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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햇살 Dec 18. 2024

우리 뒤는 인간 너한테 맡길게!

빠이의 동물친구들


개팔자가 상팔자요? 우리도 매일매일 바빠요!


고양이를 쓰다듬느라 계획한 시간을 훨씬 지나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부지런히 걸어 닿은 조용한 동네길 끝에 초록의 품에 아늑히 안긴 자그마한 낙원이 있다. 카페가 왜 막다른 길 끝에 있나 했더니, 바로 앞에 작은 물줄기가 흐른다. 음식이 맛있다는 리뷰를 보고 찾아왔는데 이런 운치라니,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았다.



음료를 주문하고 물가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있는데, 늘씬한 누렁이 한 마리가 슬렁슬렁 카페 안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자연스레 내 앞을 지나 총총총 물가로 향한다.


막다른 길 끝에 흐르는 작은 물줄기


‘안녕, 어디 가?’ 하고 말을 걸었더니 ‘어, 왔어? 그럼 잘 놀고 가, 난 바빠서 이만-’ 하는 표정으로 스윽- 쳐다보더니 다시 바삐 가던 길을 간다. 요 녀석, 모르긴 해도, 이 시간에 물가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있나 보다.


왔어? 응, 잘 먹구 가~


흔히들 ‘개팔자가 상팔자’라고 일컬으며 개들은 아무 생각 없이 종일 늘어져 아무 때나 먹고 잔다고 오해하지만, 강아지나 고양이들 모두 알고 보면 자신들이 스스로 정해둔 하루 일과가 있고, 그 일과를 정확히 지키는 것을 좋아한다. 매일매일 정해진 일과를 수행해내는 것이 생존본능이 야기하는 불안과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성취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시계’를 볼 줄 몰라도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밥을 먹고, 사냥놀이를 하는 고양이나 강아지들을 보면 인간이 ‘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시계’를 발명하여 스스로 정해둔 시간 안에서 스스로에게 달성해야할 일감을 부여하며 생활하기 시작한 것 또한 ‘문명’보다는 ‘생존의 본능’으로부터 비롯된 행위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즈>가 대변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본능에 따라 만든 사회질서가 오히려 그 인간성을 말살하는 결과에 이르기도 하니. 인간의 삶이란 생존의 본능과 인간성 사이에서 벌이는 끝없는 줄다리기이며, 그 줄다리기들의 기록이 역사가 아닌가 싶다.


아유, 인간아 좀 이따 같이 놀아줄게! 지금은 빨리 놀이터에 가야해!


물줄기는 카페 앞 완만한 언덕 아래에 흐르고 있어서, 총총총 내리막길 아래로 바삐 사라져버린 누렁이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질 않는다. 한낮의 햇살을 피해 물가에서 물장구라도 치려나? 누렁이의 오늘 오후일과는 과연 무엇일지 궁금해 하고 있는데, 이번엔 고등어고양이 한 마리가 뽈뽈뽈뽈 내 앞을 지나 언덕을 내려간다. 오늘 이 동네 고양이랑 강아지들 정모하는 날인가? 자리에서 일어나 언덕 아래를 기웃거려보니, 고등어고양이는 언덕 중반 즈음에 누군가 잔뜩 쌓아둔 모래를 파헤치느라 신명이 났다. 아까 사라진 누렁이는 좀 더 아래에서 또 다른 모래무덤을 갖고 노느라 바쁘다.



곧 사라질, 혹은 곧 다시 세워질


언덕 아래에 놓아둔 건축자재들을 보니, 아무래도 이 물가에 언덕을 깎고 평상을 만들려나 본데. 그 덕분에 동네고양이들과 강아지들에게 신나는 놀이터가 생겼다.


초등학교시절에 수업을 마치면 으레 친구들과 동네 놀이터로 몰려가서 책가방을 던져놓고 저녁 먹을 시간이 될 때까지 실컷 놀곤 했는데. 놀이기구를 타는 것도 물론 재미있었지만, 그 시절의 난 지금 내 눈앞의 고양이와 강아지처럼 모래를 갖고 놀기를 좋아했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모래 속에서 백 원짜리 동전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잘 뭉쳐지지 않는 모래를 두들기고 또 두들겨서 상상 속의 성이나 동굴을 지어내는 일에 빠져서, 그때의 난 자주 밥을 먹는 것도 잊고 해진 뒤까지 놀이터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곤 했다. 어차피 짓고 나면 얼마 안가 허물어질 모래성일 뿐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짓고 나면 금세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 시절의 나와 내 친구들은 매일매일 그리도 열심히 모래를 단단히 뭉치는 일에 골몰했었던 것 같다.


모래 갖고 놀기에 여념이 없는 강아지와 고양이들을 보니 동심이 새록새록. 밥 먹는 것도 잊고 노느라 바빴던 어린 우리들을 찾아 저녁마다 놀이터에 나와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부르곤 했던 우리들 부모님도 이런 마음이었을지. 매 순간 순수하게 삶에 충실한 빠이의 동물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인간은 과연 동물과 얼마나 다르기에 스스로를 ‘인간’이라 정의하였는지, 끊임없이 되묻게 된다.



자리로 되돌아와 보니 주문한 음료가 나와 있다. 크리스마스는 이미 지났지만, 메뉴판에서 ‘크리스마스 스페셜 마차딸기라떼’를 발견한 순간 주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한 초록색 마차와 선명한 빨간색 딸기, 하얀 오트밀크가 층을 이루는 모습이, 빠이의 풍경들을 컵 하나에 그대로 옮겨 담은 것 같다. 진한 초록의 빛깔만큼이나 진하고 쌉싸름한 마차에 달콤한 딸기과육이 그야말로 불빛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떠올리게 하는 축제의 맛!



곧이어 나온 팟타이도 ‘그래, 이 맛이야!’소리가 절로 나오는 맛이다. 어젯밤 중심가 건너에서 먹었던 팟타이가 별 다른 재료를 넣지 않고도 술술 넘어가는 ‘할머니의 손맛’이었다면, 오늘의 팟타이는 베이컨을 잔뜩 넣고 모짜렐라치즈를 듬뿍 얹어주는 세련된 카페에서 시킨 김치볶음밥 같은 맛! 큼직한 새우와 두부를 듬뿍 넣고, 아삭아삭한 숙주와 신선한 쪽파도 충실히 곁들인 풍성함이 ‘크리스마스 스페셜 마차딸기라떼’가 터트린 축제의 축포를 화려하게 이어가주었다.


우리 뒤는 인간 너한테 맡길게!


따뜻이 빛나는 오후의 빛을 노래하듯 이따금 새들이 지저귀고, 고요한 물줄기를 사이에 두고 저 너머 언덕 위엔 무성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빨간 집이 빼꼼 동화처럼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이 평화로운 풍경 속에 털북숭이친구들이 빠지면 섭섭하지 라는 듯 부리나케 달려온 까만 강아지 한 마리가 덤불을 뒤적이다가 총총총 언덕 아래로 내려간다. ‘너도 모래장난 하러 가니?’ 물으며 뒤따라갔더니, 역시나 까만 강아지의 관심사는 언덕 여기저기에 쌓인 모래더미들. 이거 아무래도 여기가 요즘 이 동네 털북숭이친구들의 ‘핫플’인가 보다.



모래장난에 흠뻑 빠진 까만 털북숭이친구를 보고 있으려니, 아까 보았던 고등어고양이가 나타났다. ‘다 놀았어? 이제 뭐할 거야?’ 물으며 뒤를 쫓아갔더니, 카페 밖으로 나가 총총총 길을 건넌다. 카페와 마주보고 있는 집이 고등어고양이가 사는 곳인가 보다. 그런데, 이 집에 사는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다. 길을 건너기 전에 눈에 보인 건 고등어고양이와 크림색고양이, 그리고 누렁이 한 마리였는데, 길을 건너갔더니 ‘뭐야, 손님 왔어?’라는 듯 마당 안쪽에서 처음 보는 코트를 입은 고양이들이 뽈뽈뽈 바삐 걸어 나온다.



뽀얀 크림색 코트를 입은 고양이가 제일 먼저 내 앞에 넙죽 드러누워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그 앞에 아수라백작처럼 멋진 얼룩덜룩 코트를 차려입은 고양이도 다가와 앉았다. 고양이가 엉덩이를 사람 쪽을 향해 두는 건 ‘당신이라면 언제 상위포식자가 공격해올지 모르는 이 험한 야생에서 믿고 내 뒤를 맡길 수 있다’는 뜻이라는데. 다른 집 고양이들처럼 다가와 열성적으로 몸을 비비거나 바닥에 뒹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이 고양이들은 그저 내게 엉덩이를 맡기고 털퍼덕 주저앉는 것으로 ‘우린 너를 믿어. 우리 뒤는 너한테 맡길게. 그러니까 이렇게 같이 놀자!’라는 환영인사를 대신했다.


인간이 뒤를 봐줄 때는 이렇게 집 밖에 털퍼덕 드러누워있어도 괜찮아!


물론 한 마리 정도는 예외도 있었는데, 나를 이곳으로 인도해온, 대장처럼 늠름한 자태를 뽐내는 고등어고양이는 마당에서 어린 고양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자 혼자 조용히 도로 맞은편으로 가서 ‘아직은 당신을 완전히 다 믿지는 않아’라는 듯 신중한 눈으로 지켜보는 중이다.


나까지 다 넘어왔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난 아주 신중한 고양이거든


가끔은 친한 친구를 만나도 대화가 멎고 정적이 찾아오면 어색해지곤 하는데. 오늘 처음 만난 빠이의 동네친구들과는, 서로 눈이 마주치지 않아도, 정적 속에 그저 털북숭이엉덩이만 보고 있어도, 오히려 마음속에 따뜻한 신뢰가 차오른다. 그저 살랑살랑 뺨을 스치며 가는 바람 속에, 아무런 말도 없이, 그러나 ‘함께’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보내는 오후의 작은 시간. 굳이 소리 내어 떠들지 않아도, 조용히 서로를 믿을 줄 아는 빠이의 자그마한 동네친구들. 그 맑고 투명한 마음에, 내 마음에도 말갛게 여유가 샘솟는다.


한참을 말없이 서로의 뒤를 지키는 나와 아기고양이들을 보더니, 고등어고양이도 일어나 내게 다가온다. 내 치맛자락에 몇 번 몸을 부비더니, 내게로 엉덩이를 향하고선 얌전히 자리에 앉는 고등어고양이. 마침내 녀석에게도 신뢰를 얻은 것 같아서, 괜히 뿌듯해진다.


자, 내 뒤도 너한테 맡길게


한낮의 열기가 잦아들며 선선한 저녁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고양이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킨다. 슬슬 다음 일과를 해낼 시간인가 보다. 고등어고양이가 제일 먼저 물가로 달려가고, 크림색고양이도 그 뒤를 따라간다. 나도 이제 슬슬 다음 일과를 수행하러 떠나볼까. 카페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집어드는데, 누렁이 한 마리가 바삐 내 앞을 지나쳐 총총총 물가로 내려간다. 어라, 아까 그 누렁이랑은 다른 녀석 같은데. 녀석들, 저녁 먹을 때가 될 때까지 ‘동네핫플’에서 실컷 놀겠구나! 생각하며 터벅터벅 길을 나선다.


혼자 도로를 어슬렁거리던 점박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달려와 ‘집에 가는 길이야?’라며 반겨주고, 모퉁이 잡화점의 개들은 아침에도 저녁에도 변함없이 바닥에 녹아내린 채로 뒹굴뒹굴. 곧 지금 묵는 숙소를 떠난다는 생각에, 잠시 사찰에 들렀다. 번뇌라도 태우는지 물가에선 이른 저녁부터 연기가 자욱히 피어오르고. 한참을 그 앞에 서있다 걸음을 옮기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의 등 뒤로 자라난 나뭇가지들이 마치 삶의 가시덤불 같다. 소들은 오늘도 서로 정답고, 산 너머에선 서서히 붉은 석양이 번져온다.  



지글지글 불판 아래 보글보글 수끼


해진 뒤, 며칠 전 아침산책길에 봐두었던 수끼집으로 향했다. 바로 앞에 화롯불을 놓아두고 냄비를 계속 끓이면서 먹는 수끼는 쌀쌀한 빠이의 저녁에 제법 어울리는 음식.


이곳에서 파는 건 정확히 말하면 수끼가 아니라 ‘무카타’인데, 가운데가 볼록하게 올라온 냄비의 가장자리에 육수를 부어놓고, 볼록하게 올라온 불판에 먼저 삼겹살을 구워먹으며 기름이 자연스레 육수로 떨어지게 한 뒤, 육수에 각종 야채와 해산물을 넣어 수끼-샤브샤브-를 해 먹는 음식이다. 가족들이 운영하는 식당인지, 자리에 앉았더니 주인장아저씨가 두툼한 삼겹살 비계 한 덩어리 툭 얹은 냄비를 화롯불 위에 올려주고, 뒤이어 십대로 보이는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냄비에 육수를 부어주며 재잘재잘 설명을 해준다. 나는 야외에 자리를 잡았는데, 실내에 고기, 야채, 해산물이 뷔페처럼 잔뜩 차려져있어서, 알아서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가져다 먹으면 된단다.


실내에 들어가 보니 동네주민들로 인산인해. 일단 싱싱한 야채가 다양하게 마련되어있어 합격점! 향채들도 여러 종류 있어 좋았다. 일단 바구니에 야무지게 종류별로 쓸어 담고. 소, 닭, 돼지는 먹지 않으니 건너뛰고, 해산물 코너로 가보니 역시나, 대부분이 냉동이다. 빠이는 바닷가에서 제법 먼 산간지역이고, 도로사정도 구불구불 험하다 보니, 아무래도 신선한 해산물을 공급하기는 그리 쉽지 않을 터. 미리 예상했던 바여서, 이 정도면 흡족하다. 일단 샤브샤브에서 빠질 수 없는 배추부터 바구니에 담고, 오징어와 홍합살, 팽이버섯, 태국식 두부,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은 앵그리버드 모양 어묵도 종류별로 담았다.



고기가 없어도 먹을거리는 풍부했지만, 문제는 삼겹살을 굽지 않으니 기름이 없어서인지 오징어가 금세 불판에 눌어붙는다. 이 불판에 삼겹살부터 구워먹으면 정말 끝내주겠지만! 이제는 먹지 않는 음식에 미련두지 않고 열심히 육수에 퐁당퐁당 가져온 것들을 빠트렸다. 부지런히 두어 접시 더 음식을 담아와 먹고, 마무리로 쌀국수도 말아먹고, 계란 넣고 죽도 끓여먹으니, 별로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배가 부르다.



마지막으로 과일코너에 가서 용과를 담아오는데, 구석에서 사람들이 쿵쿵-대면서 연신 뭘 찧고 있다. ‘설마...!’하며 가까이 가보니, 이럴 수가, 셀프쏨땀코너다! 배는 다 채웠지만, 팔을 걷어붙이고 쏨땀제조에 나섰다. 채칼로 그린파파야를 서걱서걱 절구통에 썰어 넣고, 마른 태국고추, 피쉬소스, 방울토마토, 라임을 눈대중으로 척척 집어넣은 뒤 절구로 쿵쿵 짓찧으며 뒤섞어주면 뚝딱 쏨땀 한 접시 완성. 제대로 한 게 맞나, 반신반의하며 자리로 돌아와 맛을 보는데, 기대했던 쏨땀의 바로 그 맛이다!


까만 밤이 되면 더욱 빛나는, 산골마을 나무에 걸린 크리스마스장식들


우리 모두의 고양이들


간만에 제법 긴 저녁식사를 했다. 식당을 나오니 까만 어둠이 그새 더 까맣게 짙어졌다. 풀벌레 우는 소리 흐르는 까아만 산골마을을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문득 하루를 돌아보았다. 오늘 하루는 참 길었던 것 같은데, 뭘 했더라... 음, 제일 먼저, 아침에 일어나서 뒤뜰에서 고양이를 쓰다듬었지. 그리고 또, 모퉁이 잡화점에서 고양이를 쓰다듬었지. 그리고 동네 개들하고도 인사하고. 새로 발견한 동네맛집에선 동네 고양이들과 강아지들이 우르르 놀러가는 핫한 놀이터도 알아내고. 그리고 또, 동네고양이들과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보냈지...


오늘은 동네카페 몇 군데를 순회하며 일을 좀 하려고 했는데, 고양이를 쓰다듬는 데 시간을 전부 써버렸다!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나만 없어, 고양이...’ 신세가 되겠지만, 빠이에서는, ‘내 고양이’와 함께 살지 않는 사람들도 매일매일 고양이를 쓰다듬을 시간을 충분히 비워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작은 산골마을의 고양이들은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고양이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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