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항수 Mar 09. 2016

드디어 교과서를 펴다

2014. 03. 26.

"사회, 과학 교과서와 공책을 들고 도서관으로 갑시다."


교과서?


도서관으로 가자는 것은 그러려니 하지만 교과서를 꺼내라는 말에 아이들이 어리둥절 했다.

수학 시간과 교육과정 재구성 시간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교과서를 활용하는 것이니 익숙지 않을 수밖에.


"선생님이 아무리 시험 점수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친구가 있을 거예요.

그렇기에 오늘은 우리나라가 원하는 방식으로 공부해 볼 것입니다."


공부할 범위를 정해주고 읽어가며 중요한 내용을 밑줄을 긋거나 공책에 정리하라고 했다.


"여러분들의 성격이 서로 다른 것처럼 잘하는 분야도 다릅니다.

언어에 뛰어난 친구들은 잘할 수 있겠지만 몸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는 힘들 수 있어요.

그건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지 않은 것이에요.

그러니 부끄러워 말고 모르는 내용은 친구나 선생님에게 묻거나 사전과 스마트폰을 활용해서 이해하면 됩니다."


모둠별로 어떻게 할지 정하고 그에 따라 진행하였다.

"어? 이거 다 선생님이랑 공부한 내용인데?"

"정말 그러네."

"이 그림이 호모 에렉투스인가, 호모 사피엔스인가?"

"도구는 호모 에렉투스인데 생활 모습은 호모 사피엔스네."

"이때 한반도에서는 농사를 짓지 않았는데."


"너희들의 말이 맞는 부분도 있어.

그런데 시험에 문제가 나오면?

무조건 농사를 지었다고 해야 해.

그러니 이게 참 웃기는 현실이지.

그래서 선생님이 시험을 잘 본다고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거야."


아이들은 지금껏 공부한 내용과 교과서에 박제된 지식 가운데서 생각을 정리하고 공책에 옮겼다.

사전도 찾고 친구들에게도 묻는 모습이 제법 열심이었다.

둘러보니 길게 글로 정리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내용을 정리할 때 무작정 길게 글로 쓰는 것은 가장 수준이 낮은 방법이야.

무엇이 중요한지 알기 힘들잖아.

다음은 필요 없는 부분을 줄여 간략하게 적는 것.

단어를 중심으로 마인드맵하는 것이 그다음 단계.

가장 최고봉은 좌뇌와 우뇌를 동시에 이용할 수 있도록 단어와 그림을 활용하여 정리하는 것이지."


#마지막 단계보다 더 높은 단계가 있다.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글이나 작품을 만들어내면 배운 내용이 머릿속에서 재구성된다.


간단한 판서와 함께 설명해주니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설명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을 알기에 추후에 따로 다루기로 하고 해보고 싶은 아이들은 시도해보라고 했다.

절반 정도의 아이들이 방법을 바꿔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회와 과학을 모두 끝내도 시간이 남는 아이들은 관련된 도서를 자유롭게 읽었다.

아이들은 교과서를 따르면 7시간에 걸쳐 배울 내용을 두 시간 만에 더욱 깊이 있고 흥미롭게 정리할 수 있었다.




중간놀이 시간에는 '진주조개' 놀이를 했다.

노는 도중에 몇 명이 성별을 의식하거나 친한 정도를 신경 쓰는 모습이 보여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치고 진행된 놀이 회의에서 아이들이 먼저 그러지 말자고 했다.

이제는 놀이의 진수를 알아가나 보다.




'약수와 배수' 마지막 정리 시간.

아직 스스로 부족한 것 같은 사람 손 들어보라고 하니 열 명 정도가 손을 들었다.

처음 하는 방식으로 공부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다독이며 우리가 아직 잘되지 않는 부분을 짚었다.

첫 번째, 먼저 도와주지 않는다.

두 번째, 먼저 도와달라고 하지 않는다.

짧게 이야기해도 아이들은 잘 알아듣는다.

이전보다 활발하게 모르는 것도 물어보고 자신이 아는 것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한편, 멀리 H의 표정이 어두웠다.

방금 Y의 말에 상처를 받은 것일까?

심한 말은 아니었는데 H는 자존심이 긁힌 듯했다.

다가가 마음을 다독이며 나와 함께 즐겁게 수학 문제를 풀었던 기억을 돌이켜 보게 하였다.

너는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라고.

함께 다시 시작하자고 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부분이 부족한 거 같냐고 물어보니 약수가 어렵다고 했다.

정확하게는 나눗셈부터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차근차근 나눗셈을 하는 방법부터 약수가 무엇인지 약수를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왜 교과서에는 이런 방법으로 구하는지 까지 되짚었다.

수업이 끝나갈 즈음에는 더디지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아직 부족한 것 같은 사람?"

여섯 명의 아이들이 손을 들었다.

"이것도 책임에 속해.

혹시 당분간 아침 독서시간에 부족한 공부를 주변 친구들이 도와줘도 되겠니?"

도움이 필요한 아이도, 도와주겠다는 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는 것을 점점 어려워한다.

그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것은 아이들이다.

반대로 쉽게 변할 수 있는 것도 아이들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우리의 희망이다.


어른들이 점점 잊어가는 소중한 마음을 아이들은 조금씩 찾아가기를.




교사 개인의 노력으로 바꾸기 힘든 것 중 하나가 바로 평가, 시험이다.

평가가 자유롭지 않다면 교육은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교사가 가르친 대로 평가하지 못한다면, 평가에 따라 가르치는 내용이 정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사 개인이 평가 방식이나 내용을 바꾸려고 하면 동학년 교사, 교과전담 교사, 학생, 학부모, 교감, 교장 등 넘어야 할 고비가 끝도 없다.


최근 들어 평가 제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잘 활용한다면 이전보다는 교육의 자유도가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 교육이 꼬인 이유는 결국 선발과 취업, 즉 노동구조의 문제라서 아무리 평가가 바뀐다 하여도 그 한계는 명확하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학부모를 위한 수업 -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