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목 Dec 05. 2023

우리 삶에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있던가?


나는 극단적인 운명론자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리차를 한 잔 마신 것, 책상에 앉아 시답잖은 유튜브 영상 몇 개를 본 것, 커튼을 활짝 열고 아침햇살을 쬐며 글을 쓰는 지금도 모두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다.


사르트르는 '인생은 B와 D사이의 C다.'라고 말했다. 인생은 삶(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hoice)이라는 말이다. 선택이라는 단어에는 자유의지가 깊이 스며있다. 나만 하더라도 보는 시각에 따라 아침에 보리차를 마시기로 선택했고, 시답잖은 유튜브 영상을 보기로 선택했고, 글을 쓰기로 선택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선택 또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라 믿는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착각이다.


내가 오늘 아침에 한 행동들이 습관적인 것이라 운명과 자유의지를 논하기 어렵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삶을 뒤바꿨던 선택이나 결정은 또 어떠한가? 올해 내게 일어난 가장 큰 일은 결혼이었다. 내가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결심했던 순간이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난다. 모든 것이 시간과 관계하여 존재하듯 결혼에 대한 나의 결심도 결국 시간과 관계해 있었다. 결혼에 대한 생각은 이미 연애 초부터 지배적이었지만 상황이 너무 일반적이지가 않았기에 주저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결혼에 대한 고민이 들 때마다 나는 신에게 기도했다. '뜻하신 대로 하소서. 따르겠나이다.' 이는 운명의 부름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이었다. 때가 되니 결혼에 대한 결심이 섰다. 시간이 결혼에 대한 고민을 해결한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시간 속에 존재하니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내면은 단일한 '나'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고민이 있을 때 내면과 대화하는 모양새를 보면 내 안에 여러 '나'가 존재함을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 '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니 그야말로 '나'라는 존재는 마치 허상과도 같은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이 이름 붙인 것이라 내가 즐겨 쓰는 표현인 '펼쳐짐'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삶은 그저 펼쳐지는 것이다. 시간(펼쳐짐)이 선행하고 '나'라는 존재는 후행한다. 자연을 바라보면 이 사실은 더욱 명쾌해진다. 계절의 순환 속에 야생화들은 생멸한다. 생명이 움트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 한 겨울에 움트는 새싹은 없다. 겨우내 꽝꽝 얼어있던 대지가 녹고 습기를 머금기 시작해야만이 새싹이 힘차게 대지를 뚫고 나온다. 이 새싹에게 자유의지란 없다. 그저 때를 만나 피어난 것뿐이다. 인간이 먹이 사슬의 최상단에 위치한 고등생명체라고 해서 자연의 품을 떠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사의 모든 일 또한 자연의 거대한 순리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부자가 될 수 있는 방법론에 대해서 떠드는 사람들은 유튜브에도 널려있고, 서점에도 널려있다. 자유의지가 있다면 방법론을 따라 노력하면 될 일이지만 그 누구도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있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하고 다시 전과 같은 일상을 살아간다. 


인기 강사의 강연장을 꽉 채운 인파들을 보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강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강사의 마지막 말에 기립박수를 치며 '다른 삶을 살겠어!'라고 다짐하지만 삶이 바뀌는 것은 며칠이고 어느새 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있다. 수많은 인파들 중 극소수는 실제로 삶을 바꾸게 되고, 강사의 강연이 자신의 삶을 바꿨다고 믿으며 살아가지만 그저 '때'가 되어 귀인이 나타난 것일 뿐, 계획되어 있던 삶이 그저 펼쳐진 것일 뿐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리하여 자유의지는 착각이 되고 삶은 운명적으로 치닫게 된다. 우리 삶에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글을 마무리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인용이 없을 것 같아 다시 한번 라마나 마하리쉬 선생의 말씀으로 글을 마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유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깨달음을 얻어서 육체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뿐이다. 육체는 프라라브다 카르마(현생에서 받아야 하는 과거생에 의해 축적된 카르마들의 일부. 운명으로 인식되기도 한다.)에 의해 이미 결정된 행위들을 필연적으로 하게 된다.


이때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그 육체의 행위에서 파생되는 열매에 집착할 것인지, 아니면 동일시로부터 벗어나서 단순히 그 육체의 행위들을 지켜보는 자로 남을 것인지, 그 선택에 있어서 인간은 자유롭다.


- 라마나 마하리쉬

매거진의 이전글 그대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