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9. 상품개발 MD가 만나는 사람들
커뮤니케이션, 리더십
상품을 개발하는 MD는 완성된 상품을 판매, 육성하는 일반적인 MD와는 달리 0(zero)의 상태에서 상품을 만드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치게 된다. 따라서 업무의 범위가 상당히 광범위하고,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과의 접점이 많다. 상품을 개발하면서 만나는 제조업체의 R&D 담당자, 영업담당자, 사내 디자이너, 판매 담당자, 마케팅 담당자, 품질관리 담당자, 홍보 담당자, 최종적으로는 고객까지. 많은 날에는 수십 통의 전화를 주고받고, 미팅도 상당수고, 사내 메신저로도 그들은 나를 찾는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상품에 관한 모든 이슈를 두고 나와 논의한다. 내가 총책임자이기 때문이다.
상품 개발 초반의 나는 꽤 많은 부분에서 그들과 갈등을 빚었다.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화가 나기도 했고, 일부러 협조를 안 해주는 것인가 의심하기도 했고, 왜 도와주지는 않고 방해만 하고 훼방만 놓는 거냐 하며 어린애처럼 분노하기도 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내가 존경하는 선배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선배가 해주신 말씀은 내가 일을 대하는 방법을 바꾸어 놓았다.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역할은 축구감독과 같은 일이다. 축구감독이 어떻게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고, 어떤 포지션에 선수를 배치하느냐에 따라 다른 퍼포먼스를 구사하듯이 우리도 상품 하나를 만드는 것은 하나의 경기에 임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축구장에서 달리는 사람들이 적재적소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구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말이다. 순간 뭔가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나는 오로지 좋은 상품을 출시하는 목표만을 바라보고 그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을 해주기만을 원했다. 나의 모습은 혼자 미친 듯이 드리블하며 수비수를 제치려다 실패하는 공격수의 모습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평면적인 시각으로 편협하게 바라보면 안 되는 일이었다. 한 명의 선수가 아닌 감독의 시각에서 입체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이었다.
좋은 감독이란 무엇인가? 선수의 강점과 단점을 잘 알고 그를 베스트 포지션에 기용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전체적인 전략 하에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나와 만나는 그 많은 사람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각자 중요시하는 관점이 존재한다. 생산을 하는 제조업체에서는 공장 설비의 생산성, 패키지의 MOQ(Minimum order quantity), 원부재료의 관리 등과 같은 요소들이 중요하다. 품질관리 담당자에게는 품질 법적 이슈에서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일절 없기를 원한다. 디자이너는 상품의 콘셉트와 방향성, 전달할 메시지를 비주얼적으로 잘 표현하여야 하고, 마케터는 고객에게 어필할 에지 포인트와 프로모션의 방법이 가장 궁금하다. 홍보팀에게는 기자에게 배포할 수 있을 만큼의 이슈 거리가 되는 콘텐츠인지 판단하여야 하고 팩트 기반의 정보가 필요하다.
그들이 원하는 관점을 이해하고, 이제는 실제적인 업무를 적극적으로 배웠다. 식품법 주요 사항을 공부하면서 품질담당자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했고 때로는 성공적으로 반박했다. 디자이너가 인쇄 감리를 갈 때는 같이 따라가서 배우고 오기도 했다. 제조 공장은 늘 다녔다. 신규 제조 공장에는 품질팀처럼 체크리스트를 갖고 가서 하나하나 뜯어보며 거래 여부를 판단했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공장까지 다니며 설비를 이해하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상품의 생산관리 전반을 이해하게 됐다. 상품을 판매하는 매장의 어려움 또한 중요한 요소였기에, 매장에서 직접 상품을 진열하고 판매담당자와 인터뷰를 하며 고충을 듣고 개선하는 것 또한 중요한 업무였다.
이렇게 관점과 업무를 이해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도움이 됐다. 해달라, 못한다 갈등하기보단 봉착한 어려움을 함께 논의하고 가능한 선에서 절충안을 찾아나가며 신뢰가 쌓여갔다. 때로는 내가 이전 경험을 통해 해결한 방식을 토대로 조언해 주었다. 이전보다 훨씬 많은 협조를 구할 수 있었고, 여러 번 호흡을 맞추다 보면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진행이 되는 일들도 많아졌다.
한편으로 내가 가장 중요시한 것은 상품화가 잘 되었을 때, 그들에게 공을 돌리는 일이었다. 상품은 결코 나 하나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영역의 전문가들이 최선을 다했기에 만들어진 모두의 결실이기에 감사함을 잊지 않고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나'의 상품이 아닌 '우리'의 상품이라는 생각은 늘 진심이었다.
결국 하나의 상품은 하나의 프로젝트고, 태스크포스처럼 다양한 전문가들이 모이면 그 TF의 리더는 바로 상품개발 MD다. 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을 리딩하려면 그들의 일을 잘 알고 이해해야 한다. 잘 소통해야 하며,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 해야 한다. 이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기도 하지만 큰 틀에서 '리더십'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함께 일하는 이들로 하여금 나를 신뢰하게 하고 최선의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 상품개발 MD가 가져야 할 매우 중요한 역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