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이에서 보낸 열흘
자연이 단련해준 재능
‘언덕 위의 큰 부처님’을 보고 집에 돌아가는 길, 자전거를 타고 갈 때에 휙-휙- 지나치던 것들을 구석구석 들여다보며 걸었다. 강 건너엔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곧 해가 지지 않는다면 당장 신발을 벗고 올라가 차 한 잔 기울이고픈 오두막 찻집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아쉬워하고, 오토바이들이 쌩쌩 지나다니는 도로변에 집에서 쓰는 것 같은 탁자를 덜컥 내다두고 그 앞에 앉아 뜨개질 중인 할머니의 좌판도 구경하고.
요 며칠 빠이를 돌아다니다 보니 직접 뜨개질한 옷이나 소품들을 파는 상점들이 제법 많다. ‘뜨개전문상점’은 보질 못했고, 식당이나 상점 입구, 혹은 길에 덜렁 탁자나 옷걸이 하나 내어두고 뜨개질한 것들을 걸어두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머리띠는 천 원 남짓, 가디건은 오천 원에서 만 원, 원피스는 이만 원 정도로 –물론 파는 곳마다 다르다- 가격이 정말 저렴한데다, 살펴보면 하나같이 색감도 너무 예쁘고, 실의 질이나 만듦새도 좋다.
빠이에 도착한 첫날밤에 너무 추워서 한국에서 가져온 옷가지로는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 노점에서 저렴한 뜨개가디건 하나를 사서 걸쳤는데 –요건 아쉽게도 중국에서 가져온 공산품이었다. 빠이사람들이 이렇게 뜨개질을 잘 하는 걸 알았으면 잠깐 추위를 참고 발품을 팔아서 수제가디건을 샀을 텐데! 물론 나중에 샀습니다만...- 낮엔 뜨겁고, 밤엔 제법 쌀쌀한 빠이날씨엔 따뜻하면서도 통풍이 잘 되는 뜨개가디건이 정말 유용했다.
모자, 머리끈, 가방, 목도리, 귀마개... 좌판 위에 할머니가 직접 뜬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그 솜씨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내가 ‘이것도 저것도 다 예뻐! 어쩌지!?’하고 결정장애를 겪는 동안 묵묵히 뜨개질만 하던 할머니는 마침내 내 손에 쥐어진 스카프 하나와 머리끈을 보더니 종이에 슥- 가격을 적어 보여준다. 머리끈 하나에 5바트, 빨간 스카프는 100바트. 한국상점에 가져다 놓으면 모두 10배는 되는 가격표가 붙을 물건들이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가격이야!’ 생각하며 머리끈 몇 개를 더 쓸어 담고, 아까부터 자꾸만 눈길을 끌던 새하얀 털모자도 하나 집어들었는데, 이크, 모자 안쪽에 개미들이 열심히 털실 사이사이를 기어 다니며 파티를 벌이고 있다. 할머니에게 모자를 건네며 안쪽 사정을 보여주었더니, 일말의 동요도 없이 손으로 꾹-꾹- 개미들을 때려잡으신다. 하지만 한두 마리를 잡으면 어딘가에서 또 한두 마리가 뽈뽈 기어 나오고, 그들을 때려잡으면 또 한두 마리가 어디선가 새롭게 나타난다.
잊고 있었다. 스스로 무한증식이라도 하는 것 같은 이 무적의 개미군단들은, 치앙마이와 빠이사람들의 일상에 고양이나 개들보다도 깊숙이 침투해 함께 살아가고 있는 녀석들이라는 걸. 치앙마이에 도착한 첫날, 씻고 나와 욕실 앞에 호스트가 준 새 매트를 깔아두었는데, 다음날 아침이 되니 어디선가 나타난 개미군단이 매트를 점령하고 뽈뽈 열심히 기어 다니고 있었다. 호스트에게 부탁해 약을 놓고 보일 때마다 뿌리기도 했지만, 숙소를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도 개미들은 어디선가 한두 마리씩 계속해서 등장했다.
숙소에 개미가 한두 마리 돌아다니는 것은 이제 ‘그러려니’. 대신에 음식을 사오는 경우엔 바로바로 먹고, 먹는 자리는 먹으면서 동시에 깨끗이 치우고, 쓰레기는 곧바로 단단히 묶어 문밖에 내놓는다. 숙소에 개미나 기타 벌레들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호스트들은 대부분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노력하지만, 기후와 가옥 특성상, 동남아시아국가들에서 이들을 ‘완전히 없애기’란 불가능한 일인 듯하다.
이 여행을 시작하기 전엔 나도 ‘개미나 바퀴벌레가 있는 숙소는 아무리 시설이 좋아도 무조건 제외!’라고 생각했었지만, 여행 전에 리뷰 수십 건을 꼼꼼히 읽고 숙소를 정했어도, 실제로 여행하는 동안 개미나 바퀴벌레의 습격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뒤뜰 앞에 펼쳐진 평화로운 논뷰view로 머무는 내내 행복감을 만끽하게 해주었던 빠이의 숙소 ‘Wellness in the Valley’의 경우에도, 닷새 동안 잘 머물다가 마지막 이틀간 연이어 나타난 바퀴벌레의 습격을 받고 말았는데 -프런트에서 곧바로 와서 해결해주었다- 결국 결론은, 나무로 지은 오래된 가옥들만의 운치를 즐기려면, 그에 상응하는 벌레들의 출몰 정도는 감수해야한다는 것이다.
모자를 사는 건 ‘개미집’을 사는 꼴이 될 것 같아 결국 포기. 좌판을 잘 살펴보니 유독 모자를 쌓아둔 쪽에만 개미가 꼬여있다. 할머니께 손짓발짓을 동원해 ‘이쪽에 개미들이 아주 활개를 치고 있어요! 약을 좀 놓아야할 것 같아요.’라고 말해도, 할머니는 ‘그거야 잡으면 되지’라는 듯 슬렁슬렁 개미를 잡는 시늉만 두어 번 해보일 뿐이다. 이 개미군단은, 할머니에겐 ‘당장 전부 때려잡아 없애야하는 것들’이 아니라, 그저 ‘일상 속에 늘 존재하는 것들’인 게다.
다행히도, 개미들은 아직 좌판 나머지 영역들엔 진출하지 않았다. 눈사람처럼 새하얀 털의 비니며, 귀를 덮도록 만들어진 귀여운 유아용 털모자며, 개미들이 점령하지 않았다면 벌써 팔렸을 물건들이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다가, 머리끈과 빨간 스카프만 고이 품에 안고 다시 길을 나섰다. 내게 잘 가라고 인사를 건네곤, 할머니는 개미들이 애써 완성한 작품들에서 파티를 벌이건 말건, 다시 무심히 뜨개질에 열중한다.
빠이사람들이 뜨개질에 능한 건, 뜨거운 낮과 쌀쌀한 밤이 번갈아 계속되는 이곳 날씨가 그 재능을 무던히도 단련하도록 담금질해준 덕분에 축적된 결과물은 아닐까. 빠이를 걷고 있으면, 인간은 역사의 그 어느 순간에도, 자연의 영향력을 떠나 홀로 존재한 적 없음을 반복해 상기하게 된다. 우리가 온전히 인간 고유의 재능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조차도, 우리의 긴 역사를 반추해 보면, 결국은 자연으로부터 단련된 것들이다.
해 지기 전에 서둘러 중심가 쪽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너른 들녘에 내려앉는 저녁노을이 한없이 걸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사라질 찰나의 장관. 도로에서 들녘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터벅터벅 사람들이 내어둔 샛길을 따라 그 한복판으로 들어가 본다. 붉게 번지는 지는 해 한 가운데 두 팔을 벌리고 서서, 자연이 만들어낸 오늘의 작품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개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
강을 건너 중심가로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어느 집, 유리문 너머에 보송보송한 털옷을 입은 강아지 세 마리가 나란히 앉아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의 온도가 급상승하는 사랑스러운 모습!
낯선 사람이 문 앞까지 성큼 다가와도, 세 친구는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데 여념이 없다. 모르긴 해도, 이 녀석들 밥을 챙겨주는 주인장이 귀가할 시간이 다 되어가나 보다. 동물들은 생체리듬과 더불어 태양의 밝기나 온도, 습도 따위의 변화를 포착해 시간을 파악한다고 하는데. 요 녀석들이 느끼는 ‘우리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는 온도’는 과연 몇 도쯤인지 궁금해진다.
북적이는 중심가를 걷는 동안 거리마다 밤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떠오른 새콤한 쏨땀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데, 어제까진 가는 곳마다 잘만 보이던 쏨땀 파는 음식점이 오늘은 왜 눈에 띄지를 않는지. 이래서 조상님들이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했나 보다. 눈에 불을 켜고 ‘쏨땀’을 찾다 보니 어느새 중심가 끝까지 와버렸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 식당을 찾아볼까 하다가, 중심가 밖으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넜다.
횡단보도 주변의 작은 식당들은 수수한 음식들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데, 개중 자전거를 지나치고 거의 매일 지나치는 한 식당의 메뉴판에서 ‘쏨땀’을 본 기억이 났다. 도로변에 내어둔 작은 탁자에 사람들이 앉아 식사하는 모습이 제법 운치있어 보여서, 나도 한 번쯤은 저기 앉아 횡단보도 건너 중심가의 화려한 불빛을 바라보며 밥 한 번 먹어야지 했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가 보다.
빠이의 시골밥상
아무것도 넣지 않은 기본 쏨땀과 야채만 넣은 팟타이를 주문했다. 피쉬소스와 타마린드소스를 넣어 달콤짭짤하게 볶은 쌀국수인 ‘팟타이’는 태국음식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도 무리 없이 즐길 수 있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태국음식 중의 하나인데, 의외로 그 역사는 길지 않다.
바야흐로 2차 세계대전 중, 태국 내 쌀소비량을 줄이기 위해 고심하던 태국수상은 국민들에게 쌀 대신 쌀국수를 먹도록 유도하며 애국심도 함께 고취할 목적으로 ‘쌀국수 요리대회’를 개최하였고, 평범한 가정주부가 출품한 ‘계란을 깨트린 뒤 피쉬소스와 타마린드소스, 갈색설탕을 넣고 볶은 쌀국수’가 최종적으로 우승하여 태국을 대표하는 국수요리인 ‘팟타이’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팟’은 볶음, ‘타이’는 태국이라는 뜻이다- 처음엔 계란만 넣고 만들던 팟타이에 이후 두부와 새우 등의 고명이 추가되며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팟타이’는 한국음식으로 치면 ‘김치볶음밥’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 -김치볶음밥도 한국전쟁 후의 가난하던 시절에 찬밥과 남은 김치를 볶아 먹으면서 탄생한,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덴마크에 거주하던 때에 자주 가던 태국식당에서 팟타이를 주문하면, 태국인 요리사가 항상 ‘이건 우리엄마 팟타이랑 똑같은 맛이야’라면서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접시를 내오곤 했었다. 그 말인즉슨, 아주 간단한 음식이지만 ‘팟타이’를 요리하는 방법은 태국 집집마다 천차만별이라는 것! ‘국가를 대표하는 음식’이란, 결국 ‘집집마다 손맛을 발휘해 다 다른 레시피로 만들 수 있는 음식’ 정도는 되어야하나 보다.
네모난 접시에 정갈하게 담아 내온 팟타이는 그 옛날 요리대회에서 우승한 바로 그 레시피에 가까운 수수한 모습. 재료가 풍성하면 물론 맛있을 확률이야 더 높아지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고 해서 맛이 덜하다는 법은 없다. 음식의 맛을 결정 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재료의 신선함과 간을 얼마나 잘 맞추느냐! 들어간 건 별로 없지만, 간이 잘 맞았고, 기름도 깨끗했으며, 부드럽게 잘 익은 쌀국수와 아삭아삭 신선한 숙주의 조화가 킥!이었던 팟타이는, 시골집에 가면 할머니가 후루룩 말아주는 국수처럼 아주 깔끔하고 정감 있는 맛이었다.
상큼한 라임즙을 흠뻑 머금은 쏨땀은 그야말로 두 눈이 번쩍 뜨이는 맛. 한국에선 김치가 차지하던 자리를, 태국에 온 뒤로 ‘쏨땀’이 채우고 있는 것 같다. 달지 않은 그린파파야는 맛도 식감도 무와 아주 비슷한데, 이것을 태국식 젓갈인 피쉬소스와 매운 고추, 방울토마토 등을 짓이겨 넣고 버무린 후 라임이나 레몬으로 상큼한 맛을 더한 쏨땀은, 김치가 떠오를 수밖에 없는 친숙한 맛이다. 다만 김치는 오래 저장해두고 먹는 발효음식이고 쏨땀은 갓 버무려먹는 음식이라는 점이 다른데, 김치의 화룡점정이 긴 시간의 발효 끝에 얻어낸 신맛이라면, 쏨땀의 화룡점정은 단연 갓 짜낸 라임즙의 신맛이다!
빠이에 오니 새콤한 맛이 좋아!
빠이에선, 어느 식당엘 가도 음식에서 ‘시골밥상’ 맛이 난다. 빠이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입맛도 대도시에서 길들여져 있던 자극들을 점차 비워내는 듯, 담백하고 수수한 음식들이 점점 더 끌리고, 맛있게 느껴진다. 먹는 것은 사는 것이요, 사는 것은 곧 먹는 것이니.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에 따라 내 몸이 원하는 맛도 달라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스트레스가 많으면 우리 몸은 맵고 짜고 단 음식들을 원하게 된다고 한다. 반면에 ‘신맛’이 나는 음식들은 대개 ‘디톡스’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루 또 하루 머물다 보면 몸도 마음도 절로 ‘산골마을 디톡스’를 하게 되는 이곳 빠이에서, 오늘 하루 부지런히 숲속과 들판을 걸어 다닌 끝에 새콤한 라임즙으로 흠뻑 샤워를 한 ‘쏨땀’이 그리도 먹고 싶었던 것 또한,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우리 얼룩이 만나면 안부 전해줘!
기분 좋게 배를 채우고 설렁설렁 걸어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오늘 영업 마감 중인 식당에서 금방울을 목에 건 얼룩고양이를 만났다. 까만 얼룩이 반가워서 사진을 찍었더니, 플래시소리를 들었는지 얼른 일어나 다가온다. 사람을 보면 꼭 가까이 와서 인사하는 정다운 빠이의 고양이친구들. 내 손엔 사료도 간식도 없는데, 얼룩고양이는 이곳저곳 몸단장을 하면서 내 앞을 떠나지 않는다.
바로 지난해까지 동네사람들과 다 같이 돌보던 아기고양이가 있었는데, 새하얀 털옷 위에 젖소처럼 귀여운 까만 얼룩이 있었다. 고등어와 치즈냥이들이 주름잡던 동네에 갑자기 혼자 뚝 떨어진 얼룩이 아기고양이였던지라 그야말로 온 동네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었는데, 입양을 준비하던 중에 그만 교통사고로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내가 퇴근하는 시간이면, 항상 길목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사랑 많던 우리 얼룩이. 그래서 우리 얼룩이를 닮은 친구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한 마디씩 건네게 된다.
‘난 이제 그만 갈게! 나중에 고양이별에 가서 우리 얼룩이 만나면 안부 전해줘! 꼭 전해줘!’
모락모락 장미꽃잎 피워내는 밤
쏨땀을 찾아 헤매던 와중에도 장미 꽃봉오리를 말린 차가 눈에 띄어 한 봉지 샀다. 뜨거운 물 위에 바싹 마른 꽃봉오리를 몇 개 띄우니,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따라 꼭 다물어져있던 꽃잎들이 한 겹, 두 겹, 열리기 시작한다. 장미꽃향기가 은은하게 감도는 차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진하고 깊은 맛.
서늘하고도 고요한 빠이의 밤. 긴 잠에 빠진 백설공주처럼 꼭 닫혀있던 꽃봉오리들이 물기를 머금고 한 겹, 두 겹, 피어나 마침내 만개할 때까지, 홀로 한참동안 찻잔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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