻑 두 눈을 뜬 개는, 이 정도면 환영인사는 마쳤다는 듯, 스르르 다시 눈을 감는다. 사람은 알아서 피해가라는 듯, 아니 알아서 지나갈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문 앞을 떡하니 가로막은 개는 꿈쩍도 않는다. 아마도 이 편의점을 찾았던 손님들 중엔 ‘개가 왜 편의점 앞에 있냐’고 윽박지르거나, 썩 꺼지라며 적의를 드러냈던 사람들은 없었나 보다.
동물은 인간을 그대로 비춘다
치앙마이에서 사납게 짖으며 달려드는 개들을 마주치고서 적절한 대처법을 고민하던 때에 ‘개들도 덩치가 작은 여성은 더 만만하게 보고 달려들어 짖고 위협한다’는 글들을 다수 읽고는 불안감에 휩싸여 ‘왜 개새끼라는 말이 욕이 됐는지 알 것 같다’고 무심코 생각했었다. 그때의 나는 ‘약해 보이는 상대는 만만하게 보고 위협하는 것’이 본래 ‘개들의 본능’이며, ‘개새끼’는 일부 ‘인간답지 못한’ 인간들을 일컫는 말들이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빠이사람들과 꼭 닮은 듯한 빠이의 개들을 만나고 보니,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인간들이 점거한 세상에서, 동물들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닮을 수밖에 없다. 개들이 사납고 비열하다면 그것은 인간이 그들을 대한 태도가 그대로 돌아온 것이요, 유순하다면 그것 역시 인간이 그들에게 준 따뜻함이 돌아온 것이리라.
한국은 요즘 ‘들개들’이 일으키는 사건사고들이 점점 심각해지는 중이라고 한다. 이들 들개들은 대부분 사람이 버린 유기견인데, 처음엔 먹을 것이 없어 몰려다니며 먹이활동을 하다가, 최근에는 배가 고프지 않을 때에도 단지 재미로 자신들보다 약한 동물과 사람을 공격하고 있어 문제란다. 이를 두고 혹자는 ‘개는 역시 개’라며 ‘본성은 숨길 수 없다’고도 하지만. 키우던 개를 버리고, 황량한 거리로 내몰아, 그 ‘본성’을 들추어낸 것은 결국 인간이다.
빠이에 온 지 3일째. 이 작은 산골마을엔, 어디에나 개들이 있다. 덩치가 나만한 개들이 목줄도 없이 길 한가운데서 낮잠을 자거나, 혼자서 설렁설렁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서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풍경들에 익숙해지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이틀 하고도 반나절.
담장 안에 살며, 문밖에 낯선 이가 지나갈 때마다 집을 지키는 본능을 따라 충실하게 짖어대던 치앙마이의 개들과 달리, 빠이의 개들은, 열린 문밖에서, 따뜻한 햇살 속에서, 낮잠을 자고 소일을 하며 스스럼없이 사람들과 섞여 지낸다. 빠이에서 나고 자라는 개들이 인간으로부터 학습하는 본능은, ‘내 것을 지키고 타인을 내 영역에서 배척해야 생존할 수 있다’가 아니라, ‘다 함께 살아가도 충분히 여유롭다’는 것이 아닐까.
인간들이 온통 차지한 세상에서, 그 틈바구니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동물들은, 결국 인간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낼 수밖에 없다. 선한 모습이든, 악한 모습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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