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장녀

by Asset엄마

나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다. 어릴 때는 내가 첫째인게 늘 불만이고, 둘째나 막내인 친구들이 항상 부러웠다. 내가 첫째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닌데 나에게 주어지는 책임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첫째라 항상 나는 모든 성장과정에 시행착오의 실험 대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했던건 엄마가 누누히 강조했던 장녀로써의 책임이였다.

"너는 첫째니깐 항상 동생들의 모범이 되어야 해"

"네가 길을 잘 닦아놓아야 동생들도 따라갈 수 있어."

심지어 결혼 전에도,

"네가 제일 잘 살아야 해"라고 하셨다.


IMF사태가 우리나라를 강타했을 때는 나는 호주에서 대학원 1학년 재학 중이였다. 아빠의 사업도 타격을 입었고, 엄마는 고등학생과 대학생은 학업을 중단하기 어려우니, 내가 먼저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라고 하셨다. 당분간만 한국에 들어와서 일을 하면서, 동생들의 학비를 보태달라고 하셨다. 엄마 말씀이 너무 무리한 요구는 아니지만 나는 굉장히 매우 섭섭했고,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집이 이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나? 내가 무슨 소녀 가장이라도 된 느낌이였다.


복잡한 집안 사정에 마음도 혼란스럽고, 휴학은 이미 결정되었기에 나는 기말 시험 공부도 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매우 성의없이 백지이다 싶은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왔다. 결과는 놀랍지도 않게 거의 모든 과목이 바닥을 쳤고, 평상시에도 가장 어렵다고 느꼈던 과목은 F 였다. 호주를 떠나려고 정리를 하면서, 마음도 정리해 해 가는중에 F를 주신 담당 교수님께서 면담을 하자 하셨다. 굳이 가고 싶지 않았지만, 휴학 처리를 위해 거쳐야하는 관문이 되어버려서 어쩔수 없이 갔다. 내가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핑계도 없었고, 핑계를 댈 마음도 추호도 없었다. 그저 어떤 말씀을 하시던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만 해야지, 하고 들었다.

첫 질문은 아니나 다를까,

"왜 백지를 냈나요? 시험 준비를 하지 않았나요? 몸이 아팠나요?"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공부를 할 수 없었는 사정이 있나요?"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약간의 정적이 흐르고,

"당신의 어깨에 버거운 짐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개인적으로 친분이나 교감이 전혀 없었던 교수님에게 이런 얘기를 듣는 순간 정곡이 찔린 기분이였다. 내 마음이 보였었나? 깜짝 놀란 마음을 최대한 숨겨가며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심장이 2배, 3배 빨리 뛰는 느낌이였었다. 곧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2년 정도 후에 다시 돌아가려던 대학원은 아직도 휴학 중이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첫번째 직장에서 일하여 받은 급여는 단 한번도 동생들을 학비에 보탬이 되지는 않았고, 10원 한 장 떼지 않고 꼬박꼬박 적금을 부었다. 나는 엄마가 주는 용돈으로 생활하였다.



이양연의 시 <야설>을 한 구절을 읽자마자 머리에 바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서 행여나 잊어버릴까 급하게 작성했습니다. 제가 읽은 구절입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마라

오늘 내가 디딘 발자국은

언젠가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백범 김구 선생님은 1948년 남북협력을 위해 38선을 넘을 때 이 시를 읊으며 의지와 각오를 다졌다고 정해지는데, 같은 시를 읽어도 그 소회는 참 다르네요.


제가 동생들에게 길이 되어야 되다는 책임감이 참 무겁긴 했습니다. 결국은 엄마의 나에 대한 기대가 이렇게 표현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큰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이 저는 참 서글픕니다. 물론 제가 큰 딸이여라서 그런 감정이 들기도 하겠지만, 태어난 순서로 장녀에게 또는 장남에게 큰 무게를 지게하는 건 우리 아이들 세대에서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차피 요즘은 하나 아니면 둘만 낳는 세상이니까요.


장녀로 태어나 그동안 말없이 열심히 동생들과 가족을 돌보며 제2의 엄마로 살아왔던 분들께 이 글을 바칩니다, 당신들이 계셔서 참 고맙습니다, 이제는 나를 기쁘게 하시는 일을 많이 하셨으면 합니다.


저희 엄마도 장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