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꿈 / 육군 장교 (2012. 3 ~ 2014. 6)
전역 전 말년 휴가 이야기를 안 할 수 없겠다. 모든 순간이 내 삶에 흔적을 남겼지만 이 여행은 유난히 더 큰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나는 집돌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변화무쌍한 삶을 사니 많은 사람들이 내가 부지런할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난 아주 게으르고, 정적인 사람이다. 본질적으로는 그렇지만 어떤 시기를 만나면 또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사람은 날씨에도 쉽게 영향을 받지 않는가? 사람은 '본질'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서 존재하기에 시시때때로 변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 정도가 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에너지가 왕성하기에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 시기가 그랬다. 혹한의 겨울이 지나고 태동하는 봄이 온 듯한 느낌. 나는 대충 짐을 챙겨 약 5일간의 기차 여행을 떠났다. 태어나서 나의 의지만으로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고, 더군다나 혼자 여행을 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온 것인가?
첫 행선지는 광주였다. 장교로 막 임관해서 교육 기관에 있을 때 우연히 광주 무등산에 등반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 너무 좋아서 언제든 시간이 되면 꼭 다시 한번 오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대전에서 기차를 타고 광주로 향하는 길, 벌써부터 마음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여행이 주는 모든 감정이 하나 같이 다 새로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난생처음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닌가? 군 생활을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융합될 수 없는 조직에 있으면서 천천히 나 자신을 잃었고, 여행은 그렇게 잃어버린 나 자신을 다시 되찾아가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무더운 날씨였지만 무등산 등산은 여전히 즐겁기만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듬성듬성 비어있던 '나'의 여백이 채워지는 것만 같았다.
여행 첫날 저녁에는 여행 커뮤니티를 통해 만난 사람들과 술을 한 잔 했는데 이 또한 굉장히 특별한 기억이었다. 난생처음 만난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것 그 자체도 신기한 일이었지만, 각자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는 내 안으로 그 사람의 인생이 통째로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의 밤은 길고 또한 깊었다.
다음 날에는 광주를 떠나 담양으로 향했다. 담양의 상징으로 봐도 무방한 죽녹원과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에 가볼 심산이었다. 죽녹원에서 대나무 사이를 거니는데 행복감이 온몸을 가득 채우다 못해 터져 나오는 듯했다. 무더운 날씨였음에도 대나무가 감싸 안아 만들어주는 그늘은 더없이 시원하기만 했고,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잎이 서로 부딪쳐 만들어내는 소리는 자연이 주는 또 하나의 향연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숲 속을 거닐다 벤치에 앉아 노트와 펜을 꺼내 들었다.
글에서도 느껴지지만 여행의 매력 속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글 속에 등장하는 인연들과는 꽤나 오랜 시간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이내 연락이 끊겼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궁금하다. 내가 유명해지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죽녹원 산책을 마무리하고 메타세쿼이아 길로 이동을 해야 했는데 그렇게 멀지 않길래 그냥 걸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길 또한 '관방제림'이라고 불리는 명소였다. 메타세쿼이아 길도 참 좋았지만 관방제림을 걸을 때는 그야말로 신선이 된 느낌이었다. 담양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죽녹원-관방제림-메타세쿼이아 길을 꼭 거닐어보길 바란다. 나는 정보가 없어 아무 준비 없이 무턱대고 걷고 또 걸었지만, 꽤 긴 여정이니 간식과 마실 것을 챙겨 중간중간 휴식을 취한다면 더 즐거운 여행이 될 것이다.
담양에서 하루 머무를까 싶었지만 딱히 가보고 싶은 곳이 없어 바로 목포로 이동했다. 목포에는 밤늦게 도착했다. 연이틀 여행을 강행하느라 몸에 여독이 제법 쌓여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날은 과자 한 봉지를 곁들여 맥주를 마시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에는 유달산에 올랐다. 며칠 사이 날씨가 무더워져 별로 높지도 않은 정상에 오르는 데 진땀을 뺐다. 정상에 오르니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 빠르게 땀을 식혔다. 등산의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든 정상에 오르면 늘 풍족하게 보상받는 느낌이 든다. 이때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행지에 가면 그곳에 있는 산에 올라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목포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전주로 향했다. 며칠 혼자 여행했더니 슬슬 사람 곁이 고파져 여행 커뮤니티에서 동행을 구했다. 만나고 보니 나와 마찬가지로 말년 휴가를 나온 학군단 동기여서 더 반가웠다. 나중에 다른 여성 한 분까지 합류하여 총 셋이서 전주 한옥 마을을 함께 탐방했다. 이때 느낀 것이 있는데 내 성격상 여행은 혼자 하는 것이 가장 좋고, 다른 이와 함께 하더라도 정말 가까운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하는 와중에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나는 자유로울 때 가장 빛나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니 나의 행동에 많은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렇게 답답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여행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을 것처럼 느껴지던 내 모습에서 늘 새로운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나의 감춰진 면모를 새롭게 알게 되는 것, 이것이 여행의 참된 묘미 중 하나이다.
이 날 저녁에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일화가 하나 있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데 그중에 뉴질랜드 출신의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섞이지 못하고 어색하게 혼자 맥주를 들이켜고 계시던 그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실용 영어를 잘 못할 때라 지레 겁부터 났다. 다행히도 영어를 제법 하는 어떤 분께서 할아버지에게 간간이 말을 걸어주었다.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대강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할아버지는 세계를 여행하고 계셨다. 취기 덕에 용기가 조금 생겨서 여행지 중에 어디가 가장 좋았냐고 여쭈니 할아버지의 대답이 가히 명품이다.
다음에 갈 곳!
여행이 주는 매력을 이제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나로서는 노구를 이끌고 세계를 향유하는 할아버지가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사진 한 장을 부탁드렸다. 4박 5일 일정의 짧지만 굵었던 여행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깊어져 갔다.
스물한 살에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삶이 더 선명해지는 느낌을 받았는데 여행 또한 같은 감동을 주었다. 그렇다고 내가 이 행위 자체를 즐긴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애써 책을 읽고, 애써 여행을 떠난다. 솔직히 말하면 귀찮다. 나는 성장에 대한 욕망이 많은 사람이고, 독서와 여행은 이 욕망을 해소시키기 위한 가장 간편하면서도 좋은 방법일 뿐이다.
여행은 삶을 크게 흔들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의 총체다. 환경이 바뀌면 생각하는 방식이 바뀐다. 산이나 바다에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 도심지 한가운데 있을 때 느끼는 그것과 같지 않을 것이다. 환경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만나는 관계 또한 달라진다. 일상에서 벗어나야만 느낄 수 있는 이런 신선함으로 인해 사람은 달라지고, 또 성숙해진다.
말년 휴가에 처음으로 혼자 떠난 이 여행은 그 자체만으로도 좋았지만 내가 그동안 사고했던 틀을 허물고,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측면에서 아주 값진 시간이었다. 호주에서 돌아온 뒤에는 사는 것이 바빠 여행 같은 여행을 떠날 시간이 없었다. 지난 여행의 기록들을 뒤적이며 글을 쓰는 지금,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열망이 강하게 든다. 조만간 꼭 시간을 내서 여행을 떠나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