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안식월의 기록
정말 행복하다. 일을 하지 않아서 좋은 것인지, 브라질이 좋은 것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엄청나게 행복하다. 이제 곧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싫다. 너무 싫다.
아버지는 그렇게 바라시던 퇴직을 마침내 거머쥐시곤 딱 세 달 쉬시더니 다시 일터로 돌아가셨다. 나는 아무런 일도 안 하고 쉰 지 이제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버지의 마음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전. 혀.
직선의 삶이 아닌 원형의 삶은 끝내준다. 직선의 삶은 예측이 불가능하고, 다가올 나날들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지만 원형의 삶은 같은 하루가 계속 반복되니 준비할 것이 없다. 나는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비슷한 일들을 하다가 비슷한 시간에 잠에 든다. 나는 줄곧 가정에서 키우는 개의 삶을 부러워했는데 요즘 나의 삶이 딱 그러하다. 나는 살지 않는다. 살아진다.
디저트류를 제외하면 브라질 음식은 산미가 강하고 단맛이 거의 없다. 와이프가 한국 음식을 먹으며 한국 음식은 왜 이렇게 다 다냐고 한 게 이제야 이해가 된다. 대체로 맛있어서 여행하는 내내 전혀 불만이 없었다. 한국 음식이 전혀 그립지 않았고, 막판에 뜬금없이 한국 라면이 먹고 싶어 지긴 했다.
브라질의 더위는 상당한 편이다. 한국보다 기온이 높게 올라가지만 습도는 비교적 적어 그늘에만 있으면 지낼만한 편이다. 사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더위에 임하는 자세이다. 뭐든 피하려고 하면 고통스럽다. 그저 내려놓으면 편해진다. 브라질의 더위는 내게 그랬다. 덥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근데 이 방법도 잘 때는 통하지 않았다. 더위 때문에 잠을 설친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또 나는 내려놓는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일도 안 하는데 필요하면 낮잠 자면 그만이야.
브라질의 더위처럼 다 내려놓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한 가지 내가 내려놓지 못한 게 있다. 그것은 바로 모기! 예전부터 이상하게 생각해 온 것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 이상하게 모기가 높은 비율로 나를 먼저 문다. 챗 GPT에게도 물어봤지만 마땅한 이유를 모르겠다. 난 개미 한 마리 죽이는 것도 피하고 싶을 만큼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모기는 가차 없이 죽여버린다. 이것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이중성인가. 브라질에 머무는 동안 모기를 50방 정도는 물린 것 같다. 지금도 온몸에 붉은 자국이 군데군데 나있다. 그래도 엄청 다행인 것! 브라질 모기는 주로 주행성(낮에 활동함)이다. 최소한 잘 때는 안 건드린다는 이야기. 그래서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자도 재수가 없으면 한 방 물리는 정도다. 글을 쓰면서 든 생각인데, 주행성 모기도 짜증 나는 건 매한가지이다. 밥을 먹을 때나, 쉴 때나 늘 모기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브라질 여행은 99점이다. 모기가 1점을 까먹었다.
브라질 사람들은 고른 치열을 갖는 것에 굉장히 민감하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교정기를 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치열이 고르지 않은 사람 찾기가 쉽지 않다. 브라질 사람들의 미소는 몹시 아름다운 편인데 고른 치열이 한몫을 단단히 했다고 본다. 아내도 치열이 엄청나게 고른데 놀랍게도 교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치열이, 그 미소가 우리 관계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브라질에서 아시안을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여러 인종이 뒤섞여 살지만 유독 아시안의 비율은 낮은 편이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재밌는 건 내가 번화가를 활보해도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외국인들이 시선을 굉장히 많이 받는데 말이다. 아마 한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지나치게 신경 쓰고, 브라질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리라.
나는 오래된 것들을 유독 좋아한다. 오래된 음악, 건물, 옷 등을 보면 이상하게 관심이 간다. 브라질 여행이 즐거웠던 이유 중 하나는 오래된 자동차들이다. 아내의 할아버지 자동차만 해도 82년도에 생산된 포드 픽업트럭으로 나보다 나이가 많다. 거리를 나갈 때마다 끝내주는 옛 디자인을 간직한 올드카들을 한 대 이상은 볼 수 있다. 눈이 참 즐겁다. 언젠가 브라질에 이민을 온다면 나 또한 올드카 하나를 장만해서 멋지게 타고 다닐 생각이다.
브라질 여행을 하는 동안 이상하리만큼 자연스럽게 아내와 역할 분장이 이루어졌다. 이 사람과 함께 살다 보면 어찌 모든 것이 이토록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의문스러운 순간들이 종종 있다. 이번 여행에서 나의 주된 역할은 하늘이 밥 주기와 재우기였다. 그밖에 모든 일들은 아내가 담당했다. 혹자는 '꿀 빨았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밥 주기와 재우기는 시간과 품이 굉장히 많이 드는 일이다. 특히나 하늘이는 밥 먹을 때 한 시를 가만히 있지 않는다. 쓰다 보니 살짝 변명 같기도 하다. 아마 아내가 조금이라도 더 고생한 건 분명할 것이다.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내 주된 업무가 하늘이 밥 주기와 재우기다 보니 하늘이와 굉장히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마냥 즐거운 경험이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 시간이 네게 굉장히 의미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 먹고, 자고, 싸는 것만 할 줄 아는 녀석이지만 그래도 시간을 갖고 이리저리 살피다 보면 이 친구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이 녀석이 난동을 피울 때면 육체적, 감정적 소모가 극심하기도 했었다. 어쨌든 아내와의 환상의 팀워크로 브라질에서의 하늘이 육아도 아무런 사건사고 없이 끝나간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부분은 단연코 아내의 가족들을 만난 것이다. 다들 너무 잘해주셔서 죄송스러울 정도였다. 함께 한 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지만 나는 벌써 아내의 가족들에게 강한 유대감을 느낀다. 이제 이들은 나의 가족이기도 하다. 나는 이제 브라질에도 가족이 있는 사람으로서 2년에 한 번은 꼭 이곳을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 여행 비용이 만만치가 않은데 좀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
브라질 아내와 결혼한 뒤 늘 포르투갈어에 대한 갈망이 있었지만 언어 공부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번 마음을 먹고 금방 포기하기 일쑤였다. 강력한 동기가 필요했다. 아내와는 영어로 소통하면 그만이기에 포르투갈어를 공부해야 할 동기가 딱히 없었다. 그저 잘하고 싶다는 욕심만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브라질에 와 여러 사람을 만나니 동기가 생겼다. 이들의 대화에 나도 참여하고 싶다. 이들의 삶이 궁금하고, 이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고, 내가 얼마나 당신들을 사랑하는지도 알려주고 싶다. 한국에 돌아가면 포르투갈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노바 유로파의 아침이 많이 그리울 것 같다. 아내의 할머니댁에는 엄청나게 큰 정원이 있는데 아침이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얼굴에 난 솜털을 간질인다. 바람의 곡조에 맞춰 정원에 뿌리를 내린 온갖 풀들도 춤을 추고, 새들은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끊임없이 지저귄다. 할머니가 내린 커피 냄새가 공기를 타고 은은하게 풍겨오기까지 하면 그야말로 오감이 격동한다. 식탁에 마주 앉은 아내와 나,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서로에게 간밤의 안부를 묻는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벌써 그립다. 할아버지는 내가 노바 유로파를 떠나는 날 내가 다시 브라질에 오기 전에 자기가 죽을 수도 있으니 자주 연락하라는 농담을 던지곤 쾌활하게 웃으셨다. 아내가 통역을 해준 것을 듣고 나도 배꼽 빠지게 웃었지만 혹시나 이것이 현실이 되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이 든다. 부디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나는 생과일주스를 브라질에 와서 처음 먹어봤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100% 과일주스. 오렌지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는 할머니가 만드신 오렌지 주스를 한 번 맛보고는 너무 맛있어서 한 번 더 만들어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할머니는 흔쾌히 두 번이나 더 수쿠 데 라렌샤(오렌지 주스)를 만들어주셨다. 아내는 한국에서 주스를 마실 때마다 못 먹을 것이라도 먹은 것 마냥 얼굴을 일그러뜨리곤 했다. 나도 이제 입맛이 까다로워져 어쩌나 싶다. 한국에 돌아가기 싫다. 이곳에 계속 남아 오렌지주스를 또 먹고 싶다. 아내는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만들어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안다. 하지만 거기엔 무언가가 없다. 낭만, 바로 낭만이 없다.
주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떠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아사이! 아사이는 아사이열매로 만든 아이스크림이다. 열매 함유량이 아주 높은 아이스크림이다 보니 죄책감 없이 먹을 수 있고, 무엇보다도 그 맛이 참 좋다. 그냥 먹기도 하고, 여러 토핑을 얹어서 먹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바나나와의 궁합이 참 좋다고 생각한다. 브라질 여행 중에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을 꼽으라면 단연 아사이가 될 것이다. 노바 유로파에서는 냉장고에 쟁여두고 거의 매일을 먹었다. 이따 공항에 가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먹을 생각인데 벌써부터 설렌다.
나는 지금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이제는 이 에세이를 마무리하고 싶다. 이제 몇 시간 뒤면 아쉬운 모든 것을 뒤로하고 공항으로 떠나야 한다. 후회가 없으려면 이 시간들을 조금 더 만끽해야 한다. 정말로 짜릿하고, 황홀하고, 의미 있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브라질에서의 1분, 1초를 모두 사랑한다. 한 번이라도 미소를 나눈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 눈에 담은 모든 풍경을, 입에 담은 모든 음식을, 귀에 담은 모든 소리를, 코에 담은 모든 냄새를 사랑한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들을 함께 한 하늘이와 마기다를 깊이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