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살 아줌마 혼자 놀기
남편은 모임에 갔다. 주말 아침, 아무 약속 없는 날. 살짝 들뜬 기분이었다.
'혼자 뭐 하고 놀지?'
퇴사한 이후 일부러 늦잠을 자곤 했는데 이젠 아까워서 늦잠을 못 잔다. 하루가 너무 빨리 간다. 저녁에 맥주 마시며 빈둥대는 시간을 빼면 되지만 그건 그거고.
'오늘은 조용한 카페에 가서 책이나 실컷 읽다 와야지.'
예전엔 익명이 보장되는 대형 카페만 갔었다. 카페 주인장의 시선이 절대로 머무르지 않을 것 같은 공간. 지금은 신경 안 쓴다. 조용하고 아늑한 동네카페에서 보내는 시간이 좋다. 2년쯤 걸렸다. 물론 지금도 처음 가 보는 공간은 남편이랑 먼저 가 보고 분위기를 파악한 뒤 이용하곤 한다.
'오늘은 좀 멀리있는 북카페에 가 볼까. 남편이랑 갈땐 오래 있지 못하니 실컷 놀다 와야지.' 생각했는데 먼 곳까지 운전하기 싫어 애월에 새로 생긴 북카페로 향했다. 룰루랄라. 내비 따라 꼬불꼬불.
분명 맞는데, 입간판에 길도 그려져 있고 글씨도 있었는데 전체가 해독이 안 되는 상형문자처럼 보였다. 이제 자세히 보는 게 안 된다. 두뇌 문제인지 노안 문제인지 모르겠다. 입구가 아니라는 뜻 같은데 달리 입구처럼 보이는 곳이 없어 그냥 대문을 향해 갔다. 장소는 맞는데 대문은 잠겨 있었다. '남의 집 잠긴 문을 함부로 열 수도 없고. 신상카페라 불규칙적으로 영업하는 건가.' 혼자라 잔뜩 소심해졌다.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거기까지 찾아간 수고가 아까워 차를 타고 모퉁이를 돌아보았다. 입구가 또 하나 있었다.
별채가 있고 메인 공간이 있고 작은 잔디 마당에 낡은 벤치도 있는 정겨운 공간이었다.
나이 들어 보이는 사장님이 반갑게 인사했다. 아주 정성스럽게 수집했을 듯한 소장품이 많았다. 작은 박물관 수준이었다. 책장에서 책을 골라 작은 텃밭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주인공 개, 보리의 이야기가 웃기고 슬프고 아름다웠다.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책이었다. 딱 20년 전에 쓴 책이었다.
주문하면서 얼핏 이용시간 2시간이라는 글을 본 듯해서 잠시 고민했다. 다 읽지 못한 부분은 도서관에서 빌려봐도 되고 기회가 있을 때 또 봐도 된다. 그래도 오늘은 혼자 놀기로 작정한 날 아닌가. 남편이랑 다니면 편하긴 한데 오래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남편은 한 시간도 되기 전에 엉덩이를 들썩이는데 전에는 30분이었으니 그것도 많이 늘긴 했다. 커피를 한 잔 더 시키고 책을 마저 읽었다. 콩을 갈아 직접 내려준 커피가 맛있었다. 김훈작가의 책은 처음인 것 같은데 재미있어서 다른 책도 읽고 싶어졌다. 아이들 키우며 바쁠 때는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는 게 사치같았다. 재테크, 자기 계발서, 자녀교육 도서만 읽어댔다. 큰아이가 다른 엄마들은 소설읽는데 엄마는 왜 소설은 안 읽냐고 물어 본 적도 있다. 책을 마저 읽고 창밖을 보며 잠시 여유를 부렸다. 알고 보니 2시간 이용시간은 별채 이용이었다. 나이가 드니 이해력이 떨어지는 걸까, 그냥 노안 탓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안경을 끼는 나는 작은 글씨를 보려면 안경을 벗어야 해 불편해서 대충 보게 된다. 노안으로 안경을 끼는 게 더 불편한 건지 안경을 벗는 게 더 불편한 건지는 모르겠다.
나는 길치다. 갔던 길을 왜 못 돌아오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더 이상하다. 가는 길과 오는 길은 당연히 다르다. 거기에 더해 난 여러 번 다녔던 길도 잘 모른다. 집에 갈 때도 꼭 내비를 찍고 간다. 그러고도 '잠시 후'라든가 '300미터 앞'이라는 상황이 헷갈려 너무 일찍 우회전하던가 우회전할 때를 놓쳐버린다. 이 날도 그랬다. 남편이 있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혼자 있으니 모자란 행동을 하면서도 마음은 즐거웠다.
'저녁은 혼자 뭘 먹을까' 또 즐거운 상상을 했다. 혼자 책 읽고 간단히 요기도 할 수 있는 새로 생긴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맥주도 한잔할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면서 검색해 보니 쉬는 날이었다. 배가 고파 냉장고를 열었다. 전날 해둔 김치찌개가 있었다. 선물 들어온 돼지고기가 너무 오래돼서 혼자 찌개도 끓이고 구워 먹기도 하는 중인데 마지막 남은 고기로 만든 찌개였다. 남편은 고기 싫다면서 식당에서 숯불에 구운 것만 먹고 집에서는 먹으려 하지 않는다. 특히 찌개에 들어간 건 절대 안 먹는다. 난 고기라면 다 맛있는데 말이지. 김치찌개를 데워서 냉동실에 있던 밥을 꺼내 먹었다. 찌개가 맛있었다. 어렸을 때 돼지고기를 넣고 김치찌개를 끓이면 우리는 고기만 골라먹었는데 이상하게 아이들도 남편도 찌개에 든 고기는 손도 안대서 주로 참치김치찌개를 끓인다.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찌개는 나를 위한 음식이다. 먹을 때마다 고기를 골라먹던 네 남매의 바쁜 젓가락질을 떠올리게 된다.
배불렀다. 나가서 맥주라도 한 잔 하고 들어올까 하다가 귀찮아져 냉장고에 하나 남아있던 캔맥주를꺼냈다. 컴퓨터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맥주가 부족했다. 남편이 서귀포에서 출발했다고 톡을 보내왔다.
"맥주 사다 줘."
남편이 맥주와 함께 들어왔다. 맥주 마시며 남편 옆에서 드라마를 봤다. 같이 있어서 좋았다. 남편의 옆자리는 포근하고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