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햇살 Dec 15. 2024

고양이를 쓰다듬을 시간이 필요해!

빠이의 동물친구들


방갈로 아침순찰 나왔습니다


아침. 일어나자마자 커튼을 열고 뒤뜰에 고영희마님이 오셨는지부터 확인을 했다. 텅 빈 뒤뜰을 보며 실망한 것도 잠시, 저기 논 한 가운데 뽀얀 인형 하나가 떨어져있다.


어라, 논에 웬... 고양이님이시군요!


설마 하며 뒤뜰로 나가보니, 전에 오후순찰을 왔던 고등어고양이다. 말간 아침햇살 아래 뽀송뽀송한 코트를 잔뜩 뽐내던 고등어고양이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벌떡 일어나 날 향해 직진해왔다. 그리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 앞에 벌러덩- 드러누워 버리기!



‘고영희마님이 이 방갈로에 놀러온 손님은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난다더니! 논에서 한참 새소리를 들으면서 기다렸어. 오늘 일정들이 다 밀려버렸다구. 자, 어서 빨리 나를 쓰다듬도록 해.’


자, 인간아, 빨리 나를 쓰다듬거라!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세수하고, 머리감고, 부지런히 밖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하는데. 세안밴드를 머리에 한 채로 눈곱도 떼지 않고 뒤뜰에 주저앉아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다. 보송보송한 털들이 아침햇살을 흠뻑 머금어, 군밤처럼 따끈따끈하다.


‘고영희마님이 그러는데, 방갈로손님들은 만나기로 한 시간을 잘 안 지킨대. 우리 고양이들은 하루 일과를 칼같이 지키는데. 인간들은 왜 그렇지 않아?’

‘우리가 만날 약속을 했었어?’

‘당연하지. 인간과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면, 우리는 꼭 그 시간을 기억해. 그리고 다음날에도 똑같이 그 시간에 그 자리를 찾아가. 난 어제 오후에 우리가 처음 만났던 것과 같은 시간에 다시 이 방갈로를 찾아왔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네가 나오지 않았어!’



한참을 쓰다듬을 받더니, 고등어고양이는 이제 됐다는 듯 일어나 앉는다. ‘우리 같이 경치나 볼래?’라는 듯 내 앞에 앉아 한참 저 먼 산을 바라보던 고양이가 다시 벌러덩 내 앞에 몸을 뉘였다. ‘궁디팡팡’을 하라는 뜻인가 싶어 팡팡팡팡 신나게 두드려주었더니 ‘애미야, 신명이 나는구나!’라고 말하듯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기분이 좋은지 찹쌀떡 같은 발도 내밀어 보여주고, 그 발을 뒤집어서 분홍색 젤리도 보여준다. 벚꽃을 꼭 닮은 꽃분홍색에 ‘아이, 예뻐라!’ 소리가 절로 나온다.


짜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니까 보여줄 때 어서 보거라!


비록 인간의 말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고양이들은 인간들이 진심으로 사랑에 빠진 순간에 내는 특유의 소리들을 ‘소리 그 자체’로 알아듣는 것이 분명하다. 고양이들끼리 서로 위협할 때 내는 소리나, 엄마가 아기를 부를 때 내는 소리 따위를 서로 구분하고 알아듣는 것처럼.


‘쓰다듬쓰다듬’과 ‘궁디팡팡’, ‘아이 예쁘다!’ 3종 세트를 실컷 즐기곤, 고등어고양이는 ‘오늘 만남은 이만하면 성공적’이라는 듯 뿌듯한 표정으로 유유히 뒤뜰을 떠났다. 녀석, 내가 낮에 하도 싸돌아다니니까, 아침에 순찰을 하기로 일정을 바꾸었나 보다.



고양이가 떠난 뒤, 오늘도 평화로운 논뷰view를 바라보며 아침체조를 했다. 논은 어린 시절 한 달에 한 번씩 가던 시골집에서도 실컷 보았었지만,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열고 나와서도 한참을 가야 저 멀리에 펼쳐져있던 논과, 커튼을 열면 곧바로 너머에 펼쳐져있는, 문을 열고 몇 발자국만 걸어 나가면 두렁에 닿는 논이 마음에 와 닿는 ‘세기’는 확실히 다르다. 그러니, 아스팔트로 메워진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연에게 갖는 심리적 거리란, 멀고도 멀 수밖에 없는 일. 이제 곧 이 숙소를 떠나야하니. 아침햇살의 따스함 담뿍 실어 껴안아오는 너르고도 가까운 이 대지의 환대를, 나도 양팔을 활짝 펼쳐 듬뿍 마주 안아 본다.


오늘도 사이좋은 소들과 오늘은 도로변에서 무주시고 계신 까만 강선생님


긴 치마는 고양이테마파크!


사찰의 담벼락을 따라 나무가 무성한 길을 걸어 나가면, 오늘도 어김없이 모퉁이를 지키고 있는 잡화점. 아침 일찍 일어나 각자의 일과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들과 고양이, 강아지들로 잡화점은 오늘도 왁자지껄하다. 벌레구경을 하는지 동그란 뒷모습을 뽐내며 무언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생강고양이에게 ‘뭘 그렇게 재미있게 봐?’하고 말을 걸었더니, 곧바로 뒤를 돌아본다. 치렁치렁한 긴 치마가 ‘고양이테마파크’처럼 보였는지, 한 살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은 생강고양이어린이가 곧장 뽈뽈뽈 내게로 달려오더니 치마 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난리가 났다.


우와 구멍이 뽕뽕 뚫린 이 재미난 캣타워는 뭐지!?


이 정도면 다 놀았겠지 싶어서 ‘언니 이만 갈게’ 하고 걸음을 옮겼더니, 또 쫓아와서 치마 속으로 들어가고. ‘언니 이젠 진짜 갈게!’ 하고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더니 이번엔 발 앞에 주저앉아 못내 아쉬운 표정을 한다. 뱃속에선 꼬르륵 꼬르륵 이제 그만 밥 먹을 시간이라고 배꼽시계가 우렁차게 울려대는데, 내 두 발은 잡화점 앞에 꼼짝 없이 말뚝이 되어 떠나질 못한다.


간다구? 왜애? 우리 이제 막 놀기 시작했잖아!


이런, 오늘도 깜빡했다! 빠이에선, 털북숭이동네친구들과 인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그러니까, 밥을 열한 시에 먹기로 했고, 식당까지 가는 시간이 삼십 분이라면, 동네친구들과 인사하고, 쓰다듬을 시간 삼십 분을 더해서, 넉넉히 한 시간 전에 길을 나서야한다.


생강고양이는 결국 한참을 더 치마 속을 탐험한 뒤, 내게 딱 달라붙어 체취를 실컷 묻히는 것까지 마친 뒤에야 만족한 듯 잡화점에서 판매하는 어린이용 탁자 밑으로 자리를 옮겨 다음 일과를 시작했다.  


휴... 인간이랑 놀아주느라 하얗게 불태웠다... 이제 좀 쉬어야지...



동네맛집발견!


잡화점에서 중심가를 향해 5분 정도 걷다 보면 낮은 담벼락에 불쑥 문 하나가 튀어나온 ‘동네식당’이 하나 있다. 외관을 딱 보자마자 ‘맛집일 것 같다!’는 감이 와서 가봐야지 하고 있었는데, 낮영업만 하는 식당인지라 그간 시간 맞추어 오기가 쉽지 않았다.



색색의 바구니에 정갈하게 손질해 담아둔 재료들만 봐도 일단 합격! 음식을 주문하면 바구니에 담아둔 재료들을 집어서 바로 그 앞의 탁자에서 요리해준다. 손님들이 요리하는 모습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오픈키친’인 셈. 카운터에 꽂혀있는 메뉴판을 구글로 번역해서 정독해보니, 몇 가지 종류의 볶음쌀국수와 열 가지도 넘는 종류의 쏨땀을 판매하고 있다. 재료를 추가하는 식으로 원하는 쏨땀을 커스텀해서 주문하는 것도 가능한가 보다. 여기, 쏨땀전문점인가!? 맛있어 보이는 메뉴가 너무 많아서 한참 결정장애를 겪다가, 옥수수쏨땀을 한 접시 주문했다.



대청마루처럼 꾸며진 자리에 앉으니, 낮은 담벼락 너머 거리 풍경이 훤히 내다보인다. 가정집 1층을 식당으로 꾸민 듯한 편안한 분위기. 담장 아래에 주르륵 놓아둔 화분들과 수도에 연결된 긴 고무호스가 보이는 풍경이, 누구네 집 마당에 놀러온 듯 정겹다.


곧이어 나온 ‘옥수수쏨땀’은 그야말로 ‘옥수수’로 만든 쏨땀! 난 쏨땀은 모두 그린파파야를 기본재료로 하고 ‘옥수수쏨땀’은 옥수수를 고명으로 얹어주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옥수수는 예상한 대로 아삭아삭하고 단맛이 나는 ‘초당옥수수’다.



반가운 건, 노란 옥수수알갱이 사이사이로 보이는 그린빈! 한국에서 그린빈은 냉동으로 판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아삭아삭한 생그린빈을 먹기는 쉽지 않다. 비록 기대했던 그린파파야는 없지만, 신선한 그린빈이 대신 그 빈자리를 채워주어, 처음 맛보는 옥수수쏨땀 한 접시를 게 눈 감추듯 해치워버렸다. 옥수수도 아삭아삭, 그린빈도 아삭아삭! 씹을 때마다 달큰한 수분이 터져 나와 새콤한 라임즙과 함께 밤새 잠들어있던 감각들을 깨워주니, 아침 첫 끼니로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음식이 있을까!?


빠이에 온 뒤로, 아무래도 라임즙의 상큼함에 중독되어가는 것 같다. 쏨땀엔 라임즙의 새콤함 속에 태국고추의 매콤함과 피쉬소스의 감칠맛까지 은은하게 감돌아, 수수한 듯 먹을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진작 와 볼 걸!’


여행 도중 ‘단골하고 싶은 집’을 발견하면 항상 하는 생각을 하며 아쉽게 다음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숙소 근처에 맛있어 보이는 식당과 카페가 많은데, 그간 빨빨거리며 멀리 돌아다니느라 한 군데도 가보질 못해서 오늘 특별히 날을 잡아 ‘동네순회’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쓰다듬을 시간이 필요해! 


채식을 하기 전이었다면 분명 한 번 가보았을 ‘시골버거집’. 마당에 늘어져있던 누렁이가 손님이 온 줄 알고 고개를 번쩍 든다. ‘미안, 나는 버거는 못 먹어.’ 아쉬운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이번엔 어느 집 담장 안에서 식빵을 굽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눈싸움이라도 하듯, 도전적인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는 고양이. 고작 한 살이나 되었을까? 정말로 식빵만한 주제에, 용맹하기가 그지없다. 얘, 도둑들이 너 무서워서 너희 집 담벼락은 넘을 생각도 못하겠다!



자전거를 타고 매일 지나다니던 거리를 설렁설렁 걷다가, 처음 가보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다른 길과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짤막한 막다른 길인데, 이 길 끝에 오늘 가려고 마음먹은 ‘동네까페’가 있다. 정말 이런 곳에 카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조용한 동네길. 어느 집 대문 앞에 공주님처럼 우아한 털을 가진 고양이 한 마리가 늠름하게 앉아있다.



‘너도 아까 식빵냥이처럼 집 지키는 중이니?’


말을 걸자 마자, 어라라, 곧바로 뒤집어져버리는 고양이. 온몸을 쭉-쭉- 펴더니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환영파티를 시작한다.



비단처럼 윤기가 흐르는 까만 털이 흙먼지며 꽃가루가 달라붙어 금세 지저분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주님고양이는 사진을 찍느라 잠시 바닥에 내려놓은 양산이 궁금한지 킁킁- 냄새를 맡고 몸을 비벼서 체취를 묻히느라 바쁘다.



이만하면 환영인사가 끝났나 했건만, 이제 시작이라는 듯 고양이는 이번엔 쫄래쫄래 내게로 걸어와 내 치맛자락 구석구석에 몸을 비비기 바쁘다. ‘내가 이 구역 1짱인 거 몰라? 이 길을 지나가려면 다들 먼저 나랑 놀아줘야해!’라는 듯 내 쪽으로 슬며시 궁둥이를 들이밀고 앉는 비단털고양이.



‘환영인사는 마쳤고, 이제 우리 한가하게 시간 좀 보내볼까?’라는 듯 내 앞에 털썩 배 깔고 엎드리는 고양이를 따라서, 나도 털썩 길가에 주저앉고 말았다. 양산으로 뙤약볕을 막아 그늘을 만들어주었더니, 그제야 고개를 들고 얼굴을 보여주는 고양이. 노오란 두 눈이 보석처럼 빛난다. 지도는 목적지가 바로 10미터 앞이라며 어서 가라고 재촉하는데. 그렇게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면, 갈 수가 없잖아!


간다구...? 정말 날 두고 갈 수 있겠어? 나는 코도 분홍인데!


오늘은 종일 부지런히 동네를 돌아다닐 계획이었는데, 아뿔싸, 또 잊고 말았다. 빠이에서는 그 어디엘 가든, ‘고양이를 쓰다듬을 시간’을 충분히 비워두어야 한다는 것!


서둘러 다음 목적지에 가려던 마음은 고이 접어 내려놓고, 내게 환영인사를 하느라 마른 풀잎과 꽃가루를 잔뜩 묻혀버린 고양이의 비단결 까만 털을 쓰다듬으며 오후의 한 조각을 흘려보냈다.



Copyright  2024 by 여름햇살 All Rights Reserve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