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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남들 사면 나도 사야 해

패키지 속 쇼핑 이야기

by 여름햇살

계획했던 여행이 갑자기 취소되는 바람에 급하게 지인을 통해 예약하고 갔는데, 나트랑 - 달랏 초저가 상품이었다. 우리 부부랑 혼자 온 아저씨가 선택한 상품이었고, 세 분의 여성은 조금 고가의 상품을 선택했다고 한다. 처음 만났을 때 가이드가 "이 세 분은 좀 부티 나지 않나요? 돈을 많이 들인 상품이에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숙소도 달랐고 포함된 옵션도 좀 달랐다. '부티' 언니들은 고급스러운 숙소에 마사지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녀들이 해산물 뷔페를 갈 때 우리는 한국식 닭볶음탕을 먹고 돈을 내고 마사지받았다. 빈부의 격차를 느끼게 하는 여행이었지만, '부티' 나는 그녀들도 쇼핑은 3회 똑같이 했다. 같은 베트남이라 그런지 예전에 다낭에서 갔던 쇼핑센터의 상품들과 겹쳤다. 커피와 침향 그리고 잡화점 일정이었는데 똥커피(족제비똥, 위즐커피)나 코코넛 커피는 사 와서 먹지도 않았고, 침향은 너무 비쌌다.


커피가게에서는 역시나 부티 언니들이 커피를 샀다. 두 번째는 침향 가게인데 천 달러나 하는 침향을 살 생각은 없었다. 물건을 보면 매번 혹하는 남편도 다낭에서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어서 안 산다고 말하고 들어갔다. 판매자 역시 우리가 안 살 것처럼 보였는지 부유한 언니들 옆에서만 맴돌며 권했다. 그런데 설명을 너무 쏙쏙 재미있게 잘해서 자꾸만 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니 사야 할 것 같았다. 의학 지식까지 팁으로 몇 개 알려주니 남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손에 막대기처럼 생긴 기계를 잡아 보게 하고는 몸에 이상이 있는지 알려주었다. 한 언니에게는 전날 저녁에 뭘 먹었는지 물어봤다. 삼겹살이라고 잘 대답하자, 그 전날 저녁 메뉴를 물어봤다. 대답을 못 하자 살짝 치매 증상 가능성을 흘려서 다들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너무 억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기억이 안 났고, 남편도 기억을 못 했다. 사진을 찾아보고서야 기억할 수 있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 전날 메뉴가 기억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편에게는 고지혈증과 뇌졸중 위험을 말하더니 내 손을 보고는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기냐고 물었다. 안 싸운다고 하자, 무조건 내가 이긴다고 남편에게 절대 이기면 안 된다고 했다. 무슨 즐거운 소린가 했더니, 갱년기 증상이 있으니 남편더러 나에게 잘하라고 당부했다. 혼자 아저씨는 여성화가 진행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우리 둘이 바뀌었다며 웃었지만, 나는 웃음이 나지 않았다. 아직 갱년기라는 단어가 불편하다.


부티 언니들이 하나씩 구매했다. 남편의 얼굴이 벌게지고 눈동자는 잠시 초점을 잃었고 어쩔 줄 몰라하며 나와 침향을 번갈아 보았다.

"어떡해?"

'뭘 어떡해?' 속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먹고 싶어 하는 마음이 너무 잘 전달되었다. 과소비 안 하고 살았다. 물론 나만. 남편은 좀 잘 지르는 편인데 내가 있으면 못 한다. ‘이제 오십인데 그래, 몸을 위해 사치 한 번 하자. 과대광고라 하더라도 먹어보고 싶은 거 먹으라고 하자.’ 같이 먹자며 사라고 했다. 좋은 건 같이 먹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눈치 있는 직원이 다 들리는 귓속말로 남편에게 6개월을 먹으면 끄떡없을 거라며 2개월 치를 서비스로 몰래 챙겨준다고 했다. 혼자 아저씨만 아내랑 약속하고 와서 안 된다며 풀 죽은 모습을 했다. 혼자 온 미안한 마음에 물건 하나도 조심해서 사는 그의 모습에 다정한 아빠와 성실한 가장의 모습이 겹쳐 보여 훈훈하면서도 짠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화장실에 갔다 오니 모두 내려와 있었다. 화장실 갈 때 폰까지 놓고 가는 습관이 있어 두리번거리니 현지 가이드가 "오빠 저기 나갔어"라고 말했고, 침향 가게 직원이 헐레벌떡 내 폰과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이런 미친!' 갱년기 호르몬을 내뿜으며 남편을 찾았다. 헤벌쭉 웃으며 신이 나서 침향을 캐리어에 정리해 놓고 있었다. 침향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 아무 생각이 없었나 보다.

"내 가방과 폰은 챙기지도 않고 나왔어? 니가 안 챙기면 누가 챙겨?"

남편만 들리게 화를 냈다.

"챙기라고 말하고 갔어야지"

"화장실 간다고 했잖아. 나 화장실 갈 때 아무것도 안 들고 가는 거 몰라?"

남편이 입을 다물었다. 침향 직원이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기냐고 물어본 게 생각났다. 그리고 침향 때문에 다퉜다. 나에게 잘하라는 말을 좀 전에 듣고도 남편은 뭉썼다.


즐겁게 점심을 먹으며 침향 이야기를 할 때 다들 우리 부부를 부러워했다. 부부가 함께 왔으니 집에 가서 어떻게 말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어 좋겠다는 말이다. 천 달러짜리 침향은 부티 언니들에게도 부담이었나 보다. 그러면서도 한 번쯤 이런 거 챙겨 먹고 싶었는데 잘 됐다며 좋아했다. 우리에게도 옷은 싼 거 사 입어도 건강이 중요하다며 몸에 좋은 거 챙겨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혼자 온 아저씨는 아내가 무서워 못 산 침향이 못내 아쉬웠나 보다. 다음에 가족여행 와서 꼭 사겠다고 다짐하듯 말했다. 나도 남편 혼자 가서 사 왔으면 '으이그, 네가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을 것이다. 혹해서 사놓고는 한두 달 지나면 방치되는 게 해외 쇼핑센터에서 산 식품들의 현실이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안 사겠다고 마음먹는데, 워낙 저가 여행이라 경비로 생각하는 마음도 있었다. 당장만 대단한 물건이지, 나중에는 침향 같은 건 머릿속에 남지도 않는다. 커피 가게에서 나올 때는 시무룩했던 가이드가 침향 가게에서 나올 때는 기분이 좋아져 농담도 쉬지 않고 했다. 모두 즐거울 수 있으니 잘 샀다.


부티 언니 중 둘은 전직 교사였고 한 명은 현직 교사로 여행을 함께 다니는 모임인데 달랏과 치앙마이에서 한 달 살기도 한 적이 있고, 유럽도 많이 다녀왔다고 했다. 우리가 아이들 다 키우고 부부만 여행 다니는 걸 알자, 동남아는 나중에 늙어서 힘없을 때 다니고, 조금이라도 젊을 때 유럽 여행을 다녀오라고 했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지. 남의 말은 힘이 있고 배우자의 말은 뻔하다.

"장시간 비행기 타기 힘들어서 돈 좀 더 벌어 비즈니스석으로 다니려고요."

남편이 변명하듯 궁색하게 말했다.

"우리도 비즈니스는 안 타봤어요. 생각보다 다닐 만해요. 침향 먹고 가면 되겠네."

역시 좀 다녀본 언니들이다. 남편과 둘이 대화하려면 같은 페이지 반복인데 옆에서 이렇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니 자습서를 보는 것 같았다. 이번 여행에서 남편도 생각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우리도 유럽 좀 가자, 남편.

*침향 덕인지 한동안 잠을 아주 푹 잘 잤다. 침향을 먹으면 연한 나무 향(솔향?)의 트림이 나오고 자다 깨도 입에서 그런 기분 좋은 향이 난다. 모두가 그런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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