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꿈 / 육군 장교 (2012. 3 ~ 2014. 6)
전역했다. 때는 2014년 6월 30일 월요일이었다. 꾸역꾸역 버틴 하루하루였지만 막상 정든 부대를 떠나려고 하니 시원섭섭했.....기는 개뿔, 너무 좋았다. 자유로운 영혼이 2년 4개월 만에 속박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는데 어찌 섭섭한 마음이 들겠는가? 계속 소대장을 했다면 그래도 소대원들과 정이 많이 들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겠지만 교육장교는 고독한 위치가 아닌가. 부대에서 신속하고, 조용히 내 흔적을 지우고 싶어 전역 신고 후 얼른 부대를 나왔다.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다. 육군사관학교 시험에서 낙방한 것, 그리고 군장학생 시험에서 낙방한 것 모두 군생활이 나의 길이 아님을 미리 알려주는 복선이었다. 운명에 기대는 내게 사람들은 웃기지 말라며, 너의 무능함 때문에 떨어진 것이지, 그게 그렇게 될 일이었다는 건 그저 합리화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굳이 변명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당사자인 나는 이것이 운명적인 사건이라고 믿을 뿐이다. 어쨌거나 정말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뜻이 없는 군대에서 수년을 고통 속에서 보낼 뻔했다. 장교로 복무할 수 있는 제도 중 가장 그 기간이 짧은 ROTC 장교로 국방의 의무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꿈에 그리던 장교가 되었고, 그 일이 나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걸 몸소 깨달았으니 적어도 후회는 없었다.
후회는 없다손 치더라도 2년 4개월 동안 내가 군대에 남긴 흔적들에 결코 떳떳하지가 않다. 그게 후회가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후회와는 조금 다른 감정 같다. 왜냐하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 대부분의 과정을 똑같이 반복할 것이다. 내가 군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마치 '새가 열심히 수영을 한다.'라는 말처럼 어색하게 느껴진다. 제대로 임무 수행도 못한 내가 '육군 장교'라는 타이틀을 제목에 써도 되나 싶은 마음도 든다. '어쨌든 사실은 사실이니까'라고 위안해 보지만 나의 군생활이 부끄러운 것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멋진 군인이 되고 싶었는데 씁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교로 복무했던 시간이 내 삶에 미친 영향이 결코 작지 않다.
첫째, 리더십이 꽃피우는 시기였다. 남 앞에 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나였다. 대학생 때 어쩌다가 발표라도 맡게 되면 엄청난 스트레스에 압도되곤 했다. 군에서는 리더로서 남 앞에 설 일이 부지기수로 많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남 앞에 서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좋다고 해야 하나. 나의 말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장병들을 볼 때는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둘째, 적지 않은 돈을 모아서 전역할 수 있었다. 리더십 강의를 들으면서 돈을 번 격이다. 이보다 좋을 수가 있나?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돈을 모아서 사회로 나오니 부모님께 의지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독립적으로 할 수 있었다.
셋째, 무리에 섞여 일을 하다 보니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극명해졌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우두머리가 되어야 했다. 그게 구멍가게가 될지언정 '경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삶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깨닫고 인정할 수 있는 기회는 깨달을 수 있는 기회는 쉽지 않거늘 군대는 내게 너무나도 선명한 길을 제시했다.
넷째, 삶의 고통을 함께 짊어질 평생 인연을 만날 수 있는 장이었다. 군에서 인연이 된 몇몇 사람들과는 여태 연락을 주고받으며 생사고락을 함께 하고 있다.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밖에도 여러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직업과 그 직업이 주는 환경이 주는 변화는 엄청난 것이니까. 내가 군에서 얻은 것이 워낙 많기에 아직 국방에 의무를 다하지 않은 젊은 친구들이 있으면 나는 ROTC 장교의 길을 가보길 적극적으로 권한다. 단점이라고 해봐야 대학생 때 방학 기간의 일부를 훈련에 할애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반 사병보다 복무 기간이 조금 더 긴 것 정도인데 장점이 워낙 많아서 단점은 하잘 것이 없는 것이 된다. 하물며 대학생이 방학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그 시간을 알차게 보내겠는가? 훈련에 참여해서 영과 육을 건강하게 단련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장점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삶을 길게 보는 혜안이 있는 사람이라면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전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부 동기들은 대기업에 취업이 확정되었다. 내심 부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나는 나대로 계획한 일이 있었다. 휴가 기간 중에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 위해 부지런히 준비했다. 비자는 확정되었고 항공권만 예약해서 떠나면 그만이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는 듯했지만, 삶이 언제 계획대로 흘러가던가? 행복과 불행이 절묘하게 꼬여있는 뭉게뭉게 구름이 저편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삶이라는 것이 그렇다. 대비한다고 막을 수 없는 것. 삶은 이렇게나 일방적이며 절대적인 힘으로 개인을 무력화시킨다.
아무튼 나는 전역했고, 드디어 일반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