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세달살이의 기록들
모처럼의 스타카토
문 밖을 나서면 언제나 꽃들이 맞이해 주는 여름. 활짝 핀 그 환대에 마음도 덩달아 활짝 피어난다. 일 년 내내 여름만 계속된다는 것은, 길을 나서면 그 언제나 온몸을 활짝 열고 나와 거리낌 없이 동행해 주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 꽃길을 걸어, 풀숲을 헤치고 한낮의 비밀정원을 찾아왔다.
나무가 우거진 정원 곳곳에 보물상자처럼 숨겨져 있는 식탁들 중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여행자에서 ‘생활자’로 돌아온 이후엔 소박한 동네식당들에서 ‘태국식 집밥’을 먹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오늘은 모처럼 ‘근사한 외식’을 하기로 했다. 기념일도 아니고, 기쁜 소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가끔은 나 스스로 인생이라는 음악의 지휘자가 되어 평범하게 흘러가야 할 구간에 톡- 톡- 스타카토를 찍어주고 싶다.
주문한 음식은 초록색 야채와 과일을 갈아 만든 스무디와 해산물을 넣은 맑은 수프. 초록이 무성한 정원 한가운데서 꽃과 해산물로 알록달록하게 채워진 그릇을 서빙받고 나니 꽃다발이라도 한아름 받은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푸근한 동네식당들로 발걸음을 옮긴 뒤엔 좀처럼 그릇에서 꽃을 구경해보지 못한 것 같다. 그 어느 길에서나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이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치앙마이지만, 개중 한 송이를 꺾어 대접할 그릇 속에 놓는 건, 조금 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 그릇 속에 살포시 놓인 꽃 한 송이로 인해, 오늘의 작은 스타카토는 아름다운 변주가 되었다.
축하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기에, 이 한 그릇은 오롯이 평온한 오늘의 일상에 드는 축배. 바짝 말린 태국식 고추가 들어있는 매콤새콤한 맑은 해산물수프는 뜨거운 한낮의 태양 아래 지글지글 요리해 낸 소박한 집밥들과는 또 다른 우아한 깔끔함이 있다. 평화롭게 반복되는 나날들 속에 가끔 한 번씩 창문을 열어 환기하듯 청아하게 디톡스하기 딱 좋은 맛! 곁들인 스무디도 싱그러운 녹음이 가득한 맛이어서 좋았다.
우거진 잎사귀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네모난 기기와는 절로 멀어지고, 가만히 호흡에만 집중하게 된다. 숨을 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평소엔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대부분 의식하지 못하는데, 가끔 이렇게 정성들여 숨을 들이쉬고 내뱉다 보면 이 역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나무도, 인간도, 살아있다면 모두 숨을 쉰다. 인간들은 이산화탄소를 내뱉고, 식물들은 산소를 내뱉고, 우리는 매 순간 서로가 내뱉은 공기를 들이쉬며 함께 살아간다. 서로 촘촘히 엮여있는 투명한 삶의 본능들은 비록 우리의 두 눈엔 보이진 않지만, 우리 스스로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그저 물 흐르듯 살아가는 순간들에조차,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이 무성한 생명들과 서로를 단단히 의지하고 있다.
만나지 않고도 만나는
동네어귀에서 자그마한 피라미드를 만났다. 주황색 귤이 알알이 서로를 떠받치고 있는 단정한 피라미드 아래에선 강아지 한 마리가 주인 대신 노점을 지키는 중이다.
그 옆 좌판엔 하나씩 정성스레 포장해 둔 구아바가 가지런히 집에 데려가줄 손님들을 기다리는 중이다. 태국 노점들은 모두 하나같이 정갈한 솜씨들을 자랑하지만, 이렇게 둥근 과일로 피라미드를 쌓아둔 노점들을 맞닥뜨릴 때면, 꼭 자리를 비우고 없는 주인들을 직접 만난 것처럼 친근한 기분이 든다. 비록 얼굴은 모르지만, 기꺼이 하루의 한 조각을 할애해 정성 들여 이 작은 피라미드를 쌓아둔 주인장은, 아주 느긋하고 낙천적인 사람이 아닐까?
한낮의 햇빛 속을 걷다 보면 꼭 한 골목에 하나씩은 마주하게 되는 구멍가게들은, 주인장들은 모두 낮잠이라도 자러 갔는지 항상 물건들만 옹기종기 모여있다. 오늘의 구멍가게엔 아침에 직접 요리한 듯한 정겨운 반찬들이 빵빵하게 묶어둔 비닐 속에서 오밀조밀 맛깔난 반상회를 여는 중! 그날그날 주인장 마음대로 요리해서 내놓는 듯한 음식들이 꼭 ‘동네슈퍼 오마카세’ 같아서 한 번 먹어보고 싶은데, 한참 가게 앞을 기웃거려도 주인장이 오질 않는다.
‘동슈카세’는 포기하고, 인근 학생들의 단골집인 듯한 마라집에 또 왔다. 대세는 ‘마라탕’이라지만, 나는 오늘도 화끈하게 볶아주는 ‘마라샹궈’를 택했다. 이 식당은 주방이 오픈되어있지 않아 누가 내 음식을 요리해 주는지 알 수 없지만, 짧은 기다림 뒤에 주문한 음식이 앞에 놓일 때면,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주방장과 만나 인사를 나누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오늘도 지난번과 같이 정갈하기 그지없는 담음새를 자랑하는 마라샹궈의 모습에서, 차근차근 익히는 순서를 지켜 요리를 하고, 재료 하나하나를 정성 들여 접시에 담아냈을 요리사의 모습이 머릿속에 절로 떠오른다. 요리하는 과정을 직접 보진 못해도, 때로 그것들은 접시의 첫인상에서 모두 오롯이 손님에게 전해진다.
오늘은 특별히 통오징어를 바구니에 담았다. 오징어를 통째로 넣으니 특유의 고소한 얼큰함이 야채에 가득 배었다. 특히 익히면 달달한 맛이 더욱 깊어지는 배추와 매운 양념, 오징어 육수의 조합은 언제나 옳다. 남국에선 흔한 야채인 베이비콘도 매콤한 볶음요리와 찰떡궁합! 초록색 고수도 듬뿍듬뿍 올려주면 무슨 음식이든 태국의 정취가 물씬 배어든다.
오늘 행복의 무게
오후 산책길에 마주친 또 다른 동네가게. 입을 열고 있는 쌀자루와 저울을 보니, 손님이 원하는 만큼 쌀을 퍼서 무게를 달아 계산을 해주나 보다.
창푸악의 숙소에서 ‘생활자’로 자리를 잡자마자 근처 식자재마트에 가서 2kg짜리 자스민쌀 한 포대를 사서 이틀에 한 번씩 밥을 짓고 있는데, 그러고 나서 보니 이렇게 쌀포대를 놓고 조금씩 퍼담아 주는 동네가게들이 자주 눈에 띈다. 저녁식사를 준비할 시간 즈음 타닌시장에 가면 커다란 밥솥에 밥을 갓 지어 한두 덩이씩 원하는 만큼 퍼주는 가게들도 있다. 밥 짓는 건 쌀 씻어서 밥솥에 안쳐두기만 하면 되지만,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그것마저도 번거로울 때가 많다. 타닌시장에서 반찬 몇 가지를 사고 근처 ‘밥가게’에 들러 갓 지은 쌀밥 한 덩이 바로 퍼 담아 따끈따끈하게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간 적이 있는데, 손에 달랑달랑 들려있는 봉지들의 무게가 꼭 그날 하루의 행복의 무게인 것 같았다.
아주 무겁지도, 아주 가볍지도 않은, 그러나 적당한 온기를 품고 있는, 자그마한 행복.
하루하루 더 익숙해지는 것들
‘모처럼 스타카토’를 찍은 다음 날, 발걸음은 다시 익숙한 동네식당으로 향한다. 숙소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이 식당은 실은 ‘남의 동네식당’이지만 햇살이 반짝이는 아침공기를 마시며 걸으면 시간을 훌쩍 접어낸 것처럼 금세 알록달록한 건물들 앞에 닿는다.
오늘도 내 선택은 랏나! 메뉴판에 구글카메라를 들이대면 ‘해산물 그레이비’라고 번역되는데, 한국어로는 뭐라고 번역을 해야 적당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레이비소스’는 육즙에 전분을 섞어 걸쭉하게 만드는 갈색의 소스인데, 태국의 랏나는 ‘소스’라기보다는 국물요리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계란후라이를 하나 추가했더니, 튀겨져 나온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화력이 센 요리를 선호하는 나로서는 반갑기 그지없는 모습! 태국에선 계란후라이를 주문하면 이렇게 기름에 튀기듯 익혀주는 식당이 많은데, 더운 나라들의 특징인가 싶기도 하다. -인류가 냉장고와 같은 시설을 이용해 음식을 보관하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음식이 쉽게 상하는 더운 나라들에선 간을 맵고 짜게 하거나, 기름에 튀기는 요리들이 자연스럽게 발달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세상에 기름에 튀겨서 맛없는 음식은 없잖아!? 메추리알이 하나 들어있는 것도 마음에 쏙 든다. 식당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한국의 김치찌개처럼- ‘맛있는 랏나’는 대체로 대동소이한 것 같다. ‘오늘도 기대하던 그 맛!’이라고 느끼는 건, 그새 ‘랏나’가 매일 먹는 집밥처럼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따끈한 국물도, 그 속에서 건져먹는 야들야들하게 익혀진 해산물도, 불맛을 입은 수제비처럼 쫀득쫀득한 쌀국수도, 어느새 언제 먹어도 한결같은 만족감을 안겨주는 ‘일상의 그 맛’이 되었다.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이른 아침부터 부러 ‘다른동네맛집’을 찾아 나선 건, 이전에 ‘랏나맛집’을 방문했을 때 근처에 눈여겨봐 두었던 태국식 디저트가게 때문! 거리에 내어둔 좌판에 진열된 품목들은 타닌시장에 즐비한 디저트가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 집은 솜씨가 좀 더 야무져 보인다. 지난번에 이 앞을 지나칠 땐 디저트들이 거의 다 팔리고 없었는데, 오늘은 다행히 대부분의 종류가 아직 남아있다.
친절한 주인언니의 도움을 받아서 이것도 고르고, 저것도 고르고, 수북이 고른 디저트들을 계산하려는데 상점 안에서 스윽- 하고 앞치마를 멘 누군가 모습을 드러낸다. 딱 봐도 ‘내가 이 집 주방장이요!’하는 위엄이 넘치는 자태. 까만 턱수염이 수북한 서글서글한 얼굴과 마주하자마자, 내 시선은 자연스레 옆에 세워진 가벽으로 향했다.
...앗, 당신은!?
다시 고개를 돌리자마자, 털보아저씨가 푸근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네, 맞습니다. 그 그림이 바로 저입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정말 그림과 똑같이 생겼다! 예감이 왔다. 이 집 디저트들은 완전 맛있을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일단 주인장님부터가 왕이 될 상이잖아요... 디저트의 왕이요...!!!
며칠 전에 요 근처 식당에 왔다가 처음 이 가게를 발견했는데 그때는 디저트가 거의 다 팔려서 아쉬웠는데, 오늘은 디저트가 다 남아있어서 다행이에요! 다 너무 맛있어 보여요! 수다를 왕창 쏟아낸 뒤 손에 주렁주렁 디저트를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다시 길을 나섰다. 어서 빨리 먹어보고 싶지만, 집에 가려면 다시 삼십여 분을 걸어야 한다. 일단 연료부터 좀 충전하기 위해 –방금 전에 랏나를 먹긴 했지만, 식후엔 당분이 필요하거덩요- 가까운 초콜릿카페로 향했다.
스테디셀러도 베스트셀러도 아닐지라도
인근에 카카오를 재배하는 농장들이 여럿 있기 때문인지 치앙마이엔 카카오빈을 산지별로 맛볼 수 있는 수준급의 초콜릿 카페들이 많은데, 카페마다 자신들만의 노하우를 담은 다양한 초콜릿과 초콜릿을 녹여서 만드는 핫초콜릿 라인업을 야무지게 갖추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메뉴판 구석구석을 잘 정독하다 보면 흔히 찾아보기 힘든 창의적이고 특색 있는 메뉴들이 숨은보물찾기처럼 튀어나오는 것이 또 다른 매력이다.
장미꽃 모양으로 살짝 얼린 다크초콜릿에 톡 쏘는 탄산을 부어 먹는 음료를 주문해 보았다. 장미초콜릿이 든 컵에 탄산수를 꼴꼴꼴 부어주면 뽀글뽀글 탄산기포가 올라오면서 초콜릿이 서서히 녹는데, 놀이공원에서 처음 보는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컵에 탄산을 따르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한낮의 무더위가 싹 가실 정도로 즐거웠다.
전부 다 녹아버린 초콜릿과 탄산수의 조합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조금 밍숭맹숭했지만, 새로운 경험은 그 자체로 값진 것! 스테디셀러도 베스트셀러도 아닐지라도, 오직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 개성 있는 음료가 오래오래 메뉴판 속에서 장수하기를 기원하면서, 미지의 그 어딘가에 첫 발을 들여놓은 들뜬 기분 속에 오후의 한 조각을 띄워 보냈다.
마지막 1%를 완성하는 솜씨
칠흑의 밤이 찾아오면, 단거Danger가 세상을 지배한다! 후다닥 저녁을 요리해 먹고 탁자 위에 한가득 털보아저씨가 만든 디저트들을 펼쳤다.
태국디저트들은 한국의 떡과 맛이나 식감이 비슷한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 쌀과 녹두, 타피오카전분, 토란과 비슷한 식감의 타로, 코코넛밀크, 초록빛깔을 내는 판단잎 등이 재료인 것 같다.
요 꽃모양의 녹색디저트는 한국식 꿀떡과 아주 흡사한데, 쫄깃쫄깃한 식감에 코코넛의 단맛이 은은하게 감돌아서 정말 맛있었다! 이날 산 털보아저씨네 디저트들 중 단연 베스트!
찐 타로가 안에 들어있는 이 코코넛디저트는 타닌시장이나 아니면 나이트마켓의 노점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번 치앙마이여행에서 처음 접하고 푹 빠진 디저트다. 어느 집에서 사서 먹어도 다 맛있지만, 역시 고수에겐 마지막 1%를 완성하는 솜씨가 있는 법! 치앙마이에 머무는 동안 여러 집에서 이 디저트를 사서 먹었는데, 털보아저씨네 것이 제일 맛있었다!
알록달록 과일바구니 같은 이 녀석은 녹두앙금으로 속을 빚고 색소를 입혀 만든 것 같은데, 화려한 외관에 비해 그 맛은 수수할 정도로 평범하다. 이 디저트 역시 여러 군데에서 사 먹어 보았지만, 특별히 ‘이 집이 최고야!’ 하는 차이는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 상자 사서 식탁 위에 올려두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야밤에 홀로 광란의 디저트파티를 벌인 소감은...!?
과연 털보아저씨 당신은 왕이 될 상이 맞소! 디저트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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