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빌리 엘리어트>
1.
빌리는 고작 11살이다. 1984년, 탄광 파업이 한창이던 마을에 살던 어린 아이다. 거친 말이 오가고 성역할이 확실한 곳에서 그는 발레를 만난다. 그때부터 빌리는 계속 선택의 기로에 선다. 욕망을 따를 것인가, 환경에 순응할 것인가. 욕망을 선택하면 수많은 갈등을 겪어야 한다. 순응을 선택하면 자신이 분열된다. 가능성을 실현하려면 다른 가능성을 포기해야 한다. 그 영향은 자신의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선택의 순간에서 가능성을 저울질하는 건 비단 빌리만이 아니다. 빌리의 꿈을 이루려면 제법 많은 돈이 필요하다. 어머니의 유품인 피아노를 부숴 땔감으로 써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다. 빌리의 재능과 열정을 확인한 아버지는 고민에 빠진다. 빌리의 가능성을 실현한다는 건 다른 가족의 가능성을 담보로 해야 한다. 그 관계가 제로섬은 아니지만 서로 영향을 미치는 건 분명하다.
아버지의 선택은 가정의 테두리를 넘는다. 평생 광부로 살아온 그다. 노동으로 돈을 벌려면 파업을 포기해야 한다. 복귀자를 배신자라 비난하던 그였다. 한 명씩 파업 대열을 이탈하다 보면 전선이 무너지는 건 순간이기 때문이다. 가족 몰래 광산으로 나가던 그는 제지하러 온 빌리의 형에 품에 안겨 오열한다.
2.
빌리의 가능성을 처음 알아본 이는 가능성을 실현하지 못한 선생님이다. 그녀가 왜 발레를 그만두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자기도 모르게 “당신은 실패자야”라고 소리치는 빌리의 뺨을 때리고, 눈물을 터뜨리는 모습에서 그녀의 상처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가능성을 실현하지 못한 자는 가능성의 가치와 그걸 실현한다는 말의 무게를 안다.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이다. 깊이 빛을 간직한 원석도 깎아야 보석이 된다.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기에 알맞은 방법으로 노력해야 한다. 가능성을 실현하지 못한 자는 자신이 걸었던 길과 걷지 못한 길을 계속해서 복기한다. 그 과정에서 생긴 한과 지혜는 다음 가능성을 끌어내는 힘이 된다.
선생님은 빌리의 가능성만 보고 모든 걸 쏟는다. 훗날 빌리가 자신의 도움을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자신이 가지 못한 길을 대신 걸어갈 사람을 길러낸 것만으로 충분하다. 자신은 다른 방식으로 가능성을 실현한 것이다.
3.
빌리는 마침내 발레학교에 진학한다. 노동자의 땀 묻은 50 페니 동전 뭉치와 여성단체 등 소수자들의 모금,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유물을 판 결과다. 그들은 빌리의 가능성을 위해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한다. 그래도 이들이 웃을 수 있던 이유는 자발적인 포기였기 때문이다. 빌리가 발레리노의 꿈을 이뤄도 자신의 삶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자신의 일부를 내놓는다. 그렇기에 포기보다는 지지와 연대라고 말하고 싶다.
이 모습은 당시 영국이 경제성장을 위해 광부들을 대량 해고한 것과 대비된다. 해고는 강제된 포기다. 현대사회는 경제적 효율성을 위해 정리해고를 선택한다. 누군가의 가능성을 없애서 다른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방식이다. 이는 단순히 경제력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난도질하는 것이다.
통계에 나타난 숫자는 사람이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빠르고 효율적인 판단보다 넓고 깊은 판단을 할 수 있을 때, 사회는 좀 더 행복해질 것이다.
4.
영화는 세 장면을 연달아 보여준다. 다시 탄광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아버지와 형, 낡은 체육관에 홀로 서서 입구를 응시하는 선생님, 런던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빌리. 남는 자와 떠나는 자의 모습을 짤막하게 담아낸다.
발레학교에 입학하기 전, 빌리가 겁이 난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조용히 답했다. “괜찮아. 우리 모두 겁내고 있어.”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겁이 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을 어떻게 평가하고 선택하느냐가 결국 우리 삶을 결정한다. 그 선택은 오롯이 내 영향 아래 있지 않다. 좁게는 내 주변 사람, 넓게는 세계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