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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목 Jul 22. 2022

필연일까, 우연일까.

의미를 좇고 싶다. 그것이 허무와 맞서는 유일한 무기일 테니.


두 우주의 충돌은 필연적이며, 때론 사고이기도 하다.



해준와 서래의 만남은 필연적이었고, 또한 사고였다. 사고는 통제할 수 없다. 일단 벌어지고 나면 전개되고, 마무리되고, 어떤 결과로 이어진다. 사고야말로 우리가 우리의 삶에 완전한 주인이 될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해준은 선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유능한 형사지만 한 여인의 등장으로 그의 삶을 떠받치고 있던 그 고고한 가치들이 그야말로 붕괴된다. 내면이 무너져 내린 해준은 안개로 가득한 도시 이포로 이사한다. 그것은 한 여자와 헤어지기 위한 결심이었고, 무너져 내린 내면으로부터의 도피였다. 이포의 안개는 해준의 내면에도 자욱하다. 이포의 안개가 만드는 곰팡이는 해준의 내면 또한 좀먹기 시작한다. 살기 위해 도망쳐온 이포에서 그는 역설적이게도 생기를 잃고 죽어간다. 한 운명적인 만남이 몰고 올 수 있는 파멸성에 우리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된다. 


해준의 외도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에게 손가락질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는 정제되어 있었고, 가정에 충실했다. 그는 철갑으로 온몸을 둘렀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예리한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이포로 이사하는 그의 결정 속에 본인의 삶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통제하고자 하는 노력이 깃들어 있지만, 이 또한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삶은 수많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관계들을 다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래가 이포로 이사 오면서 욕망의 전차는 다시 한번 내달음 친다.


그렇다면 그냥 되는대로 사는 것이, 삶의 펼쳐짐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다른 것들은 다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랑'이라는 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자신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외도를 경험하는 일도 싫지만, 나 자신이 어떤 필연적인 힘에 이끌려 외도를 한다고 해도 스스로를 용서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의미로 무장하지 않으면 삶은 필연적으로 허무에 빠지게 되는데, 남자와 여자는, 그러니까 부부 관계는 서로에게 무엇보다도 위대한 의미가 되어줄 수 있다. 지키고 싶다. 무슨 일이 생겨도 이 관계를 지키고 싶은데 하나님이 점지해놓으신 배우자가 나와 같은 생각이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여인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을 때 악의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강인한 힘을 갖게 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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