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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액 남편

여수 백리섬섬길

by 여름햇살

비가 쏟아졌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갈 만한 곳이 없었다. 남편이 호텔엘리베이터 영상에서 본 여수 백리섬섬길을 드라이브하자고 했다. 백리섬섬길은 11개의 해상교량으로 섬들을 이어 주는 해안 길이다. 몇 개의 다리를 지나고 이름 모를 섬들을 보며 달렸다. 달리는 동안에 비가 정신없이 쏟아졌다. 쏟아지는 비가 시야를 가리고 무섭게 창을 두드렸지만 남편이 있으면 무섭지 않다. 여간해선 속을 비추지 않는 사람이라 속으로 두려워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내 입장에선 든든하다. 유난히 긴 다리를 건널 때는 자동차 안에 있는데도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제주에서도 종종 드라이브를 한다. 남편과 보내는 그런 시간들이 나를 안정시킨다. 10년 전, 일상은 평온했고 우리는 매일을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었는데 내 감정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멋진 경치를 보며 드라이브하는 동안 차 안에서 남편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남편의 손을 잡고 있으면 마음이 놓인다. 남편은 내게 충전기다. 밑바닥이라 100% 충전은 어려웠지만 조금씩 기운이 났다. 그때의 감정이 욕심에서 비롯되어 스스로를 추스르지 못한 나약한 마음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그 마음이 잘못은 아니라는 것도. 그때의 나는 그런 시절을 지나고 있었고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그때의 나를 덤덤히 바라볼 수 있는 50살이 되었다. 아무리 힘든 기억도 지우고 싶은 기억도 결국은 다 나를 만드는 일이다.


섬섬여수길의 끝 백야대교를 지나 고흥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왔다. 다시 왔던 길로 차를 돌렸다. 가는 길에 봐 두었던 카페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듯 눈앞에 끝없는 바다가 펼쳐진 작은 카페였다. 돌아오는 길에 본 작은 어촌마을의 낮은 지붕들이 정겨웠다. 비 그친 바다 마을에서 짭조름한 냄새가 열린 창으로 들어왔다. 익숙한 냄새다. 오십 살, 절반쯤 산 지금 섬섬여수길을 드라이브하고 돌아오듯 하나씩 되짚어간다면 난 어떤 선택들을 하게 될까. 똑같은 선택을 하겠지. 그게 나니까.

"안아줘"

속이 복잡할때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대고 둥근 배를 감싸 안고 있으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그는 남편이고 엄마고 가장 친한 친구다. 언제부터인가 TV 광고에 나오기 시작한 음료를 보고 좀 놀랐다. 현대인의 불안을 잠재우는 음료, 안정시키는 음료. 그 광고를 보면서 음료까지 나올 정도로 불안이 지금을 살아가는 모두의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일상에서 안정제가 필요하다는 것, 어쩌면 당연한 건데 그동안 모른 척하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을 보고 웃는다. 그는 나에게 안정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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