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세코 티셔츠
호텔에 예민한 편이다. 마지막 숙소에 에어컨이 없는 게 걱정됐다. '월드체인이라고 자랑하더니 에어컨이 없다고?' 워낙 시원한 지역이라 에어컨이 필요 없는데 작년에는 이상 기온으로 좀 더웠다고 했다. '올해도 이상 기온인데 더우면 어쩌지?' 가기 전부터 걱정이었다. 게다가 주변에 편의점도 없고 골프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가는 길에 일부러 편의점에 들렀다. 버스 기사님까지 내려서 먹거리를 샀다. 애들이랑 있으면 말해주는 거 사면 될텐데 뭘 살지 몰라 젊은 친구들이 사는 걸 보고 따라 사려고 하니 남편은 편의점에서도 '빨리빨리'를 말한다. "이제 들어가면 아무것도 없다잖아. 잔뜩 사갈 거야." 안 그래도 대낮부터 호텔에 가서 할 일도 없는데 편의점에서 '빨리빨리'를 말하는 남편이 못마땅했다.
호텔에는 매점이 하나 있지만 작고 물건이 별로 없다고 했다. 편의점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이 넘는 거리이니 미리 다 사고 가라고 했다. 밖에 나와서 호텔 앞에서 잠깐 바람 쐬는 건 괜찮지만 산책한다고 돌아다니면 곰 나온다고 절대 나다니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다. 맨날 아홉 시 넘어서 겨우 들어갔는데 이날은 도착하면 네 시가 조금 넘는다. 그렇게 빠듯하게 다니더니 아무것도 없는 호텔을 가며 시간은 넉넉하게 주다니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호텔 덥기만 해봐라' 씩씩거리며 양손 무겁게 군것질거리를 사고 갔다.
다행히 덥지 않았다. 신기했다. 객실도 넓고 쾌적했다. 전망도 좋았다. 첫날 가보고 온천에 안 가던 남편은 온천도 마음에 들어 했다. 나는 여행 가면 신나서 잘 먹는데, 남편은 잘 먹으면서도 음식이 입에 안 맞는다고 불평한다. 여기서는 뷔페식으로 나오는 음식이 제법 맛있었는지 아주 만족해했다. 기분 좋은 저녁을 먹고 밤에 운 좋으면 별이 쏟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나서 환상적인 밤하늘을 상상하며 나가 보았다. 별은 쏟아지지 않고 드문드문 보이기는 했다. 대화를 하며 잠시 별을 봤다. 마지막 밤이었다. 밤공기가 시원했다.
니세코 힐튼 호텔의 작은 매점을 하룻밤 자는 동안 얼마나 들락거렸는지 모른다. 할 일은 없고 시간은 많고 남편이 담배 피우러 갈 때마다 따라 나가 작은 매점을 구경했다. 내가 구경하고 있으면 남편이 담배를 다 피우고 작은 매점으로 들어왔다. 한 번은 과자를, 한 번은 맥주를 샀다. 기념품도 몇 가지 있고 한쪽 벽에 티셔츠랑 모자 같은 게 진열되어 있었다.
남편은 여행 내내 티셔츠에 집착했고 사이로 전망대 휴게소 매점에서는 반팔 티셔츠가 없었는지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겨울에 입을 듯한 후드티를 들고 있었다. 더워서 만지기도 싫을 것 같은데 그걸 들고 몸에 대 보며 고민하는 그 사람을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아주 잘 알기는 한다. 첫날 갔던 삿포로 시내 외에는 옷을 살 만한 곳이 없었다. 이제 옷 살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매점에 영어로 큰 글자가 써 있는 검정 티를 골라 마음에 들어 했다. 남편은 옷에 글자나 그림이 있는 걸 싫어한다. 영어는 심지어 '니세코'였다.
"니세코라고 쓴 옷을 입고 다니게?"
예전에 TV에 나온 외국인이 친구가 아무리 이상하다고 말해도 '추석'이라는 한글이 있는 모자를 마음에 들어하며 꼭 쓰고 다니던 게 기억났다.
"여기서는 몰라도 내일이면 니세코를 떠날 텐데 굳이 니세코를 입고 다녀야겠어? '제주도'라고 쓴 티셔츠를 육지 가서 입고 다닌다고 생각해봐. 이상하지 않아?"
"원래 다른 동네서 입는 거야."
진짜 신기한 인간이다.
"사고 싶으면 사야지." 나중에 나 때문에 못 샀다고 할까 봐 웃으면서 사라고 했다. 니세코를 내가 입고 다닐 것도 아니고, 적극적으로 함께 골랐다. 추운 동네라 그런지 반팔 티셔츠들도 다 도톰하고 포근했다. 당장 살 것처럼 하던 남편이 더울 것 같다는 말에 사는 걸 포기했다. 좀 두꺼워도 살걸 그랬다. 두 개 사서 니세코 커플룩으로 입을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