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꿈 / 육군 장교 (2012. 3 ~ 2014. 6)
상무대에서의 교육이 끝나고 강원도에 있는 11사단 20여단 36전차대대 2중대 2소대장으로 배속되었다. 때는 2012년 7월이었다.
직업 군인을 하겠다는 목표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야전 부대 지휘자가 된다는 생각에 적잖이 설렜다. 마냥 설렌 마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두려운 마음도 컸다. 전차라는 중장비를 다루는 부대 특성상 부사관들이 부대 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고, 특히나 성향이 강한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병사들 또한 기가 센 경우가 많아 통제가 쉽지 않다고들 했다. 서로 눈치를 살피며 주도권 싸움을 하고, 계급을 무기 삼아 무언가를 강제하고... 이러한 것들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괜한 갈등을 만들기 싫었던 나는 좋은 부대원들과 인연이 닿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새로운 사람이 부대에 왔으니 초반에는 여기저기 인사 다니기 바빴다. 주임원사님과의 간담회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같은 부대에 배속된 동기 4명과 주임 원사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주임원사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각 소대장들에게 부소대장이 누구냐고 물었다. 부소대장, 줄여 부장이라고도 부르는 이 직책은 말 그대로 소대 내에서 소대장 다음으로 많은 권한을 가진 직책이었다. 상사, 최소한 중사가 이 직책을 맡게 되는데 이들은 장비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고 훈련에 대한 노하우를 많이 알고 있기에 사실상 이들과의 관계가 소대장 임무 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내가 답할 차례가 와서 이기진 상사라고 답했을 때 주임원사님께서 보인 반응이 다른 소대장들의 답변에 보였던 반응과는 조금 달랐다. 주임원사님은 앞으로 내 군생활이 조금 힘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기진 상사는 자신만의 철학이 확실하고, 고집에 셌다. 이런 사람은 많으니 여기까지만 말하면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기진 상사는 부대 내 명성이 자자할 만큼 그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고, 에이스라는 칭호가 그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정말 여러 가지로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성격적으로 선이 너무 강해 본인과 맞지 않은 사람들과는 관계를 잘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난 이기진 상사와의 관계가 불편했다.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마저도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태어나서 그토록 거부감을 느꼈던 존재는 여태까지도 만나보지 못 했다. 난 관계에 서툰 사람이 아닌데, 오히려 능숙한 사람인데도 이기진 상사와의 관계는 내가 소대장 임무를 수행한 약 10개월 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소대 회식 후 서로 거나하게 취해 의기투합하고 나면 그와의 간격이 조금 좁혀진 느낌이 들었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기가 막히게 원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가장 의지가 되어야 할 사람과의 관계가 어려우니 초반 군생활이 정말 버겁게 느껴졌다. 다음 날이 오지 않길 바랐던 무수한 날들 가운데에서도 해는 여지없이 서쪽으로 졌고, 동쪽으로 떴다. 그는 내가 그를 이토록 불편해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차가웠던 그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왔다가 정을 조금 붙이려면 떠나는, 숱하게 많은 장교들을 봐오며 관계의 덧없음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계급만 높았지, 할 줄 아는 게 없는 소대장들을 지켜보며 환멸감도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해냈다. 그것도 잘. 그래서 소대를 운용함에 있어 내가 그 덕분에 편안함을 느끼는 부분도 많았다. 고맙기도 하고, 밉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와 미워하면 뭐 하나. 안녕히 계시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역시 사람은 직접 경험을 해봐야 한다. 나는 군대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계급 구조가 나에게 이렇게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야전 부대에 오기 직전까지도 깨닫지 못했다. 부사관은 군생활을 아무리 오래 해도 이제 막 임관한 소위보다도 계급이 낮을 수밖에 없다. 고작 몇 개월간 기초적인 군사 지식을 습득한 소위는 경력이 오래되고, 나이가 한참 위인 부사관들을 부하로 다루어야 하는데 이것이 나에게는 그렇게 힘든 일이었다. 내가 그들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우월했다면 지시를 하고, 명령을 하는 데 있어 계급이나, 나이의 고하가 문제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갓 임관한 소위가 뭘 알겠나? 전장에서 부하들을 진두지휘하는 멋진 장교의 모습은 없었다. 나는 갓난아이였고, 부사관들은 나의 보모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직업을 선택할 때에 관심 가는 업종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직접' 경험해봐야 한다. 유튜브를 보고, 책을 읽는 것은 간접적인 경험에 그칠 뿐이다. 난 오늘날까지도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앞서 이야기한 경로를 통해 간접적인 경험을 먼저 해보고, 그래도 해보고 싶을 때 꼭 현장에서 일정 시간 직접 그 일을 경험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