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룩 남편
"우리 놀러 좀 가자. 맨날 너 혼자만 놀지 말고. 아, 여행 가고 싶다."
보채다가 결국 서울행 티켓을 끊었다.
서울에 가면 큰딸을 만나는데 매번 데리러 가고 데려다주고 하려니 교통지옥 서울에서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일부러 딸이 사는 구로디지털단지역에 숙소를 잡았다. 근처에 있는 호텔이 가성비가 좋은 것도 한몫했다.
"딸 뭐 해?"
"대전에 와 있어."
기껏 근처에 숙소를 잡았는데 대전에 있다니, 부부가 눈만 멀뚱멀뚱.
둘만 노는 게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못 만난다니 서운했다. 몇 걸음 걸으면 딸 집이라 자꾸만 딸이 생각났다.
낮에는 둘이 카페도 가고 한창 예쁘게 물든 은행나무도 보고 줄 서먹는 맛집도 다녀왔다. 전에는 오랜만에 서울 가면 신나서 다리가 아파 못 걸을 때까지 돌아다녔다. 번쩍이는 조명과 부딪치는 사람들의 물결이 너무 좋아 숙소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체력이 안된다. 마음은 불빛 반짝이는 거리를 누비고 싶지만 몸이 저항한다. 그러니 젊을 때 많이 다녀야 한다. 오십 인 지금은 작년과 올해가 다르다.
결혼을 일찍 했고 한창 아이 키우고 바쁠 때 남편은 친구들과 놀려고만 했다. 아직 미혼이었던 남편의 친구들은 남편을 수시로 불러댔고 놀기 좋아하는 남편은 가고 싶어 안달이었고 나는 화가 났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 손이 가지 않을 때쯤 늦게 결혼한 남편의 친구들은 육아로 바빠졌다. 나는 그게 또 화났다. '그것 봐라 남편, 네 친구들은 그렇게 가정에 충실한데 넌 그때 내게 독박육아에 독박가사 씌우고 놀러 다녔지.' 그게 그렇게 억울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남편은 그럴 나이였다. 미숙한 나이. 나이 들어 결혼한 남편의 친구들은 그 나이에 어울리는 성숙함이 자연스러웠을 테고 육아나 가사에 대한 시대 분위기도 달라졌다. 그때의 남편을 늙어서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조금 이해가 된다. 오십 인 지금도 놀자고 하면 엉덩이가 들썩이는 아직 어렸던 남편의 행동이.
이른 저녁시간에 호텔로 돌아와 좀 쉬고 숙소 근처에 새로 생긴 한우 정육식당에 갔다. 고기가 신선하고 밑반찬도 하나같이 맛있는데 가격도 저렴했다. 고기 좋아하는 딸이 또 생각났다. '현이 왔으면 좋아했겠다.'
둘째 날도 차가 밀리는 시간대를 피해 이른 저녁시간에 숙소로 들어왔다. 호텔 뷔페가 생맥주 무제한인데 가격도 비싸지 않았다. 우리 딸도 호텔 뷔페 좋아하는데. 아직 주머니가 가벼운 아이들은 호텔뷔페를 부담스러워한다. 아이들도 같이 왔으면 좋아했을 텐데.
둘만 놀아 편하다면서도 맛있는 음식, 좋아하는 장소 앞에서 아이가 생각나는 건 아이가 어른이 되어도 할 수 없는 부모 마음인가 보다.
2박 3일을 알차게 보냈는데 남편이 자꾸만 지치다 하고 춥다고 했다. 노인네처럼 무릎이 시려 못 걷겠다나 뭐라나. 하필 우리가 가는 뒷날부터 서울 기온이 뚝 떨어져 추웠다. 여름 내 덥다 하던 남편은 추위를 지나치게 의식하며 몸을 사렸다. 맛집에서 한 번씩 음식을 마주할 때 눈이 빛나는 걸 제외하고는 얼굴에 생기가 없었다. 반면 나는 추위를 타는 편인데도 아주 신났다. 생각해 보니 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하고 싶은 것만 했다. 남편은 운전하고 따라만 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때는 생각 못했는데 남편이 생기 없을만했다.
"너 그렇게 춥다, 힘들다 하면서 내일 누가 골프 치러 가자고 하면 신나게 갈 거지?"
"그건 다른 문제야."
"그래도 무릎이 시린 건 바뀌지 않아. 언제는 시리고 언제는 괜찮은 거야."
생각해 보면 나도 그렇다. 남산하늘길을 걷자, 서울대 안양수목원을 가보자 하면서 골프는 싫다.
너무 다른 우리. 이렇게 다른데 계속 같이 여행할 수 있을까? 그럭저럭 함께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해 본다. 서로 다른 둘이 만나 사랑하고 오십 살까지 살았는데 뭐 까짓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