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쉼, 빠이에서 보낸 열흘
늦었지만 아직 많이 늦진 않았어!
카페를 나와 다시 점심식사를 했던 쏨땀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에 바질오징어덮밥을 먹어보니 셰프님 내공이 상당하신 것 같아서 다른 메뉴들도 전부 다 먹어보고 싶은데, 쏨땀식당은 점심에만 잠깐 영업을 하고, 나는 사흘 후면 빠이를 떠나야한다. 게다가 남은 날 중 하루는 식당휴무일이다. ‘빠이 첫 단골집의 모든 메뉴를 정복하겠어!’라는 꿈이, 꽃봉오리를 틔우자마자 허무하게 땅으로 뚝 떨어져버렸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지! 마침 오늘이 Wellness in the Valley에 묵는 마지막 날이어서, 쏨땀식당이 닫기 전에 먹고 싶은 메뉴를 하나 포장해서 남은 하루 동안 뒤뜰의 논뷰view를 실컷 즐기기로 했다. 포부 넘치는 걸음걸이로 식당에 들어섰더니, 점심에 주문을 받았던 언니가 내 얼굴을 알아보곤 먼저 반갑게 맞아준다.
쏨땀메뉴판과 식사메뉴판을 번갈아 들여다보며 한참 고심한 끝에 저녁식사 메뉴를 정했다. -태국어 메뉴판의 번역들이 영 요상하게 나와서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북부지역 레시피로 추정되는 쏨땀과 해산물을 넣은 볶음 쌀국수를 주문했더니, 카운터 안쪽의 훤히 들여다보이는 식탁에서 곧바로 그린파파야를 깎기 시작한다. 카운터를 보던 언니가 태국어로 ‘해산물 볶음 쌀국수 하나!’를 외치니, 저 안쪽 주방에서 ‘해산물 볶음 쌀국수?’ 하고 주문을 확인하며 곧장 스토브 위에 팬을 올린다. 혹시 자매인지 아니면 그저 동업을 위해 의기투합한 동료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 주문을 받고 요리를 하는 이들은 모두 젊은 여성들이다.
내가 주문한 음식들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는 건 행운이자 즐거움! 태국어는 단어 몇 개 겨우 익혔을 뿐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이따금 깔깔깔 웃음꽃을 피우며 오가는 세 여자들의 정다운 대화 속에 차근차근 빠르고도 야무지게 완성되어가는 음식들을 보고 있으니, 이곳 음식들에서 정겹고도 옹골찬 집밥 맛이 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후다닥 음식을 만든 뒤, 식기 전에 후다닥 예쁘게 담아 건네는 것까지, 지켜보는 사람의 기분까지 절로 좋아지는 완벽한 분업과 협업이었다!
이 식당은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구글지도에서 몇 개 안 되는 현지주민들의 후기를 읽어보곤 ‘동네맛집의 냄새가 난다’ 싶어 ‘Wellness in the Valley에서 묵는 일주일동안 매일매일 가야지!’하고 결심했던 곳인데, 막상 빠이에 도착하고 나니 ‘가까운 식당은 나중에도 충분히 갈 수 있으니까’ 하는 생각에 매일 중심가로, 강 건너로, 멀리멀리 나돌아 다니느라 너무 늦게 첫 방문을 하고 말았다.
더 가까이
더 오래 시선을 둘수록
더 궁금해지는 인간사
빠이에선, 중심가와 동떨어진 곳에 머물면서, 아침엔 산책 겸 가까운 동네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오후엔 논과 산에 둘러싸여 요가를 하고, 저녁엔 뒤뜰에서 모기향 피워놓고 풀벌레 우는 소리를 벗 삼아 차 한 잔 마시며 한갓지게 보내려고 했는데. 떠날 날이 코앞에 다가와 문득 지난 일주일을 돌아보니, 가져온 신발들의 밑창이 다 닳도록 매일매일 참 부지런히도 돌아다녔다. -게다가 논뷰view를 보며 매일매일 요가수업을 들으려고 일부러 이 숙소를 골랐으면서, 수업신청은커녕, 서울에서부터 바리바리 싸들고 온 운동복들을 여행가방구석에 처박아두고 한 번 꺼내보지도 않았다!-
마음은 늘 번잡한 도시를 떠나 홀로 무위의 시간을 보내는 여행을 꿈꾸는데. 막상 구불구불한 산길을 몇 시간이나 달려 외딴 산골마을까지 오고 나니, 도시에 있을 때보다 더 사람 사는 모습들에 눈길이 간다. 서울에선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채로 몇 년을 살았는데, 빠이에선 모퉁이 잡화점에 사는 아이들은 몇 명이고, 고양이, 강아지는 전부 몇 마리인지, 동네식당에서 연신 웃음꽃을 피우며 일하는 세 여자들이 혹시 자매인지 아닌지 따위를 시시콜콜 궁금해 하며 하루를 보낸다.
복잡한 대도시에선 ‘이제 사람 사는 모습은 볼 만큼 봤다’고 자만했건만, 이 작은 산골마을에선, 몇 안 되는 주민들이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들여다볼수록 더 궁금해진다.
공동체의 규모가 커질수록, 인간은 ‘우리가 왜 굳이 처음에 이런 삶의 형태를 택했는지’에 대해 쉽게 잊는다. 그 속에서 매일 쉴 틈 없이 쳇바퀴를 돌리며 살아갈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어느 순간 밖으로 튕겨져 나와 주변부를 걷기 시작하니,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너무나 커져버린 지금의 공동체들이 어느 순간부터 까맣게 잊고 만, 먼 옛날 헐벗은 채로 자연의 허허벌판 속에 툭- 내던져지듯 태어난 사람들이 굳이 다 함께 모여 살기를 택했던, 본래의 목적과 의미들이.
마음의 길들을 거닐며
걷다가 마주친 어느 집 마당, 나무를 잘라 만든 빨래건조대 위에 내 키 정도는 훌쩍 가볍게 뛰어넘을 것 같은 커다란 곰인형이 떡 하니 널려있다. 동심 가득한 까만 눈동자는 파란 하늘을 향해 반짝반짝 빛나고, 볼록한 뱃살은 한가득 뙤약볕을 쬐고서 뽀송뽀송해지는 중. 와, 빨래 참 잘 마른다!
따뜻한 햇살 아래 구김살 하나 없이 마른 빨래들을 보고 있으면, 잔뜩 젖어 구겨져있던 내 마음 구석구석도 어느새 덩달아 뽀얗게 펴진다.
중심가에 가려면 반드시 지나쳐야하는 병원 담벼락 아래엔 오늘도 터줏대감 누렁이가 털퍼덕 주저앉아 인간세상을 관망하는 중. 이제는 나보다 덩치가 큰 개들이 떡하니 길목을 막고 있어도 멈춰 서서 다른 길로 가야하나를 고민하지 않는다. 설렁설렁 걷던 대로 걸어가면, 개들도 그저 ‘늘상 이곳을 지나다니는 인간들 중 하나려니’ 하며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빠이 사람들이 보는 풍경 속엔 늘 고양이와 강아지, 말, 닭 따위의 동물들이 자리하고 있다면, 빠이의 동물들이 보는 풍경 속에도, 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여기 동물들이 있다고, 혹은 여기 사람이 있다고, 부산을 떨 이유 따윈 없이, 그저 자연스레.
비료포대를 잔뜩 쌓아둔 가게엔 슬리퍼만 덜렁 벗어두고 자취를 감춘 주인 대신 강아지 세 마리가 늠름하게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는 중.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한낮의 동네어귀, 이제는 단단하게 굳어져 길이 된 회색 시멘트 속엔 한때 동네털북숭이친구들이 신나게 밟고 다닌 발자국들이 가득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꼭 그 둘레길을 걸었던 사원. 정성을 다해 조각해낸 사원의 지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여름의 땡볕 아래에 하나하나 온 마음을 기울여 세심하게 조각을 완성해낸 사람들의 인고의 시간들을, 나도 모르게 헤아려 보게 된다. 일 년 내내 태양이 비추는 따뜻한 나라라 하여, 어찌 인생에 감내해야할 고통들이 없었을까. 때가 되면 저절로 나무가 달콤한 열매들을 주렁주렁 맺어내고, 혹한을 대비해 곳간을 채워둘 필요도 없는 이곳에서,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벼리어내며 이토록 섬세한 조각들을 완성해내게 하였는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석상들 사이에, 그간은 본 적 없던 닭 한 마리가 앉아있다. 선명한 붉은 색 볏과 단지 까만색이라고 하기엔 오묘한 청록빛 오로라를 품은 우주와도 같은 신비로운 빛깔의 꽁지를 뽐내는 녀석, 담장 위에 올라선 모습이 늠름하기 그지없다.
자연이 빚어내는 색들은 저리도 화려한데, 인간의 살갗과 머리카락은 이리도 보잘 것 없었기에, 인간은 자연을 본 따 그 모든 색들을 만들어내어 스스로를 치장하기 시작했던 것일까.
이제 인간은 원하는 그 어떤 색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데, 정작 그 모든 색들의 근원인 자연이 왜 그리도 다양한 색깔들을 품고 있는지, 서로 다른 색깔들이 왜 그 자체로 존재의 의미를 갖는지에 대하여는 아직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오늘은 오늘의 만찬을
저녁을 먹기엔 좀 이른 시간이지만, 포장해온 쌀국수가 아직 따끈따끈할 때에 서둘러 뒤뜰에 식탁을 차렸다. 실은 쏨땀식당에 가기 전에, 부지런히 걸어서 과일가게에 들렀다. 중심가에 갈 때마다 참새방앗간처럼 들러 과일을 한 봉지씩 사던 가게인데, 오늘은 혼자서 긴 저녁만찬을 즐길 생각으로 구아바와 파파야를 각각한 봉지씩, 총 두 봉지를 사는 사치를 부렸다. 그러고 보니, 이 과일가게가 쏨땀식당에 앞선 내 ‘빠이 첫 단골집’이구나. 부지런한 청년이 틈틈이 정갈하게 깎아두는 과일은 하루 중 언제 들러도 항상 신선하다.
근처에 단골식당, 단골카페, 단골과일가게까지 생겼으니 이 숙소에 열흘만이라도 더 머물면 좋을 것 같은데. 논뷰view를 바라보며 아침체조를 하는 것도 내일이 마지막이다. 치앙마이에 미리 숙소를 예약하고 값까지 전부 지불해두지 않았다면, ‘배낭여행객들의 무덤’이라는 별명대로, 빠이에 남은 날들을 전부 묻었을 텐데. 떠나야함이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가보지 않은 길들이 마음 한 구석에서 잔잔히 설렘이라는 파문을 일으킨다.
그러니, 아쉬움은 내일의 몫으로 남겨두고, 오늘은 오늘의 만찬을.
쏨땀에 싱싱한 배춧잎을 두어 장 함께 넣어 포장해준 것을 보니, 쏨땀식당 카운터 바구니에 수북이 담겨있던 배춧잎들은 아마도 각자 먹고 싶은 만큼 알아서 가져가라고 놔둔 것이었나 보다. -실제로 이후 좀 더 여행을 하다 보니 배춧잎, 숙주, 쪽파 같은 것들은 각자 알아서 얹어 먹도록 놔두는 식당들이 많았다-
대체 뭔지도 모르면서 패기 넘치게 주문한 쏨땀은 짙은 색의 국물에 젓갈의 빛깔이 확연하다. 현지인이 쓴 이 식당 후기를 읽어보니 태국 내에서 맛있기로 유명한 ‘이싼’ 지역 음식들을 아주 제대로 요리한다는데 -여태까지 경험한 바로는 이싼음식이 대체로 맵고 칼칼하고 깔끔한 맛이 나는 것들이 많아서 한국인들의 입맛에 잘 맞는 것 같다- 이싼이나 빠이와 인접한 옆나라 라오스에서는 쏨땀을 만들 때 민물게나 잡어 따위를 발효시킨 젓갈을 넣어 색이 좀 더 검고 진하다고 한다. 맛은? –한국의 남도음식을 좋아하는 내 입맛엔- 생각보다 젓갈의 맛이나 향이 강하진 않았던 것 같다. 아직은 무궁무진한 쏨땀의 세계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알아가는 중!
쏨땀을 한 입 맛보고 뒤이어 아직 따끈따끈한 해산물 볶음쌀국수를 한 젓가락 입에 넣었는데, 국수의 익힘 정도가 내 마음에 쏙 든다! 군데군데 투명한 빛깔이 나도록 익힌 넓적 쌀국수가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쫀득쫀득하다. 새우와 오징어 모두 통통하고 신선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간도 딱 맞는다. 숙소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 식당을 왜 이제야 간 거지!? 빠이에 온 첫날부터 매일매일 부지런히 발도장을 찍었어야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내일 아침에 또 가야겠다. ‘또 먹을 결심’을 하면서, 쏨땀, 쌀국수, 파파야, 구아바, 좋아하는 것들로만 가득 채운 저녁식탁을 하나씩 차례로 깨끗이 비워냈다.
이 밤을 한 자락 태우며
오늘은 마른 장미 꽃봉오리를 잔을 가득 채울 만큼 넣어 차를 우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 한 잔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뒤뜰 구석에 새 모기향을 하나 뜯어 불을 붙였다.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내일이면 헤어져야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본다. 어느덧 해가 지고, 차갑게 날을 세우던 밤이, 아롱아롱 피어오른 자그마한 열기들에 사르르 누그러진다.
어릴 적 시골에 가면 여름엔 항상 대청마루 끝에 뱅글뱅글 미로 같은 모기향이 타고 있었다. 아침이 되어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문을 열면, 밤새 소리 없이 연기를 피워낸 작은 미로는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까맣게 타버린 마지막 한 조각만 쟁반 위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곤 했다. 막상 그 시절엔 건강에도 좋지 않고, 공기도 오염시킨다는 모기향이 추억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왜인지, 빠이의 동네구멍가게에서 구석에 쌓여있는 뱅글뱅글 모기향들을 보자마자 내 손은 덜컥 라이터와 함께 녀석을 집어 들고 말았다.
오늘이 지나면 아마도 더는 이 모기향을 피우게 될 것 같지 않으니. 서늘한 고요 속에 하나 둘 피어나는 장미꽃봉오리 띄워 보내며, 이 밤의 한 자락을 조용히 태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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