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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살 아줌마의 크리스마스선물

나눔을 배우는 나이

by 여름햇살

"김장봉사 갈 사람?"

"저요!"


크리스마스의 추억은 어릴 적 동화 속 이야기와 친구들과 주고받는 카드로 기억된다. 동화 속에 나오는 가난한 집 아이가 엿보는 부잣집 창문 속 세계,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와 케이크를 나도 그 아이처럼 동화 속 그림을 보며 부러워했다. 작은 동네에 살았던 우리는 주변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볼 일이 거의 없었다. 백화점이라 부르던 동네의 작은 쇼핑센터에서 장식해 놓던 크리스마스트리와 거리에 울려 퍼지는 캐럴송이 전부였다. 학교에서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문구점에서 각자 장식품을 하나씩 사가서 교실을 꾸미곤 했다. 요즘에는 학습준비물도 전부 학교에서 나눠주지만 그 당시는 교실을 꾸미는 것도 학생들이 준비했다. 용돈을 아껴 크리스마스 장식을 사고 집 앞 화단에서 적당한 크기의 나무를 골라 반짝이 줄도 걸고, 직접그린 별도 붙이고 양말도 붙이며 놀았던 기억이 있다. 막연히 산타가 나에게도 선물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산타를 믿지 않으면서도 믿고 싶었다. 동화 속 부잣집 아이들처럼 산타 선물을 받고 행복해하고 싶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겼다. 크리스마스가 돌아오면 나는 제일 먼저 작은 트리를 꾸몄다. 반짝이 별도 붙이고 반짝이 공도 걸고, 산타도 걸고, 음악이 나오는 반짝반짝 전구도 걸었다. 아이엄마가 된 나는 트리를 보며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크리스마스 전날에는 아이가 잠들면 작은 선물을 포장해 머리맡에 놓아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큰 아이는 초등학교 때도 여전히 믿는 눈치였다. 밤에 미처 준비해두지 못한 선물을 새벽에 포장하다 뜬금없이 일어난 큰아이에게 들키기 전까지. "쉿, 동생에게 말하지 마."

그날 이후 아이들은 "올해는 산타할아버지가 00을 선물해 줬으면 좋겠다."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이제 그 아이들도 각자 자기의 길로 가고 우리 부부 둘 만 남았다. 남들은 빈 둥지 어쩌고 하는데 나는 둘이 있는 이 시간이 참 편하고 좋다. 아이들이 크는 걸 볼 때도 행복했지만 그 뒤에 남은 조용한 우리만의 시간도 즐겁다. 이제 비로소 나를 위한 시간을 마주했다. 남편과 카페도 가고 여행도 하고 혼자만의 시간엔 글을 쓰고 책을 읽고 궁금한 것을 배우러 다닌다. 갑자기 주어진 시간에 처음엔 좀 허둥댔지만 지금은 나에게 찾아온 이 시간이 너무 고맙다. 엊그제 결혼기념일엔 남편과 오름을 오르고 근사한 카페에 가고 남편을 졸라 꽃을 받았다. 물욕이 없는 난 갖고 싶은 게 별로 없어 선물로 뭘 받고 싶냐고 물으면 얼른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늘 꽃을 사달라고 한다. 뭐가 자꾸 필요하고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보면 좀 신기한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아무 일 없는 하루를 보내고 나란히 누워 잠들며 편안한 일상에 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나는 참 잘 살고 있구나. 더 잘하려고, 더 가지려고 애쓰던 젊은 시절의 나를 지나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내가 되었다. 어린아이의 크리스마스가 설렘이라면 중년의 크리스마스는 감사이다. 동화 속 크리스마스트리와 선물을 부러워하던 어린 나는 일상이 감사한 50살이 되었다. 세상이 내게 건넨 크고 작은 온기를 떠올리면, 이제는 그 따뜻함을 다른 누군가에게 이어주고 싶다.

"산타할아버지, 올해는 저에게 나눌 수 있는 마음과 용기를 선물로 주세요. 감사합니다."

따뜻한 제주라 우리 집은 김장을 안 했다. 겨울배추가 나오면 평소보다 김치를 조금 더 하는 정도였는데 엄마의 김치는 늘 맛있었다. 이제 엄마는 팔십이 넘었고 김치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엄마김치를 얻어먹을 때는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는데 엄마가 더 이상 김치를 안 하면서부터 집김치에 대한 집착이 시작되었다. 작년에는 귀한 김장김치를 나눠준 친구가 천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김장봉사'라는 말을 듣는 순간 봉사는 빼고 김장만 떠올랐다. 나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고 이타심 하고는 거리가 먼 캐릭터인데 나이를 먹어서인지 조금씩 변하고 있다. 타고나길 천사캐릭터는 아니라서 호탕하지 못하고 좀스럽지만 나눔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듣기만 해도 즐거워지는 김장에 봉사라는 이름을 붙여 얼결에 좋은 일을 하게 된 것 같아 거저먹는 기분이다. 일머리도 없고 눈치도 없고 힘쓰는 일도 못한다.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안다. 그냥 이번일이 작은 나눔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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