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쉼, 빠이에서 보낸 열흘
태양이 치유하는 것
더운 나라에 오면 좋은 건, 안과 밖의 경계가 희미한 것. 사방이 훤히 뚫린 오두막에 앉아 여름의 햇살과 바람 속에 정성들여 담은 텃밭 한 접시를 시간을 들여 천천히 먹었다. 산간지역이어서인지, 빠이는 뜨거운 낮에도 스치는 바람이 참 좋다. 빨간 용과스무디 한 잔까지 남김없이 비운 뒤, 뙤약볕이 내리쬐는 차양 밑으로 자리를 옮겼다.
뜨거운 볕을 온몸에 쬐고 있으려니, 몸이 점점 따뜻해진다. 인간의 면역력은 체온이 1도 올라갈 때마다 상승한다던데. 인간은 비록 광합성을 한다하여 식물처럼 키가 무럭무럭 자라진 않지만. 식물들을 키워내는 그 힘이 인간에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리 없다. 따사로운 햇살은 몸뿐만 아니라 두뇌까지도 말랑말랑하게 만들고, 해봤자 고달픈 생각들은 어느새 아지랑이처럼 빛 속에 녹아 희미해진다. 어느 정신과 전문의가 말하길, 우울증을 치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해가 떠있는 동안 활동하는 것’이라는데.
만약 온 지구가 일 년 내내 여름이어서 지구상의 어느 지역에 살든 모두가 오후엔 태양 아래 누워 충분히 볕을 쬐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오두막을 내려와 보니 뒤편에 작은 숲이 펼쳐져있다. 거인 같은 나무가 마법으로 하나하나 짜내어 인간세상까지 주렁주렁 늘어뜨려 준 것만 같은 줄기들 사이를 걷고 있으니, 곧 다른 세계에 닿을 것만 같은 기분. 이윽고 닿은 곳은 화장실이지만, 야외세면대에서 커다란 나무들에 둘러싸여 손을 씻고 있으니 새벽마다 토끼가 와서 세수하는 깊은 산속 옹달샘에 온 것 같다.
안과 밖
좀 더 여름의 볕을 만끽하고 싶지만 ‘언덕 위의 큰 부처님’까지 또 부지런히 걸어가야 하기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터벅터벅 길을 나섰다. 빠이는 작은 산골마을이지만, 중심가와 숙소주변, 그리고 강 건너의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도로엔 아주 가끔씩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하염없이 이어지는 초록의 곁을 걷고 있자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다.
더운 나라에 오면, 한국과는 확연히 다른 건축양식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 무성한 나뭇가지들에 둘러싸인, 나무로 지은 집 속에, 나무로 만든 창문. 안과 밖이 자연스레 이어지는 모습들은 자연과 자연스레 어우러져 살아가는 빠이사람들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추운 겨울을 대비해 두꺼운 벽을 짓고, 두꺼운 유리창을 겹겹이 달아, ‘안전한 내 구역’을 확실히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겐, ‘안’과 ‘밖’처럼, ‘나’와 ‘타인’을 철저히 경계 지으며 사는 것 또한 그저 숙명일 뿐인지. 더운 나라들을 여행하다보면, 인간이 오랜 역사 내내 자연에 맞서 이룩한 문명조차도 결국은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스스로를 ‘인간’이라 명명해 동물이라 구분 짓고, 자연에 순응해 살아가는 동물과 우리는 다르다고 스스로 정의하였다면, 혹독한 겨울이 왔다하여 각자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 서로 배척하지 않고 ‘인간답게’ 함께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지.
산골마을에서도 디저트는 필요해!
언덕 위의 큰부처님을 또 뵈러 왔다. 이번엔 걸어서! 숙소에서부터 꼬박 걷기엔 제법 먼 거리인데, 식당에 들러 아침을 먹고 쉬엄쉬엄 동네산책 하듯 걸었더니 금세 사찰 앞이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또다시 몇 개나 되는 긴 계단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먼저 당충전을 하기 위해 사찰 맞은편 채식식당 <Earth Tone>으로 향했다.
이 식당은 크게 식사하는 공간과 식품, 화장품, 의류, 위생, 생활용품 등 다양한 비건제품들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공간으로 나뉘어있는데, 지난번에 식사를 마치고 판매공간을 둘러보니 글쎄 식당메뉴엔 적혀있지 않았던 비건쿠키와 케이크, 발효유 따위가 냉장고에 그득그득하지 않던가! 판매공간의 제품들도 식당에서 먹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캐슈넛으로 만든 비건 티라미수케이크를 한 조각 주문했다.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디저트 티라미수는 바닥에 에스프레소에 적신 빵이나 쿠키를 깔고 그 위에 마스카포네치즈와 우유생크림을 섞은 것을 부어 만드는데, ‘채식’으로 만들려면 당연히 채식치즈와 채식생크림을 써야 한다.
개인적으로 우유생크림은 비건으로 그 맛과 질감을 구현하기가 가장 까다로운 음식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처음 우유와 밀가루를 끊고 채식을 시작했던 2014년 즈음엔 ‘팜유’를 넣고 비건생크림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 비건생크림은 1980년대에 동네제과점에서 비싼 동물성 우유생크림 대신에 마가린이나 팜유를 사용해서 만들던 ‘버터크림’과 거의 유사해서, 한두 입 먹고 나면 느끼하고 속이 불편한 탓에 난 ‘생크림을 먹는 건 이제 포기해야겠구나’ 생각했었더랬다.
그러나 인간은 포기를 모르는 동물.
특히 먹는 것에 있어서는 더더욱!
비건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이 꾸준히 맛의 향상을 위해 레시피를 개발하고, 최근 몇 년 사이엔 ‘비건’이 전 세계적으로 급부상하며 레시피 개발에 뛰어드는 사람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요즘은 정말 식당마다 각양각색의 재료들을 이용해 동물성생크림을 채식으로 재현해내고 있다. 그래서 나도 한동안 포기했던 ‘비건크림’을 다시 이것저것 먹어보기 시작하는 중!
이곳의 티라미수는 적당히 단단한 제형의 크림에 캐슈넛의 고소함이 은은하게 배어있었는데, 느끼함 없이 산뜻한 맛이었고 먹고 나서 속이 불편한 것도 전혀 없었다.
간혹 ‘우유와 밀가루를 먹지 않는다’고 하면 빵이나 과자 같은 디저트를 일절 먹지 않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니 그걸 어떻게 안 먹어요... 디저트 야무지게 챙겨 먹으려고 밥은 최대한 건강하게 먹는 거예요...
‘빈 칼로리’가 채우는 것들
‘디저트’란 허기짐이 충분히 해소된 상태에서 오로지 즐거움만을 위해 먹는 잉여의 칼로리. 인간이 불을 발견하고, 생으로 먹던 것들을 불에 조리하면서 음식을 통해 섭취할 수 있는 칼로리가 급격히 늘어났으며, 육체가 생존하는 데 쓰고 남은 ‘잉여의 칼로리’가 두뇌활동에 쓰이며 비로소 문명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도 일을 할 때는 배가 고프지 않아도 옆에 으레 초콜릿이나 쿠키 같은 단 것을 챙겨두고, 머릿속에서 무언가 잘 풀리지 않으면 무의식중에 그것들을 계속 집어먹곤 하는데, 요즈음엔 이렇게 단백질이나 비타민, 섬유소 등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영양소는 거의 포함하지 않고 에너지만 들어있는 음식을 ‘빈칼로리-empty calories’라고 부르며 경계하기도 하지만.
‘잉여의 칼로리’가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던 문명이란, 그 자체로 인간이 스스로에게 주어진 본연의 삶 이상의 것을 요구함일 터. 그냥 하루하루 필요한 만큼만 먹으며 생존하면 그만인 것을, 우리는 왜 스스로에게 ‘문명’과 ‘인간다움’을 요구하는지.
한국을 떠나온 뒤로 일찍 잠들고 일찍 깨어나며 마감시간에 쫓기며 일하지 않고 그저 터벅터벅 느리게 걸어 다니다 보니, ‘잉여의 칼로리’로 가득한 간식거리를 찾는 빈도가 확 줄었다. 코앞에 닥친 마감을 해치우기 위해 먹는 초콜릿이나, ‘우울해서’ 먹는 빵과 케이크 등, ‘빈칼로리’로 가득한 음식들은 한편으로는 현실에 닥친 스트레스들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문명을 만들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건, 인간이 스스로에게 ‘생존 이상의 삶’을 달성해낼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스트레스상황’과도 같을지 모른다. 문명사회에 넘쳐나는 ‘빈칼로리’로 무엇을 채워 넣을지는, 결국 각자의 몫. 티라미수 케이크 한 조각의 ‘잉여에너지’로 사유의 장작들에 불을 붙이고, 오늘의 계단들을 오르기 위해 식당을 나섰다.
개들이 지키는 것
오늘도 부처를 지키는 개 형상의 석상들을 만났다. 험상궂은 얼굴에 말이나 사자의 갈기 혹은 닭의 벼슬을 닮은 무언가가 비죽비죽 솟아난 것을 보아하니, 아마도 우리나라의 ‘해태’처럼 태국사람들의 상상이 탄생시킨 영험한 동물인 것 같은데. 모르긴 해도 그 원형은 빠이의 개들로부터 오지 않았을까.
빠이의 개들은, 도시의 개들처럼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해 짖지 않는다. 하지만 빠이사람들은, 누구보다도 굳게 개들이 자신들의 가장 소중한 것을 지켜줄 거라고 믿기에, 개를 닮은 석상을 부처에게로 가는 길에 세워둔 것이 아닌지. 그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집이나 내 영역, 내 재산이 아니라, 그저 ‘믿음’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네가 나를 지켜줄 것을 믿는다. 그렇기에, 너도 내가 너를 지켜줄 것을 믿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믿음으로부터, 삶의 불안과 불완전에서 벗어난다.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며
석 달의 여행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하루하루 끝없는 오르막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기에, 나는 오늘 빠이의 평온한 하루 끝에 다시 부러 이 긴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나 보다. 지난번엔 지는 해 속에서 언덕 위의 부처와 마주했지만, 대낮의 파란 하늘 아래 언덕에 오르니, 모든 것이 선명해서 감회가 새롭다.
계단 끝엔 오늘도 사람들이 벗어둔 신발들이 빼곡하다. 신발을 벗는 것은 부처를 모신 이 공간을 깨끗이 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맨발로 부처 앞에 서서, 긴 계단을 오르는 동안 까마득히 멀어진 저 범사를 내려다보기 위함이기도. 태초에 이 세상에 올 때 그랬던 것처럼, 떠나갈 때에도 우리는 이와 같이 맨발일 터이니.
맨발로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오후의 햇살이 또렷이 어루만지는 저 먼 산골마을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번잡한 삶 속엔 좀처럼 놓을 수 없었던 것들이, 하나둘, 놓아져간다.
자전거를 가져오지 않은 탓에,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야 한다. 하나하나 다시 계단을 밟아 내려가니 너른 사찰 마당-혹은 주차장일까-에 개 세 마리가 똘똘 뭉쳐 돌아다니고 있다. 어느 집에서 ‘저녁 먹어!’ 하고 외치면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것 같은 모습. 여행객들이 탄 오토바이가 부웅- 지나가자, 세 친구들이 나란히 오토바이 꽁무니를 쳐다보며 꼬리를 흔든다. ‘집에 가는 거야? 다음에 또 우리 동네에 놀러와!’라고 인사하듯.
개들을 뒤로 하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삼총사 중 하얀 녀석이 불쑥 나타나 나를 앞지르더니 총총총 혼자서 부리나케 계단을 내려간다. ‘얘, 너 밥 먹으러 집에 가니? 친구들은 다 어디 갔어?’ 말을 걸어도 들은 체 만 체. 배가 어지간히도 고픈지 백구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모든 살아남은 생명들에게
어느 집 앞 나무에 커다란 파파야가 몇 개나 열려있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멈추어 섰다. 인간들의 관점에서 보면 나무는 늘 같은 자리에 평온히 서있는 것 같지만. 일단 씨앗이 싹을 틔우고 땅에 뿌리를 내리면, 그 순간부터 나무는 매순간 치열한 사투를 벌여야 한다. 땅속의 한정된 양분을 서로 빨아들이려 경쟁적으로 뿌리를 뻗고, 더 많은 태양빛을 얻으려 있는 힘을 다해 가지를 뻗으며. 이 사투는 나무가 싹을 틔운 뒤 3년에서 5년 사이에 절정에 이르러, 많은 나무들이 이 시기를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고 한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아름드리나무들은, 태어난 지 고작해야 3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가장 어리고 연약한 시절에 죽음의 위협에 맞서 가장 치열한 사투를 벌인 끝에 살아남은 존재들이다.
땅에 흩뿌려진 수 개의 씨앗들 중에서, 기를 쓰고 땅속의 양분을 끌어 모아 싹을 틔우고, 매일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벌이며, 가느다란 어린나무에서 나이테를 두툼하게 새긴 우직한 나무로 자라나, 마침내 주렁주렁 결실을 맺기까지, 이 나무에겐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을까. 잘 익은 과일들이 수북이 쌓여있는 슈퍼마켓 진열대 앞에 섰을 때는 잘 와 닿지 않던 시간들을, 듬직한 덩치를 여유로이 펼치고 있는 아름드리나무 앞에서 잠시 가늠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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