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막연히, 다만 함께
2박 3일간의 짧은 여행을 계획했다. 제주에서 차량을 선적하고 완도에서 여수까지 갔다가 다시 완도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배를 타고 있는 동안의 기다림과 어쩌면 괴로울 수 있는 멀미, 다음 목적지까지 차로 달려야 하는 거리를 생각하니 피곤해졌다. '비행기를 탈 걸 그랬나'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 남편에게 연락했더니 생각과 동시에 바로 손이 움직이는 남편은 벌써 배편을 예약했단다. 취소하려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귀찮은 마음에 늘 그랬듯이 그냥 가는 쪽을 선택했다.
걱정과 달리 우리가 탄 골드스텔라호는 대형선박으로 내부 시설이 아주 훌륭했다. 가장 저렴한 이코노미석을 이용했지만 사람이 많지 않은 덕분에 휴게공간의 전망 좋은 좌석을 편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여객터미널에서 남들 먹는 걸 보고 못 참고 산 김밥과, 상할까 봐 냉장고에서 챙겨 온 과일은 배안에서 훌륭한 한 끼가 되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다가 멍하니 바다를 보니, 바닷가 카페가 아니라 바다에 떠 있다는 사실이 묘한 설렘을 주었다. 지루해지면 갑판에 나가 배가 만들어내는 물살을 보고 하늘과 맞닿은 바다를 보았다. 가만히 다가오는 섬을 보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도착지의 마을이 조금씩 가까워질 때면 배를 타고 떠날 때와 비슷한 흥분이 밀려온다. 그건 또 다른 시작이다. 배에서 내릴 때는 늘 빨리 내리고 싶은 마음만 드는데 이번엔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로 배에서의 시간이 좋았다.
검색해 두었던 완도항 주변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목적지까지 달려가는데 좀 이상했다. 평소 보다 더 즐겁고 편안했다. 둘만의 여행, 배를 타고 둘만 육지로 나간 건 처음이었다. 가족여행으로, 때로는 딸들의 이삿짐을 싣고 가면서 구경하는 식의 이사를 겸한 여행을 많이 했으니.... 아이들의 지루함을 같이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가는 길에 오동통한 무화과를 사서 까다롭지 않은 남편과 나눠먹었다. 무화과가 어찌나 달던지.
차를 오래 타면 지루해질까 봐 커피 마시려고 들른 벌교에는 태백산 문학거리가 있었다. 목적지가 여수였을 뿐 별다른 계획이 없었으니 커피를 마시고 구경하기로 했다. 00 거리, 00 시장이 나오면 꼭 들르고 싶어진다. 사람 사는 모습이 생으로 느껴지는 그런 장소를 좋아한다. 둘 뿐이니 나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남편은 큰 불만이 없어서 좋다. 조금 구시렁거리긴 하지만 그것도 재미있다. 아이들과 함께였으면 다니는 내내 아이들 기분을 살폈을 것이다. 반응이 좋으면 참 좋은 여행이 되고 반응이 안 좋으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벌교에서 찾아간 카페는 맘에 안 들었지만 남편은 군소리 없이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요즘 한창 빠진 웹소설을 읽었다. 아쉬운 대로 나도 그곳을 즐겼다. 뜻밖에 맛있는 빵집을 발견해서 행복한 기분으로 갓 구운 빵맛을 보기도 했다. 작은 것들이 주는 기쁨이 컸다. 차를 타고 이제 막 여행을 시작했는데 집에 돌아가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오래, 이렇게 차를 타고 계속 여행하고 싶었다. 어느 시골마을에서 잠을 자고 동네 맛집에서 식사하고 골목을 걷고 시장을 구경하고 돌아갈 날을 걱정하지 않는 여행. 언젠가 그런 날이 올까. 아직 목적지인 여수는 가지도 않고 경유지인 벌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인데도 너무 좋아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여행에 대해서 참 잘 맞는 커플인 것 같다. 취향이 다르지만 조금 투닥거리고 조금 양보하고 조금 고집부리며 하나씩 맞추어 간다. 그렇게 여행하는 우리의 시간이 참 좋다. 예전에 갔던 곳과 닮은 풍경을 지나며 오래전 기억을 나누기도 한다. 그때와는 다른 나이, 다른 마음으로 비추면서. 그렇게 둘이 계속 여행하고 싶다. 어느 날엔가는 오래오래 끝을 두지 않는 여행도 가능하겠지. 나이가 들수록 몸은 더 사리겠지만 그만큼 더 잘 보이는 것도 달리 보이는 것도 있을 것이다. 삶의 속도에 맞게 여행도 그렇게, 조금씩 다른 의미를 더하며 우리의 인생을 채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