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세 달의 기록들
등 뒤엔, 어느새 흘러간 시간들의 바다
창푸악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 왔다. 평범한 농장소녀 도로시를 덥석 낚아채어 마법의 세계 오즈로 데려간 회오리바람처럼 덩치 큰 비행기에 몸을 맡긴 채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한복판을 떠나 훌쩍 착륙해버린 여름의 한가운데. 마중을 나온 빨간 자동차를 타고 후덥지근한 여름밤을 씽씽 달려 도착한 하이야의 민박집엔 아기고양이 한 마리가 ‘냥국심사’를 위해 오늘의 마지막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늙어서 살 곳을 찾아요, 첫 권- HaiYa의 첫 일주일>의 기록은 여기로 https://brunch.co.kr/brunchbook/tofindmyself
문을 열고 나서면 여름햇살이 반짝이는 작은 정원과 하루 일과에 충실한 고양이가 살갑게 맞이해 주는 꿈같은 첫 일주일을 보낸 뒤, 떠들썩한 연말연시 속에서 마음의 수평선을 찾으며 들뜨고도 차분한 일주일을 보낸 올드타운에서는 보석 같은 동네상점들을 여러 군데 발견했고, 떠나기 전날 밤엔 단골이 된 초콜릿카페의 제인으로부터 직접 만든 연하장을 선물 받기도 했다.
<치앙마이 세달살이- 그 두 번째, 올드타운>의 기록들은 여기로 https://brunch.co.kr/brunchbook/summershine
꼬불꼬불한 산길을 꼬박 세 시간 동안 달려간 빠이에서는 털북숭이 동네친구들과 인생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열흘을 보냈고, 돌아온 치앙마이의 싼티탐에서는 다시 나만의 길 위의 보물찾기가 시작되어,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로 돌아와 창푸악에서 보낸 지난 한 달 동안엔 정겨운 골목길들을 구석구석 걸어다니며 다른 사람들의 눈엔 지극히 평범해 보일지도 모르는, 하지만 내게만은 더없이 소중한 자그마한 보석들을 품에 가득 모았다.
<잠시 치앙마이를 떠나-눈부신 빠이>의 기록들은 여기로 https://brunch.co.kr/brunchbook/peaceinpai
시곗바늘에 마법이라도 걸어둔 것처럼 치앙마이와 빠이에서의 하루하루는 더없이 느릿느릿 흘러갔는데, 문득 돌아보니 천천히 거닐었던 순간들이 쏜살같이 빠르게 저 너머로 아득히 멀어져 있다. 흘러 흘러 어느새 등 뒤에 거대한 바다가 된 시간들. 물은 깊어질수록 더 쉬이 그 속을 보여주지 않지만, 반짝였던 순간들만은 윤슬이 되어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거대한 시간의 물결들 위를 여전히 아스라이 빛을 내며 떠다닌다.
<돌아온 치앙마이-싼티탐과 창푸악>의 기록들은 여기로 https://brunch.co.kr/brunchbook/summerincolors
내일 아침엔 창푸악을 떠나 창클란의 새 숙소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약 2주를 보내고 나면 치앙마이에서의 세달살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등잔 밑의 보석들
내일은 그간 정든 창푸악을 떠나는 날이기도 하지만, 또한 두근두근 설레며 새로운 목적지에 도착하는 날이기도 하기에. ‘마지막 날’이라는 말이 완전히 실감 나지는 않는다. 하이야를 시작으로 올드타운, 빠이, 산티탐까지, 벌써 네 번의 ‘떠남’을 반복하는 동안 ‘마지막’이라는 배낭 속에 든 묵직한 짐들을 하나씩 덜어내어, 그 무게가 한층 가벼워진 것도 같다.
창푸악에서 보낸 약 한 달을 정리하기에 달랑 하루는 턱없이 부족한 것 같아서 떠나기 전 이틀을 ‘작별인사하는 날’로 정했다. 어제 하루의 테마는 ‘단골집 순례일’이었고, 진짜 마지막 날인 오늘 하루의 테마는, 그간 마음에만 고이 담아두고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직접 가보지는 못했던 ‘등잔 밑 보석상자들 열어보기’다.
콘도 정문에서 대로변을 따라 약 100미터만 걸어나가면 치앙마이의 대표 랜드마크 마야몰MayaMall이 있는 사거리에 닿는다. 이 사거리엔 대형 쇼핑몰과 상점들이 빽빽이 들어서있어서 밤이고 낮이고 여행객들로 북적이는데, 나는 청개구리처럼 떠들썩한 대로를 등지고 콘도를 빙 돌아서 알록달록한 빨래들만 줄에 나란히 걸려있는 공터를 가로지르고 나면 다른 차원에 이른 듯 나타나는 아기자기한 골목길을 걸어다니며 동네탐험을 하느라 정작 이 번화가엔 몇 번 와보지 못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숙소에서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에 있는 곳들은 오히려 ‘여긴 가까우니까 언제라도 잠깐 시간 내면 올 수 있잖아?’하는 생각에 ‘일단 오늘은 먼 곳부터 다녀오자’하고 미루어두다가 결국 영영 가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지라, 이번엔 마음먹고 ‘가깝고도 먼’ 등잔 밑 보석상자들을 위해 마지막 하루를 할애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에 번화가 한가운데 위치한 식당을 찾았다. 식당 입구에 붙여진 알록달록한 스티커들이 종업원 대신 손님을 맞이한다. 개중 단연 눈길을 끄는 건,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연속으로 ‘미슐랭가이드’에 선정되었음을 알리는 빨간 스티커들이다. -식당을 방문한 시기가 2023년이었으니, 그 뒤에도 계속 미슐랭가이드에 선정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미식’이 뭐기에
굳이 ‘미슐랭식당’에 가려고 찾아 나선 건 아닌데, 구글지도에 현지인들이 높은 평점을 준 식당들에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당도해 보면 오늘처럼 예기치 않게 ‘미슐랭’ 스티커와 맞닥뜨리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올드타운의 오래된 어묵국숫집과, 참차마켓에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모두 발도장을 찍는다는 ‘Meena’에 이어 세 번째 ‘갑자기 미슐랭’이다.
미슐랭, 혹은 미쉐린Michelin은 프랑스의 타이어제조회사인데, 종이지도로 길을 찾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에 –무려 지금으로부터 백 년도 더 전인 1900년부터- 타이어를 구입하는 고객들을 위해 가이드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맛있다고 입소문이 난 호텔들엔 따로 별을 표시해 두었는데 이것이 훗날 ‘맛있는 레스토랑 안내서’로 전세계적으로 자리 잡은 미슐랭 ‘레드가이드Red Guide’의 시초가 되었다.
치앙마이엔 우리가 흔히 아는 바로 그 ‘미슐랭스타’를 비롯, ‘편안한 동네식당들’에 수여하는 ‘빕구르망’까지, 미슐랭가이드에 등재된 식당들이 50개가 넘는다. 특히 ‘파인다이닝’의 경우엔 다른 대도시들에 비해 예약이 수월하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해서 ‘미슐랭스타투어’를 목적으로 치앙마이를 방문하는 여행객들도 요즘은 적지 않은 추세다.
여행의 제1목적이 ‘먹기’인 나도 치앙마이 세달살이를 시작하기 전엔 적어도 2주에 한 번씩은 ‘미슐랭스타’를 받은 식당들에도 한 번씩 방문해 보자고 야심차게 계획을 세우고 드레스코드에 맞는 옷이며 구두까지 바리바리 싸 짊어지고 왔지만. 회오리바람에 실려 따뜻한 남국의 한가운데 마법처럼 뚝 떨어진 뒤엔, 스티커를 붙여둘 문 같은 건 따로 없는, 그저 모두에게 활짝 열린 소박한 동네식당들에 매료되어버렸다.
무엇이 ‘미식’인가에 대하여는 ‘미식’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그 기준을 발달시켜 온 것이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패권을 얻고 부를 쌓아온 서구열강들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비롯 침략을 당한 나라들은 수탈을 당하느라 미식이고 나발이고 입에 풀칠만 하기에도 바빴다. 반면 이들 열강들 중에서도 ‘미슐랭가이드’의 탄생지인 프랑스는 ‘미식’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며 ‘프렌치퀴진’의 위상을 끌어올렸고, 침략전쟁을 벌여 그 대열에 합류한 일본 역시 ‘사시미’를 ‘고급미식문화’로 전 세계로 퍼트리는 데 성공했다. 날생선에 열을 가하지 않고 먹는 한 지역의 독특한 식문화가 ‘미식’이 되느냐 ‘미개’가 되느냐 하는 판단이 힘의 질서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존의 ‘미식’개념은 다양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꾸준히 있어왔지만, ‘미식’이나 ‘파인다이닝’이라는 용어가 탄생하기 이전에도 인류 역사 속엔 국가·민족·문화·지역 등을 막론하고 꾸준히 ‘맛있는 음식’에 대한 열망이 존재해왔다.
크게 보면 단순한 것들
오로지 지도와 여행서적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엔 맛있는 식당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미식가’들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요즈음은 구글지도에 익명의 다수가 자발적으로 남긴 평가들이 차곡차곡 누적되어 만든 숫자들이 그 자체가 ‘맛있는 음식’의 지표로서 대중적인 신뢰를 얻는다. 해외여행이 대중화되고, 사용자가 각자의 언어로 구글지도에 남기는 후기들이 자동으로 번역까지 되어, 이 지표는 소수의 전문가집단은 확보할 수 없는 폭넓은 다양성까지도 획득해가고 있다.
‘미식’이라 이름 붙이고 하나하나 세부기준을 세워 평가하자면 ‘맛있는 음식’을 판단하는 일이 복잡하고도 어려워지지만, 단순하게 큰 줄기를 보면, ‘맛있는 음식’이란 동네식당이든 파인다이닝이든, 기본적으로 신선한 재료로 간이 잘 맞도록 조리한 것이 아닐까?
각기 다른 입맛과 취향, 국적과 문화, 역사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만든 ‘맛있는 음식’의 지표가 결국엔 전문가집단인 ‘미슐랭가이드’와도 일치하게 되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맛있는 음식의 보편적 기본기’가 존재하기 때문인 것 같다.
‘미슐랭투어’가 아닌 ‘동네식당순례’를 택한 후, ‘미슐랭스티커’를 보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다른 게 아니라 ‘이 집 기본기는 확실히 하겠네!’다.
추억의 화롯불을 켜고
메뉴판에서 반가운 메뉴를 발견했다. 몇 년 전에 가족들과 함께 방콕에 갔을 때 내 팔뚝보다 큰 농어로 만든 찜을 먹고 라임으로 새콤하게 양념해주는 태국식 생선찜에 홀딱 반했는데, 마침 이 집에 그 메뉴가 있다. 하지만 오늘 난 혼자. 농어를 시키면 양이 너무 많을 것 같아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데, 바로 밑에 재료만 ‘오징어’로 바꾼 똑같은 찜메뉴가 있다!
라임과 태국고추로 매콤새콤하게 양념한 태국식 오징어찜과 나비콩꽃으로 파랗게 물들인 자스민라이스를 주문했다. 메뉴판의 사진을 보고 설마 했는데, 예전에 방콕에서 농어찜을 주문했을 때와 똑같이 하단에 불을 붙이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있는 물고기모양 용기에 담겨 나왔다. 게다가 이거, 실제로 요리되어 나온 모습이 야채도 오징어도 사진보다 더 풍성하다!
아마도 같은 레시피일 텐데, 오징어찜은 농어찜과 달리 찌개 같은 느낌이 난다. 라임과 태국고추로 양념한 국물은 맑고 개운한데, 그릇 밑에서 작은 불꽃이 계속 따뜻하게 데워주니, 시간이 지날수록 매콤하고 새콤한 맛에 오징어육수가 더해지며 더 진하게 졸아들어 그야말로 진국이다.
밥만 한 공기 곁들이기엔 못내 아쉬운 음식이다. 매콤하고 기름진 볶음요리 하나 더 곁들이면 깔끔한 국물과 궁합이 잘 맞을 것 같은데, 오징어찜 만으로도 이미 양이 1.5인분을 거뜬히 넘어서서 창푸악에서의 마지막 점심만찬은 조금 모자란 듯 마무리하기로 했다.
추억의 화롯불은 그릇 속에서 보일 듯 말 듯 아롱아롱 타오르고, 그 위에서 바르르 한바탕 끓어오를 법도 한데 국물은 마지막까지 점잖게 따끈따끈한 정도를 지켰다. 식탁을 떠나는 순간, 아쉬움이나 안타까움보다는 깨끗한 만족감이 먼저 찾아온 것을 보니, 진정한 채움이란, 적당한 공간을 비워두는 법을 터득하는 바로 그 순간 찾아오나 보다.
선택하지 않을 것들의 선택
여행 시작 전부터 ‘여긴 꼭 가야지’하고 찜해두었던 태국식 디저트카페에 창푸악을 떠나는 날에야 겨우 발도장을 찍었다. 디저트는 사실 배를 채우고 난 뒤에 오로지 즐거움만을 위해 먹는 잉여칼로리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안 먹어도 그만’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끝없이 새로운 것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이전에 방문했던 태국식디저트카페는 초록이 가득한 야외에 테이블을 꾸며놓고 식기도 전부 라탄으로 만든 것들을 사용해서 한낮의 여름 속으로 소풍을 나온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는데, 오늘의 카페는 귀부인들을 위한 우아한 응접실처럼 꾸며져 있다. 동네주민들이 연신 몰려와 한바탕 수다를 떨고 가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아파트상가 1층에 위치한 핫플레이스 같은 느낌도 든다.
태국식 디저트카페는 아마도 대부분 이런 형태인지, 이전에 방문했던 카페와 똑같이 디저트는 테이블에 진열되어있는 것들을 직접 골라 담으면 된다. 디저트를 향해 돌격하기 전, 음료 메뉴판에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 보여 구글렌즈를 들이밀었더니, 이 녀석, 오늘도 번역하느라 개그하느라 바쁘다.
처음 카페에 들어섰을 땐 디저트테이블을 보고 ‘단출하다’고 생각했는데, 하나하나 들여다보니 종류가 제법 많다. 좀 더 어릴 때는 ‘선택’이란 뭉게구름처럼 설레는 수많은 가능성들 중에서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을 골라내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을 거쳐온 뒤 문득 돌아보니, 선택이란 ‘선택하지 않을 것들’을 가려내야 하는 일이 될 때가 더 많더라. 너무도 많은 ‘선택지’는, 때로는 마음껏 선택할 자유가 아니라, 내 마음이 온전히 원하는 것들을 가려낼 수 없게 하는 얄궂은 방해꾼이 되기도 한다.
한국음식이라면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싫어’라는 호불호가 어느 정도 있을 텐데, 눈앞에 펼쳐진 것들은 전부 눈에 보이는 빛깔과 모양 말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미지. 들썩이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오로지 직관적인 감각에 의지해 손이 가는 대로 선택을 했다.
세 가지 디저트를 선택해 카운터로 가져갔더니, 주문한 차와 함께 탁자 가득 화려하게 다과 한 상을 차려주었다. 플라스틱팩에 담겨있을 때에도 충분히 고운 빛깔을 자랑하던 디저트들이 사장님의 손길에 뚝딱 날개옷을 입은 선녀처럼 더욱 아리따운 자태로 변신했다.
창푸악에서의 마지막 이틀은 ‘선택하지 않을 것들’을 과감히 포기하며 ‘적당히 비움으로써 채워야지’ 결심했건만. 혼자서 4인 가족용은 거뜬히 될 것 같은 만찬을 앞에 두고 화려하기 그지없이 피날레를 장식하게 됐다.
인생이란, 매순간 무수히 많은 것들을 소유하려고 애쓰며, 결국엔 소유하지 않음의 경지에 이르는 법을 배우는 기나긴 수업인 걸까. 나는 그 길의 어디쯤 와있을까. 인생이라는 스케일이 채움이라는 눈금에서 시작해서 비움을 향해간다면, 내 바늘은 아직도 ‘채움’ 쪽에 좀 더 가까운가 보다.
앙금으로 빚어낸 붉은 꽃모양의 화과자는 마치 어린 시절 동네제과점에서 산 버터크림케이크 위에 올려져있던 장미장식처럼 맛에는 크게 특별한 것이 없었다. 조금은 심심한 앙금맛. 아주 달 거라고 예상했지만, 달지 않아서 좋았다. 코코넛밀크로 만든 태국식 떡–혹은 푸딩-은 치앙마이에 와서 좋아하게 된 간식인데 내가 아는 바로 그 구름처럼 푹신하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보랏빛으로 쪄낸 타로와 샛노란 초당옥수수를 넣어 만드는 이 태국식 디저트도 이제는 제법 그 맛이 익숙해진 것 같다. 알록달록한 태국식 꿀떡은 안에 흑당으로 달콤하게 버무린 코코넛슬라이스가 들어있었는데 깨를 넣은 한국식 꿀떡이 곧바로 떠올랐다.
직접 먹어보기 전엔 마치 동화 속 세상처럼 내게서 한 발자국 동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았던 미지. 막상 그 세계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니 그 모든 맛들이 친숙해서, 어느새 내가 치앙마이와 이만큼이나 가까워졌구나 싶었던 창푸악의 마지막 티타임이었다.
밤이 무르익는 소리
카페를 나와 자연스레 걸음이 향한 곳은 털보아저씨네 디저트가게. 그런데 이런, ‘비움을 행하거라’고 말하듯 빈 진열장엔 하얀 천이 덮여있고 앞엔 주인장 대신 고양이점원이 나와있다.
며칠 후에 특별한 손님을 맞을 예정이라 여태까지 치앙마이에서 맛본 디저트들 중 가장 맛있는 털보아저씨네 디저트를 미리 준비해두고 싶었는데. 진열장에 걸어둔 붉은 글씨를 보니 오늘 하루 휴점인가 보다. 내일 창푸악을 떠나면 털보아저씨네와는 훌쩍 멀어져버릴 테고, 새로이 도착한 동네엔 구석구석 열어보아야 할 보석상자들이 가득해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을 텐데. 치앙마이를 떠나기 전에 과연 다시 털보아저씨와 만날 수 있을까?
만날 수 있다면 반가운 일이지만, 만날 수 없더라도, 그건 이미 등 뒤로 흘러가 버린 바다에 다시 뛰어들 틈 따윈 없을 정도로 새로운 모험에 충실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 아쉬움은 산뜻하게 털어버리고 돌아서서 이제는 지도를 보지 않고도 성큼성큼 길을 찾을 수 있게 된 익숙한 풍경들 속을 걸어간다.
집으로 돌아와 아늑한 소파에 몸을 던지니 창밖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해질 무렵이면 저 멀리 보이는 사거리의 번화가 곳곳에서 라이브공연이 열리는데, 혹자는 너무도 생생히 들려오는 그 소리가 이 콘도의 ‘단점’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지만, 나는 왜인지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도시의 밤이 무르익는 소리 같아서.
한 달간 집안 곳곳에 펼쳐두었던 짐을 꾸리다 보니 어느덧 밤. 노랫소리도 태양을 따라 저물고 분주하던 도시의 불빛들도 모두 잠들었다. 떠나는 날은 새로운 목적지에 도착하는 날이기에.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이 아닌 시작이라는 설렘을 안고서, 곧 찾아올 새날을 향하여 나도 마지막 밤의 항해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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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어서 살 곳을 찾아요!> 산티탐과 창푸악에서 보낸 약 6주간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창클란에서 특별한 손님들과 함께 보낸 마지막 2주간의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4권을 연재하는 동안 일이 바빠 미리 써둔 포스트에 발행예약만 걸어두고 댓글들을 거의 살펴보지 못했네요. 다음 주부터 차근차근 인사드릴게요. 함께해 주시고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