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실은 바구니
하루의 밑그림
아침에 마주하는 첫 풍경은 그날 하루동안 차근차근 채워낼 마음의 색깔들을 위한 밑그림이다. 저 앞에 두 팔 벌린 파아란 지붕은 맑은 햇살을 품에 가득 담아 안은 바다 같고, 담장 위로 훌쩍 자라난 바나나나무는 초록이 무성하게 얽히고설킨 숲 위로 불쑥 솟아오른 사령탑 같다. 비어있는 길은 저 하늘을 향해 활짝 열린 활주로. 붕 뜬 마음을 안고서 거침없이 그 위를 달려 미지의 오늘 하루 속으로 훌쩍 도움닫기를 한다.
새 단골식당 발굴에 나섰다. 낯선 지역에 가면 일단 구글지도를 켜고 무작정 어떤 것들이 있나 살펴보는 편인데, 요즘엔 개중에 평점이 높으면서 –5점 만점에 최소 4점 이상- 리뷰개수가 적당하고 –대부분 두 자릿수- 리뷰의 95% 이상이 현지어로 되어있는 식당들 중 메뉴가 마음에 드는 곳에 둘러보는 중이다.
이렇게 해서 여태까지 당첨된 식당들 대부분이 조용한 동네맛집이었는데, 오늘은 식당 안으로 들어서니 대학생들로 보이는 뽀얀 얼굴들이 바글바글하다. 주방에서는 손님들과 또래로 보이는 청년들이 바쁘게 요리 중이다. 대학가 앞 백반집에 온 듯한 기분. 대학 다닐 때 자주 발도장을 찍던 학교 앞 백반집 최고인기메뉴는 순두부찌개와 돌솥비빔밥이었는데, 태국 대학생들이 좋아하는 태국식 백반메뉴는 뭘까 궁금해진다.
벽에 걸린 메뉴판을 보니 김밥천국 뺨치게 파는 음식 가짓수가 많은데, 개중 몇몇 개 메뉴는 밑에 따로 사진을 걸어두었다. 이 녀석들이 아마도 이 식당 요리사들이 자신 있는 요리, 혹은 손님들이 즐겨 찾는 메뉴 아닐까? 첫 번째 사진 속 음식을 보고 눈이 번쩍 뜨여서, 더 고민하지 않고 메뉴사진을 가리키며 주문을 했다. 한국이든 태국이든 동네백반집에 오면 계란후라이 하나 정도는 추가해줘야 인지상정! 번역기를 보면서 어설픈 태국어로 ‘계란후라이 하나 추가요’를 외쳤더니 건실한 인상의 청년이 웃으며 오케이사인을 보낸다.
주문이 제대로 됐나? 긴가민가하며 자리에 앉았다. 주방에서 갓 요리되어 나오는 접시들을 보며 ‘혹시 내 건가!?’하고 설레기를 몇 차례, 드디어 내 앞에도 주문한 음식이 놓였다. 오징어커리덮밥에 계란후라이 하나. 국물도 같이 내어주었다.
태국음식 하면 소프트크랩을 바삭하게 튀겨 넣고 계란을 풀어 만드는 노란 뿌빳퐁커리가 유명한데, 1인분씩은 잘 팔지 않는 터라 혼자서 여행할 때는 은근히 먹기가 쉽지 않은 메뉴다. 그런데 오징어를 넣어 1인용 덮밥으로 만들어주다니, 안 먹어볼 수가 없지!
뿌빳퐁커리는 게를 튀겨 넣기 때문인지 커리에서도 전반적으로 기름지고 크리미한 느낌이 강한데, 오징어를 넣으니 같은 계란을 베이스로 한 옐로우커리인데도 아주 담백한 맛이 난다. 푸릇푸릇함이 살아있는 쪽파가 색감에도 식감에도 산뜻함을 더해준 덕분인 것도 같다. 자글자글 끓는 기름에 가장자리가 살짝 튀겨지듯 익혀진 계란은 딱 내가 기대한 태국 백반집표 계란후라이의 표본 같은 모습. 가운데 노른자는 열을 적당히만 주어 쫀득하게 반숙으로 익힌 것이 포인트다.
실은 빠이에서 치앙마이로 돌아온 직후 조촐한 기념식을 겸해서 근처 쇼핑몰로 달려가 가족 단위 손님만 가득한 지하식당에서 혼자 2-3인용은 되어 보이는 뿌빳퐁커리를 주문해놓고 열심히 먹었는데, 그날 먹은 커리와 오늘 먹은 커리는, 완전히 서로 다른 음식이다.
이전의 뿌빳퐁커리가 모처럼의 기념외식에 딱 어울리는 힘 잔뜩 준 맛이었다면, 오늘 커리는 집에 한솥 가득 요리해두고 언제든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매일의 맛! 가끔은 화려한 맛도 좋지만, 백반집의 매력은 역시 이 슴슴한 다정함인 것 같다.
왁자지껄 몰려와 김이 폴폴 나는 음식들을 후루룩 해치우고 자리를 뜨는 학생들 틈에 섞여, 나도 한 접시를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파아란 꿈결 너머
단골카페로 후딱 자리를 옮겨 내 ‘치앙마이 단골메뉴’인 버터플라이피 티라떼를 주문했다. 짙은 보라색을 띠는 나비콩ButterflyPea의 꽃은 잘 말려서 우려내면 꽃잎을 꼭 빼닮은 신비로운 보랏빛을 뿜어내는데, 신기하게도 흰 음료와 만나면 지중해처럼 시원한 푸른빛으로 변신한다.
하얀 우유 –오트밀크로 주문했다- 위에 꿈결처럼 파아랗게 펼쳐진 나비콩차의 빛깔이 오늘 아침 골목길에서 맞닥뜨린 파아란 지붕을 꼭 닮았다. 아직 밑그림뿐이던 마음속 도화지에 솨아아아 푸른 물결이 밀려온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먼지 쌓인 마음 구석구석이 한바탕 청소를 한 듯 청명해지는 이 푸른 빛깔들은, 어쩌면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숨겨진 문이 아닐까. 햇살이 개구진 얼굴을 들이민 창가에 앉아 반짝이는 파란 물결 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상상을 해본다.
여행자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생활자’에 돌입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이렇게 단골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앞에 두고 보내고 있다. 여행자일 때처럼 종일 이곳저곳 쏘다닐 수는 없지만, 곁에 머무는 작은 것들에 마음을 열고 충분히 시선을 둔다면, 그 어디에서든 모험은 시작된다.
신비로운 빛깔에 마음을 빼앗긴 채 넋을 놓고 있으면, 시간은 시계태엽을 돌린 것처럼 성큼성큼 지나가버리기 일쑤. 시간은, 흐르기를 애타게 기다릴 때엔 멈춰져 있는 것만 같다가, 다가올 시간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놓아버리는 순간 쏜살같이 질주한다. 돌아갈 날은 아직 멀고, 그저 지금 내게 주어진 작은 보석상자들에 충분히 눈길 주는 데 집중하고 있는 요즘. 제 계절을 맞은 풍요로운 강물처럼, 시간은 매일 시원하게 흘러간다.
흐르는 강물처럼
매일 같이 걷는 길에 올망졸망 열린 석류열매들은 며칠새 어엿하게 덩치가 커졌고, 성주신처럼 동네어귀를 지키는 바나나나무들은 하루 또 하루 무럭무럭 자라나 며칠 뒤엔 큼직한 잎사귀들이 구름과 노닥일 것만 같다. 아무 미련 없이 흘려보낸 시간 뒤로 다시 콸콸콸 쏟아져오는 새로운 시간들. 다음날도 같은 단골카페에 들러 같은 음료를 주문했다.
오늘은 얼음을 넣지 않고,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서 포실포실한 거품을 위에 구름처럼 올렸다. 똑같이 말린 꽃을 우려내어 하얀 우유와 섞어내는데도, 온도에 따라서 그 푸른 빛깔이 펼쳐내는 꿈들은 각양각색이다.
만약 천사가 구름 속에서 태어난다면, 그 구름은 아마도 이런 빛깔이 아닐까? 하이얀 요람의 가장자리를 감싼 천진한 하늘빛은, 풍덩 뛰어들면 짜릿할 정도로 투명한 시원함이 온몸을 감쌀 것만 같았던 어제의 푸른 바다와 달리, 온화한 여름하늘을 듬뿍 머금었다. 컵을 들어 한 모금 기울이면, 저 푸른 하늘에서 뭉게뭉게 태어난 뽀얀 날개들이 하늘하늘 춤을 추며 내려와 머리 위에 잠시 쉬어갈 그늘을 펼쳐준다.
파아란 꿈결 속에, 시간은 오늘도 힘차게 흐른다. 흐르는 저 강물처럼. 인간이 만들어낸 초침과 분침, 시침으로는 붙잡아둘 수 없는, 자연의 본분을 따라서.
하루를 끝맺는 방법
카페를 나오니 저 먼 하늘에 석양이 차분히 수평선을 그렸다. 때마침 눈앞을 지나가는 자동차가 방금 전 카페에서 풍덩 뛰어들었던 여름의 하늘과 꼭 같은 빛깔을 하고 있다. 흐르는 시간 속에 찰나의 모든 것들을 거침없이 띄워 보내고, 내 앞에 펼쳐진 길을 따라 걷는다.
또 왔다, 꼬치집! 바구니에 꼬치를 담아 종업원에게 건네고 자리에 앉자마자 오늘도 25주년 기념 창맥주를 주문했다. 어느덧 까맣게 물든 여름밤이 목구멍에 비단을 깔아주어, 시원한 맥주가 목 뒤로 꿀꺽꿀꺽 넘어간다. 하루를 끝맺는 이보다 완벽한 방법이 또 있을까!?
기분 좋게 목을 축이고 나니 주문한 꼬치들이 신명나게 불에 그을려 나왔다. 새우, 문어, 메추리알, 버섯, 어묵. 전부 이미 한 차례 먹어본 것들이지만, 바로 그 ‘아는 맛’을 위해 오늘밤도 부지런히 ‘아는 집’에 걸음했다.
한 해, 또 한 해, 산 날들이 늘어나도 내일은 여전히 명확한 답을 주지 않고, 그 모든 미지의 불확실함 속에서 우리는 매일 오늘의 답을 찾아나서야 한다. 기분 좋게 배를 채울 수 있는 ‘아는 맛’들은 가장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오늘의 정답이기에, 우리는 이미 알고 있음에도 또다시 그것들을 향하여 모험을 떠나는 게 아닐까?
매콤한 소스를 발라 화려하게 불꽃을 입혀준 꼬치는 여름밤의 맥주와 서로 환상의 짝꿍. 술술 넘어가는 술을 만나면, 시간의 강은 한껏 더 힘을 내어 콸콸콸 흘러간다.
두 번째 접시에도 이미 아는 맛들을 한가득 담았다. 서걱서걱한 베이비옥수수도, 겉은 오독오독하고 속은 끈끈한 오크라도, 모두 조금 독특한 식감을 가진 야채들인데, 불길이 닿으면 마법처럼 그 매력이 절정에 이른다.
겉모습만 보고 담은 꼬치들에서 과연 무슨 맛이 날까 기대하며 하나하나 고심해서 집어 들었던 첫날과 달리, 모두 ‘아는 맛’들만 담겨있는 접시를 마주한 오늘은 주저 없이 잔을 들며 접시를 비워나간다. 보글보글 잔 속에 피어난 하얀 거품으로 배를 지어 까만 밤 속에 동동 띄우고서, 아는 맛들로 노를 저으며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밤은 사방이 온통 칠흑의 장막으로 가려져있지만, 든든한 아는 맛에 약간의 알코올을 알딸딸하게 더해주면, 그 어디로든 성큼성큼 발을 내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우주를 실은 바구니
어느덧 흘러가 닿은 밤의 한가운데.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양이를 만났다. 까만 망토를 뒤집어쓰고 네 발엔 하얀 양말을 갖춰 신은 오늘밤의 안내자. 두 발을 뻗어 기지개를 한 번 쭉 켜고는 따라오라는 듯 앞장을 선다.
살랑살랑 내 치마 속을 몇 번 드나들며 냥국심사를 마친 까만고양이가 향한 곳은 저 앞에 세워진 파란 오토바이.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했더니, 고양이가 ‘왜 안 와?’라는 듯 다가온다. ‘이 위에 타면 순식간에 다른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는데, 무얼 망설여?’
내 발밑에 앉아 한참 요리조리 포즈를 바꾸며 그림자놀이를 하던 고양이가 다시 오토바이로 다가가더니 훌쩍 안장 위로 뛰어오른다.
한국인인 나는 덜컥 ‘오토바이 주인이 싫어하진 않을까’ 걱정부터 되는데, 녀석은 오토바이가 제 것인 것처럼 몸을 쭈욱 일으켜 운전대까지 잡는다. ‘안 돼, 그러다 오토바이가 고장나면 주인이 널 미워할지도 몰라!’ 말리는 내 마음도 모르고, 까만고양이는 풍덩- 다이빙하듯 운전대 앞 바구니로 뛰어들어 버린다.
그제야 눈에 들어온 키티 스티커. ‘아하, 이거 네 집사가 타는 오토바이구나!’ 그걸 이제야 알았냐는 듯 빤히 날 쳐다보더니, 녀석은 이내 바구니 속에서 편히 몸을 말곤 그루밍을 시작했다. 보아 하니, 바구니에 한두 번 타본 폼이 아니다. 모르긴 해도 요 녀석, 치앙마이의 다른 고양이들처럼 매일 아침저녁 집사와 함께 출퇴근을 하나 보다. 맞춤처럼 녀석의 몸에 딱 맞는 요 바구니를 타고서!
성탄의 별들이 아직 그 빛을 거두지 않은 여름밤. 저 까만 하늘이 숨기고 있는 찬란한 신비를 남몰래 담아온 듯 영롱하게 빛나는 초록빛 우주를 싣고서, 작은 바구니는 곧 시작될 밤의 항해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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