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어둠은 내일의 빛을 품고서
석류나무네 가족사진
아침햇살이 활짝 두 팔 벌린 거리로 나서자마자, 그 속에 무르익은 빨간 열매를 만났다. 몸집은 아직 자그마하지만 밑동이 뾰족뾰족하게 터져있는 모양이 아무리 봐도 석류인데, 바로 옆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주먹만 한 크기로 자라난 열매가 ‘정답!’을 외쳐준다. 여지없이 내가 아는 석류의 모습. 갓 열매가 되어가기 시작한 새내기와 이젠 제법 듬직하게 자라난 청년이 나란히 생의 가장 묵직한 순간을 향해가는 곁엔, 보드라운 꽃잎들을 속에 가득 품은 꽃송이들이 단단한 껍질 속에 몸을 움츠린 채 활짝 피어날 때를 엿보고 있다.
울창하게 뻗은 나뭇가지들 끝에 앞다투어 자리를 차지한 푸르른 잎사귀들과, 그 틈바구니에서 이제 막 피어나려 도움닫기 중인 꽃봉오리들과, 꽃이 지고 마침내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한 아기열매들과, 햇살에 주렁주렁 여물어가는 마지막 결실들까지, 마치 석류나무네가 가족사진을 찍으러 모인 것처럼 나무의 일생이 전부 한 자리에 모여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은 –오늘날엔 인간들에게 놀림거리로 더 자주 지목 당하는- ‘아메바’로 대표되는 단세포로부터 진화해왔는데, ‘죽음’은 이 과정에서 생명이 영원히 살기 위해 스스로 고안해낸 불멸의 시스템이다. 다양한 천적과 예측하지 못한 위기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확률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은 먼 옛날의 생명체들은, 생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 자신의 전성기에 씨를 퍼트리고, 그리하여 다음 세대가 태어나면 바통을 넘겨주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이 남긴 그 유전자 속에 영속하기를 택했다.
그리하여 꽃은 작은 봉오리 속에 숨죽인 채 오직 자신만의 계절을 기다렸다가, 마침내 온도와 습도와 빛과 바람이 모두 다 맞아떨어지는 순간을 맞이하면 온 힘을 다해 피어나고, 부지런히 열매를 맺고, 씨를 퍼트리는 임무를 다한 뒤, 미련 없이 메말라 떨어진다. 끝없는 생명연장을 꿈꾸며, 요즈음엔 장기가 늙어 제 기능을 못하게 되면 갈아 끼울 ‘인공장기’를 개발 중이라는 인간들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이 ‘영원히 살기 위해’ 스스로 고안해 낸 그 섭리를 거침없이 거스르는 유일한 생명체인지도 모른다. 그 끝이 과연 여태까지 없던 새로운 생존의 방식을 탄생시키는 진화가 될지, 아니면 종말일지 –세대교체가 빨리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종은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사라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은 시간 내게 결론이 날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이 육신은 언젠가 더 무한한 삶을 위해 반드시 죽음을 맞이할 것을 알기에, 그 모든 생명들은 주어진 찰나에 충실한다. 파아란 하늘을 향해 온몸을 한껏 펼친 나팔꽃들 또한, 영원한 삶을 위한 죽음의 본능 속에서, 더없이 찬란한 빛깔로 오늘의 살아있음을 마음껏 발산한다.
오늘의 살아있음
인간 또한 예외는 아니다. 한적한 동네길을 걷다 보면 심심찮게 마주하는 빨래 말리는 모습은, ‘오늘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인간사의 소소한 풍경들 중 하나. 비걱정, 도둑걱정, 먼지걱정 없이 담장 밖에 덜렁 내놓은 빨래건조대에서 태양의 어루만짐을 받아 뽀송뽀송하게 마르는 중인 옷가지들을 보면 덩달아 마음이 태평해진다. 골목 여기저기에 무심하게 놓여있는 아이들 장난감도 언제 마주쳐도 괜히 기분 좋은 풍경들이다.
내 ‘오늘의 살아있음’은, 당연히 ‘오늘의 한 끼’로부터. 지나가면서 눈여겨봐 두었던 또 다른 동네식당에 왔다. 그간 ‘내 영혼의 태국음식’인 바질오징어볶음덮밥을 원 없이 먹었으니, 오늘은 태국식 오징어무침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초고추장으로 새콤하게 양념해서 아삭아삭한 미나리와 함께 무쳐내는 한국식 오징어초무침에 비하면, 태국식 오징어무침은 아주 정중한 맛. 저녁에 먹으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첫 끼니로는 오히려 좋아! 다만 들깨가루와 비슷하게 생긴 정체 모를 향신료는 약간 텁텁한 맛이 있어서, 아직은 서로 알아가는 중이다.
‘태국식 집밥’에 빠질 수 없는 쏨땀도 주문했다. 내 최애는 그린파파야를 채 썰어 만드는 태국식 기본쏨땀이지만, 오늘은 특별히 옥수수쏨땀을 주문했다. 태국은 찰옥수수보다 우리나라에서 ‘초당옥수수’라고 부르는 달콤한 옥수수가 더 흔한데, 쪄서 먹어도 맛있지만 생으로 먹으면 아삭아삭한 식감에 단맛이 나는 수분이 풍부해서 별미다.
쌀국수도 주문했는데, 주문한 음식들이 간이 별로 세지 않은 편이라 사실 국수는 곁들이지 않아도 될 뻔했다. 아마도 메뉴판을 볼 때엔 태국식 오징어초무침이 한국식과는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무의식 중에 초고추장에 무친 오징어무침의 새콤한 맛을 떠올리며 ‘그렇다면 국수도 있어야지!’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없어도 될 뻔했지만, 일단 시켰으니 맛있게 다 먹는 것이 인지상정! 치앙마이의 동네식당 탐험 두 달째, 이제는 익숙해진 맛들로부터 한 발자국씩, 미지의 맛들이 기다리고 있는 저 너머로 발걸음을 떼어본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부른 배를 두드리며 식당을 나와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커다란 잎사귀들이 만들어준 그늘 아래에서 운치 있는 한낮을 보내는 중인 고선생님과 마주쳤다. 까만 털은 밝은 한낮에 더욱 윤기가 흐르고, 그 속에 노랗게 빛나는 두 눈은 여전히 밤의 신비를 잃지 않았다.
고양이들의 눈 색깔은 여러 가지인데, 인간들로부터 오랫동안 ‘불길한 징조’라는 누명을 뒤집어써 온 까만 고양이들의 눈은 대부분 선명한 노란색으로 묘사되는 것 같다. 한낮에도 한밤의 신비를 품고 있는 오묘함 때문일까? 대낮에 마주친 이 까만 고양이 역시도, 까만 밤에 환하게 달이 뜬 모습을 온몸에 선명하게 품고 있다.
검은고양이가 불길한 일을 불러온다고 누명을 씌우기 시작한 사람들은, 아마도 까만 밤에 환히 달빛이 비추면 남김없이 파헤쳐지고 말 어떤 비밀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불길한 것은, 시선이 닿는 끝이 아닌 시선이 시작되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
우연히 마주치는 것만 같은 그 모든 것들은, 결국 마음이 이끈 만큼 눈에 들어오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조차도, 결국은 모두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간판의 글자들이 드문드문 떨어져 나간 바버샵도, 마음이 보는 대로 보인다. 어엿이 존재해야할 글자를 잃음으로써 소통의 장애를 얻었다고 본다면 그런 것이겠고, 해리포터의 9와 3/4 정류장처럼 신비한 통로가 생겨났다고 본다면, 그 역시 그런 것이리라.
여름의 부케들
가느다란 술 끝마다 하얀색 리본을 묶어 달아 둔 듯한 꽃, 슬그머니 곁에 다가가보니 크기가 내 얼굴만큼이나 크다. 일 년 내내 따뜻한 나라들은 꽃도 나무도 거인처럼 하늘을 향해 성큼성큼 자라나는데, 그 속에 파묻혀있으면 문득 지금의 인류는 보지 못한 공룡들의 시대가 눈앞에 어렴풋이 그려지는 것도 같다.
공룡이 지구를 점령했던 시절엔 초식공룡들에게 먹히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식물들이 거대하게 자라났다는데 –물론 초식공룡들도 이 싸움에 지지 않으려 목길이를 계속 늘려서, 초식공룡들은 대부분 목이 길다- 남국의 초목 속을 걷다 보면 나는 전혀 알 수 없는 그 시절을 아주 조금이나마 상상해 볼 수 있게 된다. 이 꽃은 어떤 천적을 이겨내기 위해 이리도 크고 화려한, 마치 부케 같은 모양으로 자라난 건지. 느긋한 걸음 속에서 어쩌면 내 삶엔 무용할지도 모르는 의문을 가져본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이번엔 선명한 붉은색 꽃이 큼직하게 피어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초록 속에 누가 누가 더 눈에 띄게 피어나나를 경쟁하듯 가지각색의 자태를 자랑하는 여름의 부케들. 굳이 손에 꺾어 들지 않아도, 그 곁을 걷다 보면 환한 햇살로 드레스를 지어 입고서 저 멀리에 군림하는 태양을 맞이하러 나온 신부가 된다.
호랑이들의 후식
어느 집 마당에 주렁주렁 열린 파란 망고열매들과 마주쳤다. 가느다란 줄기들이 그 끝에 묵직한 열매들을 대롱대롱 매달고 버티는 모습이 대견하다.
망고나무더러 대견하다 칭찬했더니, 뒤이어 더 커다란 열매들을 갓난아기처럼 이고 지듯 잔뜩 품고 있는 두리안나무가 나타났다. 반질반질한 잎사귀도, 뾰족한 돌기가 수없이 돋아있는 큼직한 열매들도, 꼭 인간이 만들어낸 모형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두리안열매는 지독한 냄새가 나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데, 이 ‘썩은내’가 초식동물들의 내장에서 나는 냄새와도 비슷해서 육식동물들도 즐겨 찾는다고 한다. 호랑이들은 육식으로 거나하게 본식을 즐긴 뒤에 후식으로 두리안을 먹어서 부족한 영양소를 섭취한다고 하는데, 사나운 이빨을 가진 육식동물들의 맹공격으로부터 열매와 그 속의 씨앗이 충분히 익을 때까지 보호하려면, 두리안은 어쩔 수 없이 그 껍질을 뾰족하고 단단하게 만들어내야만 했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부터 이 갑옷 같은 껍질 속에 ‘과일의 왕’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맛이 나는 과육이 들어있다는 걸 알게 된 걸까? 모르긴 해도, 역사가 차마 기록하지 못한 멀고 먼 예전엔 아마 이 과육은 육식동물의 왕인 호랑이들과의 경쟁을 이겨내야만 차지할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과일의 왕’이라는 호칭은, 어쩌면 최초엔 ‘호랑이와의 경쟁에서 마침내 승리해 차지해 낸 열매’의 뜻이 담겨있지 않았을까?
요즘 새로이 단골이 된 카페에 들렀다. 나무마다 주렁주렁 열린 열매들을 잔뜩 구경하고 온 탓인지, 새콤한 음료가 눈에 들어온다. 상큼한 레모네이드 위에 진한 보랏빛으로 우려낸 버터플라이티를 올려주는 ‘버터플라이 레모네이드’엔 푸릇푸릇한 망고열매들을 보며 상상했던 새콤한 맛과 단단한 두리안열매가 속에 감추고 있는 과육의 버터리한 맛을 두루 품고 있어, 한낮의 산책에 기분 좋게 화룡점정을 해주었다.
단골카페를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요즘 단골이 되어버린 작은 동네슈퍼가 있다. 마당에서 자유분방하게 키워낸 것만 같은 모양새의 가지를 한 묶음 사고, 좌판에 놀이공원처럼 무궁무진하게 널려있는 간식거리들 중 몇 가지를 골라 담았다. 단골카페에 올 때마다 부지런히 이 슈퍼마켓에 들러 궁금한 간식거리들을 사보는데, 아직도 맛보고 싶은 것들이 한가득이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인상 좋은 사장님은 흔쾌히 포즈까지 취해주신다.
오늘의 간식거리들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동네 강선생님이 입맛을 다시며 따라온다.
이런, 미안! 네가 먹을 건 사지 못했어! 저기 옷가게 고사장님들은 무조건 추루 갖고 오라는데, 넌 뭘 좋아하니?
도시의 하루 끝
오늘의 작업을 마치고 다시 문 밖으로 나서니, 정겨운 골목길마다 석양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인 것 같아, 며칠 전부터 미리 점찍어둔 꼬치가게로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치앙마이에 도착한 후 굳이 술을 마시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아 꽤 오랫동안 예기치 않게 금주를 했는데, 여행자에서 ‘생활자’로 돌아와 다시 일을 시작하고 나니, 역시나 도시의 하루 끝엔 톡 쏘는 알콜이 필요하다.
드디어, 치앙마이의 첫 잔을 들러 왔다! 메뉴판을 펼치자마자 눈에 들어온 ‘25주년 기념 창맥주’! 일반판과의 차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정판은 무조건 주문한다. 태국고유브랜드인 Chang 맥주는 보리맥아 외에도 태국산 자스민쌀을 넣어 주조하는 라거맥주인데, 자스민쌀 특유의 단맛과 향미가 은은하게 더해져서 부드러운 맛이 특징이다.
치앙마이에서 마시는 첫 잔은, 주문한 꼬치가 나오기도 전에 시원하게 바닥까지 비워졌다. 일반판 Chang 맥주와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선선한 여름밤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는, 어떻게 먹어도 꿀맛이다!
가게 앞에 세워진 웨건에서 직접 먹고 싶은 꼬치를 골라 담고 원하는 조리법을 이야기하면 순서대로 불에 꼬치를 구워 가져다주는데, 나는 매운 양념을 선택했다. 센 불에 화끈하게 구워주는 만큼, 기다림의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다.
이런 종류의 꼬치요리 재료로는 아무래도 닭고기가 제일 흔한 것 같은데, 이 집은 다양한 채소가 많아서 고기를 먹지 못하는 나도 고르는 재미가 있었다. 베이비옥수수와 오크라는 태국에 가면 꼭 먹는 채소들인데, 양념을 발라 꼬치로 구우면 더 맛있다! 브로콜리도 구워 먹으면 더 맛있는 채소 중의 하나! 어릴 때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꼬치와 같이 메추리알 꼬치를 팔았었는데, 그때 보던 메추리알 꼬치가 있어 반가웠다. 새송이버섯은 고기처럼 씹는 맛이 있어서 고기꼬치를 먹지 못하는 내겐 반가운 메뉴였다.
두 번째 접시는 첫 번째 접시를 담을 때 아쉽게 탈락했던 꼬치들을 담다 보니 어묵파티가 되었다. 태국식 어묵은 한국식 어묵과 식감이 비슷한 듯 다르고 –전분이나 타피오카 등을 섞어 빚는 건지 좀 더 탱탱한 느낌이 난다- 그 종류도 무궁무진해서 이것저것 탐험하듯 먹어보게 된다. 매운 양념을 발라서 구운 탱탱한 어묵은, 부드러운 라거맥주와의 궁합도 환상적!
첫 번째 접시에 비하면 매우 소박하게 담은 두 번째 접시로, 오늘은 조금의 아쉬움을 남기며 이만 마무리. 아쉬움을 남겨두었다는 건, 다음에 또 올 결심을 했다는 것! 떠들썩한 술집엔 학교를 마치고, 직장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맥주 한 잔 하러 들른 손님들이 가득하다. 그야말로, 도시의 밤.
오늘의 어둠은 내일의 빛을 품고서
콧노래를 부르며 밤길을 걸어 집에 돌아오니, 낮에 단골슈퍼에서 산 간식거리들이 기다리고 있다. 구운 생바나나, 달콤한 바나나스틱, 짭짤한 바나나칩. 바나나간식이 절반이어서, 새삼 거인 같은 바나나나무들이 동네어귀를 지키는 ‘치앙마이의 밤’이구나 싶다.
작은 슈퍼마켓에선 아직도 먹어보지 못한 미지의 맛들이, 북적이는 꼬치집에선 오늘은 채 담지 못한 새로운 경험들이, 내일도 나를 기다릴 터. 부지런히 적립해 둔 내일의 행복들에,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밤을 두 팔 벌려 맞이한다.
짙은 밤은 비록 그 생김새를 전혀 알 수 없지만, 코앞에 성큼 다가온 암흑이 두렵지 않은 건, 긴 밤이 그 끝에서 마침내 열어줄 내일엔, 또다시 내일만의 빛으로 가득한 모험이 시작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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